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망월굿 / 김애자

망월굿 / 김애자 강 가운데 생긴 섬마을이다. 태백산에서 태어난 내성천(乃城川)과 소백산에서 출발한 서천(西川)이 만나 마을을 휘돌아나가면서 물돌이동을 만들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수도리 모래사장에는 일 년 중 가장 달이 크게 보이는 정월대보름 달집이 세워진다. 달집을 태우면서 한 해를 시작하면 바라던 일들이 잘 이루어 질 것 같다. ​ 어릴 적에는 설날보다 대보름이 더 신났다. 농한기의 쉼을 얻은 어른이나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명절이라는 이유로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낮에는 연날리기와 지신밟기로, 밤이면 쥐불놀이로 마을은 온통 축제로 들떴다. ​ 절정은 달집태우기였다. 타오르는 불 앞에 소원을 걸어놓고 이루어지기를 빌고 다짐하는 것은 한 해의 농사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은 긴 막대로 기둥을 ..

좋은 수필 2023.06.18

태실(胎室) / 박시윤

태실(胎室) / 박시윤 가을볕을 받으며 태실에 오른다. 세종대왕 대군들의 태(胎)가 봉안된 곳이다. 여기는 내 마음의 시름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혼자 조용히 다녀가는 영혼의 정화구역이다. 풍수에서는 태실을 두고 새끼를 잉태한 어미의 자궁과도 같아서 사시사철 좋은 기氣가 흐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태실을 다녀간 한동안은 고른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돌배가 아들과 함께 왔다. 태초부터 태를 사이에 두고 나와 한 몸이었던 아이 아니던가. 넘어지고 울고, 기어가고 웃고 아이는 매 순간 표정과 감정을 달리하며 세상을 향해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 그늘은 아이와 나의 몸이 들어서기에 충분하다. 나직하게 드리워진 산길의 안개가 가을이 깊어 감을 말해 준다. 키 작은 구절초의..

좋은 수필 2023.06.18

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박시윤

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 박시윤 하나의 덩어리는 언젠가는 조각나기 마련인 것인가. 아니면 조각난 것들은 언젠가는 하나의 덩어리로 다시 결합될 수 있는 것인가.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은 퍼즐처럼 하나로 들어맞았고, 나는 그 속에 잊혀 진 하나의 세상이 존재했음을 예감한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으로의 빗장은, 무겁고 둔탁한 미로 속을 배회하듯 조심스럽다. 손가락 하나를 무늬에 갖다 대고 천천히 지문을 읽힌다. 암호를 대고 기밀의 문을 통과하듯 내 지문은 그들이 요구하는 비밀부호에 적합했고, 일정하게 흘러가던 빗살의 언어들이 하나, 둘 깨어나 해석을 재촉한다. 하나같이 똑같은 무늬인 듯해도 가만가만 되짚어 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언어로 까끌 거렸고, 육천년을 단숨에 건너와 깊이와, 촉감을 달리하며 나의 손끝에서..

좋은 수필 2023.06.18

[우리말 바루기] “밥 한번 먹자”의 띄어쓰기

[우리말 바루기] “밥 한번 먹자”의 띄어쓰기 다음 중 ‘한 번’ 띄어쓰기가 바른 것은? ㉠ 언제 밥 한 번 먹자 ㉡ 한 번 해보겠습니다 ㉢ 너 말 한 번 잘했다 ㉣ 한 번만 봐주세요 한국인의 뻔한 거짓말 1위가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한다. 거짓말인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괜찮은 말이다. 이를 글로 적는다면 ‘한번’을 붙여 써야 할까, 띄어 써야 할까? ‘한번’ ‘한 번’ 띄어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부분이다. 먼저 정리하면 ‘한번’은 기회·시도·강조를 뜻하고, ‘한 번’은 횟수를 의미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에서는 기회를 뜻하므로 ‘한번’으로 붙여 써야 한다. “시간 날 때 한번 놀러 오세요”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습니다”도 이런 경우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는 시도를 의미하므로 ‘한..

