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팔월/서성남

팔월 서성남 팔월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여느 달보다 더 많이 모습을 바꾼다. 이른 새벽, 물꼬를 보러 들판으로 나가면 살갗에 닿는 공기가 신선하다. 새벽의 정령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른 해는 들판의 옅은 안개를 서서히 걷어낸다. 햇빛이 퍼져 가면 밤새 쉬었던 뭇 생명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지 사방은 왕성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햇볕은 점점 강렬해진다. 한낮이 되면 오만한 본색을 드러낸다. 기세등등하고 의기양양하다. 제왕처럼 행세한다. 개도, 사람도 그를 피한다. 풀은 몸을 비틀며 항복하고 나뭇잎은 생기를 잃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엎드리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않고 하루 내내 해바라기를 해야 한다. 반항은 용납..

좋은 수필 2023.06.25

8월엔 시그널 뮤직을/김애자

8월엔 시그널 뮤직을 김애자 8월엔 입추와 처서가 들어있다. 절기로 처서가 지나면 식물들은 더 이상 성장세포를 만들지 않는다.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벼가 패고 꽃이 피는가 하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계엄군처럼 천변을 점령하던 억새 포기에도 배동이 선다. 동부콩이 꼬투리 안에서 태아처럼 하얀 막을 뒤집어쓰고 영글어가는 것도 이때부터다. 8월엔 태양의 열기도 절정에 이른다. 한낮이면 얀정머리 없이 내리 꽂히는 햇볕으로 아스팔트는 불가마를 연상케 한다. 호박잎이 지열을 견디지 못해 축축 늘어지고, 연잎에 자발없이 올라앉은 청개구리는 턱밑 살가죽이 발랑거리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이런 폭염 속에서도 고속도로는 종일 붐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받은 직장인들이 연인이나 혹은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

좋은 수필 2023.06.25

식은 죽/강표성

식은 죽 강표성 그 집 앞에 멈추었다, 습관처럼. 죽집은 여전했다. 주렴을 밀치니 작은 식당 안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앞자리의 할머니 둘이 미장원의 파마 수건을 뒤집어쓴 채 식사에 열중이다. 이웃과 머리 단장하러 온 김에, 형님 아우 하며 점심을 나누는 중이다. 문 옆의 할아버지는 말없이 할머니 콧등의 땀을 닦아준다. 모처럼의 외출에 지팡이 임자는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들, 여기 겉절이 더.” 마치 자기 아들을 부르듯, 생김치를 재청하는 아주머니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챙겨주는 젊은이다. 부모는 주방에서, 아들은 식당에서 손발이 척척 맞는다. 싹싹한 청년이 나르는 단 맛에 취해 잠시 그 옛날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동지 무렵이면 신이 났다. 밖에서 뛰어놀다..

좋은 수필 2023.06.24

푸른 텐트/정영숙

푸른 텐트 정영숙 가을비다. 흩날려 쌓인 낙엽이 젖는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주말은 흐린 날이 한결 좋다. 나지막한 창 밖의 풍경이 일상의 거품을 잠재우고, 여러 날 무엇엔가 씌어 살다가 비로소 땅 위에 정착한 것 같은 날이 비 오는 날이다. 아이들조차 방에서 기척이 없으니 집안이 절간 같다. 뒤꼍 창고에서 한참을 부스럭대던 남편이 잡다한 기물들을 한아름 가져다 거실에 늘어놓는다. 에어매트에 바람을 채워보고 녹슨 버너며 텐트 막대 따위에 마른걸레질을 한다. 묵은 세간에 거품 겸 잔손질을 해둘 모양이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래 익숙한 행동반경의 한계랄까. 가령 비가 오는 이런 날, 양푼에다 밀반죽을 시작하면 아내가 멸치국물에 칼국수를 말아 주겠거니 여길 뿐 ..

좋은 수필 2023.06.24

섬/김희자

섬 김희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섬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실재하는 지구 또한 외딴 섬이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혼자인 섬이다. 우리 삶도 섬이 되는 날이 있다. 어부의 통통배를 얻어 타고 앵강만을 건너 노도에 섰다. 노도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티끌처럼 떠 있는 섬이다. 실타래 같은 인연으로부터 탈출의 욕구에 시달릴 때는 차라리 세상만사와 아득히 먼 섬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 속에서 중심을 잡아보지만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섬에 오고 싶었다. 그리움도 병인 양 부딪혀서 환상을 깰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낫다. 비우고 털어 낸 자리에 또 다른 것이 채워지듯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구운몽의 배경이 되었던 앵강만은 전..