우리말 2023.06.17

띄어쓰기 및 바뀐 표준어

띄어쓰기 및 바뀐 표준어 * 너만큼 -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 +조사 = 붙여 쓴다 * 할 만큼 - 관형어(꾸며주는 말) +의존명사 = 띄어 쓴다 * 된소리 ‘ㄲ, ㄸ, ㅃ, ㅆ, ㅉ’소리가 나더라도 예사소리 ‘ㄱ,ㄴ,ㄷ,ㅂ,ㅅ,ㅈ’으로 적는다. 예) 갈걸, 갈게, ……. 그러나 (갈까, 갈꼬, 갈쏘냐), 의문형 3가지만 된소리로 적는다. * 된소리를 소리 나는 대로 일치되게 그대로 표기인정, 접미사들 중 이유가 없는 것은 ‘군’을 ‘꾼’으로 바꿨다. ‘군’은 임금의 서자나 종친의 뜻을 가진 접미사 君, 군대의 軍, 행정 구역의 군郡을 나타낸다. 예) 일꾼, 지게꾼, 밀렵꾼, 장난꾼, 심부름꾼, 광해군, 연합군 가평군, 때깔, 귀때기, 이마빼기, 곱빼기, 겸연쩍다, 멋쩍다. * 구개음화 중 모음에 ..

우리말 2023.06.17

'하다'의 띄어쓰기 요령

'하다'의 띄어쓰기 요령 1. '하다'가 어근에 붙어 파생접미사로 쓰일 때는 반드시 붙여쓴다. 예) 환영하다, 공부하다, 사랑하다, 발전하다 2. '-워 하다'는 붙여쓰고, '-야 하다'는 띄어쓴다. 예)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자랑스러워하다 떠나야 하다, 지켜야 하다, 가져야 하다, 삼아야 하다, 원해야 한다, 나가야 한다 3. '못하다'는 '못'과 '하다'가 하나의 합성어로 굳어져 '뜻이 변한 경우'에는 붙여 쓰고, 그렇지 않은 '상황 부정'에는 띄어쓴다. 예컨대 "노래를 못하다."와 "노래를 못 하다."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 수준미달, 능력부족(술을 못하다, 노래를 못하다, 음식 맛이 예전보다 못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라는 뜻(잡은 고기가 못해도 열 마리는 되겠지), '-지 못하다' 구..

우리말 2023.06.17

** 띄어쓰기는 어떻게? **

** 띄어쓰기는 어떻게? ** 1. 조사나 접사를 제외한 단어와 단어 사이는 반드시 띄어 씁니다. ♠ 기본적인 띄어쓰기의 원칙 : 단어와 단어 사이는 무조건 띄어 써요. ♠ \'수, 것, 바, 데\' 등 의존명사도 띄어 씁니다. ▶ 먹을것이많다 → 먹을 것이 많다 ▶ 원하는바대로이루어지게하소서 →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 그가간데는아찔한곳이었다 → 그가 간 데는 아찔한 곳이었다 ▶ 궁하면개구리도먹을수있다 → 궁하면 개구리도 먹을 수 있다 2. 복합어, 조사, 접두사, 접미사는 반드시 붙여써요. ♠ 복합어는 이미 한 단어로 굳어진 것이니까요. ▶ 피자특대로하나주문하자 → 피자 특대로 하나 주문하자 ▶ 원성스님은동자들만이뻐한다. → 원성스님은 동자들만 이뻐한다. ▶ 산에올라가다 → 산에 올라가다 ..

우리말 2023.06.17

부채 / 홍정식

부채 / 홍정식 고향 집 안방 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모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부친다. 날은 한여름이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에게 태극선을 살살 흔들어 바람을 피우고 혹시나 손주에게 달려들 파리나 벌레를 쫓는다. 다정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득하다. 그 마루 밖으로 아버지가 여동생을 안고 흐뭇하게 보고 계신다. 나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섬돌 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간 그리고 두 동생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흑백사진이므로 태극선은 검고 희게 나타나 있다. 사진을 찍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 탈상을 했다. 그 부채는 사라졌으나..

좋은 수필 2023.06.14

그림자의 질량/최민자

그림자의 질량/최민자 봄부터 가을까지, 내 아침은 새들이 몰고 온다. 새들은 참 따뜻한 악기다. 깃털 속에 보드라운 바람을 품고 차고 맑은 소리를 뱃구레에서 길어 올려 산 아랫마을로 증폭시켜 흩뿌린다. 어스름 허공에 씨앗을 파종하듯 짧은 스타카토로를 점점이 뿌리거나 강약 강약이나 강약 중강약 같은 리듬으로 다채로운 빛깔의 선율을 유포한다. 새가 길어내는 레몬 빛 모음과 청량한 새벽 공기와 핸드드립으로 내린 호세 바닐라 커피만으로도 뒤숭숭한 꿈자리가 기척 없이 휘발된다. 청회색 꽁지깃을 가진 새가 행길 위에 그림자를 떨구며 공원 쪽으로 날아 들어간다. 마른 씨앗을 삼키고 뼛속을 비우고 물똥까지 싸질러내는 것도 모자라 목구멍 안쪽의 속울음까지 끼룩끼룩 긁어 내뱉어버리고야 공중의 행보를 이어 붙이는 새들. 가..

좋은 수필 2023.06.13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풍경과 시간이 살아가는 남녘 섬의 따뜻한 서정 - 신진순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삶의 지극한 원형을 찾아가는 미학적 페이소스 신진순의 신작시집 『난파선 한 척, 그 섬에』는 남녘 섬에서 겪어온 삶의 순간들을 낱낱이 기록한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도록(圖錄)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고흥 나로도는 차랑차랑, 하염없이, 오랜 풍경과 시간을 쌓아가는 천혜의 공간이다. 시인은 그러한 풍경과 시간의 흐름을 때로는 잔잔하고 투명하게, 때로는 격정과 회한을 얹어 토로해간다. 시종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통해, 삶의 만만찮은 굴곡을 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려는 의지를 충만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과 시간을 발화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장된 감상(感傷)이나..

평론 2023.06.10

사랑니/이경숙

사랑니 이경숙 겉으로 솟지 않는 이름까지 알 수 있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보이는 입안 저쪽 무언가 캄캄한 뿌리를 건드리고 다닌다 판독기에 X-ray 환하게 내걸린다 간단히 흑백으로 드러나는 뿌리 끝 무엇을 잡으려는지 암팡지게 휘어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들쑤신 게 너였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밑둥치 아득한 데서 외침이 솟구친다 뺨에 멍들이고 두두룩히 부어오른다 여러 날 애먹인 후 빠져 나간 사랑니 그렇다. 안타까울수록 놓는 순간이 아픈 것

좋은 시 2023.06.07

숨은 촉 / 김애자

숨은 촉 / 김애자 아침부터 굴착기가 들어와 다리 밑에 쌓인 흙을 퍼 올리고 있다. 70년 초에 새마을 사업으로 놓였던 다리를 헐어내고 다시 놓은 다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열 푼 짜리 굿판에 떡값이 일곱 푼 격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사라지고, 철근을 촘촘히 박아가며 새로운 공법으로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먼저 고쳐놓기 위해 벌인 공사가 시공한 지 한 달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지난여름 장마는 끔찍한 재난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리퍼붓는 물벼락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 평의 농지와 수십 채의 가옥이 토사에 묻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처럼 폐허로 변해버린 수마의 상처는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오지마을인 이곳은 몇 군데의 산사태가 난 것과, 범람하는 물살로 약간의 농지..

좋은 수필 2023.06.07

자투리 / 최장순

자투리 / 최장순 밤 열 시, 일단 눕고 본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지만 웬걸, 머릿속이 끓는다. 생각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탓일까. 그러나 냉큼 잠들지 못하는 그 짧은 시간이 고마울 때가 있다. 뒤척임이 반짝 생각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희열인 횡재인가.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운전 중에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생각처럼 말이다. 왜 이런 순간에 창조의 씨앗은 발아되는가. 하지만 순간적인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잠자리를 박찬다. 망각이 거두어가기 전에 잡아두어야 한다. 자투리 발상이 주제가 되어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질 때, 그 기분은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짙다. 강제로 짜내지 않은 오묘함, 뒷맛조차 개운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까무룩, 하루가 숙면에 들..

좋은 수필 2023.06.06

하소연/황진숙

하소연/황진숙 저 영감탱이 때문에 못 살겠단다. 식당에서 엄마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갈비탕 맛을 모르겠다. 밥 먹고 천천히 말씀하시라 권해도 막무가내다. 그간 묻어뒀던 사연이 끓어 넘친다.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엄마는 봄부터 복숭아 농사를 짓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깡마른 몸으로 종일 밭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칠순의 나이에 버거운 거다. 혈압이 있어서 무리는 금물인데, 성정이 급한 아버지는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그치고 채근한다. 이제는 농사일을 접고 편히 쉬시라 말해도 아버지는 귓등으로 흘린다. ‘쉬엄쉬엄 일손을 얻어 일량을 덜고 병원에 가서 영양제라도 맞아가며 하면 수월하지 않겠냐’라는 조언을 뭉개고 요지부동이다. 치매 진단까지 받고 우울증도 있는 아버지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니 애먼 엄마만 들..

발표작 2023.06.05

몽돌/박숙이

몽돌 박숙이 까무잡잡한 것이 억수로 시달린 것이 땡글땡글 반들반들 매력적인 것이 참 각도 없이 맹랑한 것이! 몸 굴리는 소리도 저리 야성적인 것이! - 시집『활짝』, 시안, 2011 몽돌의 나이는 크기로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작은 몸으로 나서 점점 커지고 다시 작아지는 것처럼 돌도 처음에는 작은 알갱이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달라붙어 덩치가 커지고 다시 풍파에 시달려 부서지고 깎인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모난 데를 덜어내고 매끈해지기를 거듭한다. 이후로도 까마득한 시간을 구르며 작아질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새벽 바다에서 차르르 들려오는 소리, 파도소리인지 돌 구르는 소리인지 바람인지 세 가지 맛이 섞인 듯하다. 눈으로 보는 순간 소리가 왜곡된다고 믿는 나는 혼자 깨어난 바닷가 여관에서 ..

좋은 시 2023.06.01

고드름의 뼈/조선의

고드름의 뼈 조선의(1960~ )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가 깜냥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드름이 향한 곳은 아찔한 처마 끝이거나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하는 땅바닥 이렇다 할 옹이도 없이 아래로 오르는 정점 설원에 닿지 못해 사라진 입김들이 난반사되듯 구름의 역린에 달라붙는다 흔한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 제 살을 훑어 뾰족한 마음의 가시마저 녹여내는 안간힘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눈꽃 한 송이 필 수 없는 사막 어디쯤 저 몸뚱이 툭 부러뜨려 뚝딱 집 한 채 지으면 생의 단면들이 입자로 부서져 내 척박한 체념까지 한꺼번에 쓸어가 버릴까 한순간도 감출 수 없는 투명한 기척 결기를 세웠던 뼈들이 물로 녹아든..

좋은 시 2023.05.31

용접 / 이석현

용접 /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 금속재료를 접합하기 위해 접합부에 금속을 가열 용융시켜 서로 다른 두 재료의 원자결합을 재배열 결합시키는 것을 용접이라 하고, 용접결과의 좋고 나쁨을 ‘용접성’이라고 한다. 오래 전 성수..

좋은 시 2023.05.31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사각형의 세상에서 쌍봉낙타의 꿈을 꾸다 - 이지엽,『사각형에 대하여, 고요아침, 2011. - 박성민,『쌍봉낙타의 꿈, 고요아침, 2011. 이 송 희 (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1. 현대시조의 현실인식, 그 실험과 성취 시인은 이 세계의 모순과 결핍을 진단하며 경고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 물화된 욕망, 소외된 삶의 단면들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독자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치열한 역사적 사건들이 즐비했던, 열망과 고뇌의 20세기에 시인들은 기꺼이 잠수함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서 산소의 부족함을 경고하고 먼저 죽는 역할을 했다. 시인들이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은 곧 현실에..

평론 2023.05.31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

좋은 시 2023.05.31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화엄의 숲, 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성찰하는 시간 - 오종문론 이 송 희(시인) 1. 현실 비판의 지상에서 자아성찰의 땅 속으로 시인은 끊임없이 세상과 타자, 또한 스스로의 삶에 관여하는 존재다. 감각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최소의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공자의 말처럼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사유를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니던가. 요즘처럼 빠른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 현대의 시들은 할 말이 많아졌다. 시 한 편이 두 페이지를 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시집 한 권이 단 한 편의 시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는 시에서조차도 말을 ..

평론 2023.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