좋은 수필 2023.06.24

빈 깡통/구자호

빈 깡통 구자호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허름한 입성으로 살을 에는 손돌이 추위를 견디는 일은 배고픔만큼이나 처절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가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찬 일이었다. 두 팔을 뻗어 깡통을 내민다. 아낙네가 주는 밥은 깡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곱아 어눌해진 손이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숟가락으로 떠준 밥 한 덩이를 놓치고 만 것이다. "주는 밥도 못 받노! 가거라!" 밥 대신 아낙네가 던진 매몰찬 말 한마디가 어린 가슴에 푸른 멍이 들게 했다. 내 인생은 너무 일찍 빈 깡통이 되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깡통을 들고 거리를 배회해야 했다. 채워지기보다 비어 있던 적이 훨씬​ 많았던 깡통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좋은 수필 2023.06.24

시어머니의 초상肖像 /박경주

시어머니의 초상肖像 박경주 ​​​ 북극에 있는 버드나무는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얼음과 바람을 피해 바닥끝까지 다리를 뻗어 생명을 이어가지. 일 년 내내 비가 내려 봐야 겨우 콜라병 하나 정도 온다는 척박한 사막에 사는 소나무도 비를 좀 더 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대신 최소한으로 먹고 마시게끔 자기 몸 구조를 되도록 단순화시킨대. 곰도 눈 쌓인 겨울동안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미리 잔뜩 먹어두고 잠을 청하며 조용히 봄날을 기다리지. 목마른 나무가 가늘디가는 뿌리로 땅속 깊은 곳을 핥으며 물을 찾고 또 찾아서 겨우 목을 축이듯이 말이야. ​ 기쁘고 뿌듯했다네. 서운하고 아쉬웠다네. 그렇게 며느리를 맞이했다네. 홀시어머니라서 더 조심스러웠고. 평판이 잘못 날까 두려웠다네. 조심조심. 내 일찍이 그렇..

좋은 수필 2023.06.24

너테 /조이섭

너테 조이섭 자형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잡은 손이 파르르 떨고 있다. 나를 지그시 건너다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처남, 인제 아파하지 않아도 되려나?” 김 노인은 먼저 간 큰아들의 딸아이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회색 잉크를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흐린 하늘이 을씨년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옆 강둑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다. 아들 대신 손녀를 신랑에게 넘겨주었다. 예식장 가운뎃길을 걸어가는 내내 오히려 신부가 팔짱을 끼고 곁부축하는 모양새였으나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실없이 밝은 조명 때문에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을 뿐이었다. 김 노인은 손녀의 결혼식이 덤덤하기만 했다. 작은 기쁨이 큰 불행의 척후병처럼 다가올까 두려웠다. 혼주석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호둣속 같았다.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좋은 수필 2023.06.24

수피/이명길

수피 이명길 공원 산책길, 갈바람이 선선하여 팔랑대는 이파리 사이로 드러난 하늘이 드높다. 단풍나무가 밀집한 곳에 오자 뒤쪽에는 초록색인데 앞쪽에는 선홍색이다. 태생에 따라 물이 드는 시기가 서로 다른 단풍나무들이 어울려 가을을 풍성하게 한다. 앞쪽에 심겨진 나무가 홍단풍 나무이다. 키가 작아 가지에 손이 닿는다. 손을 펼친 모양의 잎은 가을을 노래하듯 발갛게 물들어 마음마저 달뜨게 한다. 여기서는 이국 종의 거둠 역할을 하는지 야윈 줄기 끝에 잎이 몇 개 말랐다. 뒤쪽으로 심겨진 나무는 중국 단풍나무이다. 태생을 알리는 듯 이름표가 걸렸다. 삐죽한 키에 잔가지를 잔뜩 내고 잎이 오리발 모양새인데 볼 때마다 줄기의 거친 껍질을 벗는다. 한 겹만 벗으면 좋으련만 사철 내내 허물 벗는 듯하다. 몇 년 이 길..

좋은 수필 2023.06.24

찬란한 슬픔 덩어리 /박희선

찬란한 슬픔 덩어리 박희선 내 몸은 헐겁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어지럼병이 쉽게 들어 올 만큼 틈이 많다.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나를 사정없이 눕힌다. 한 해쯤은 건너뛰어도 섭섭하지 않을 일인데 벌써 삼 년이나 제집처럼 들락거린다. 천장이 빙그르르 돌면 모질게 내칠 수 없어 이석증, 너 왔구나 하고 반긴다. 다행히 죽을 만큼 아프지 않아 참을 만하다. 며칠이나 머물다 갈는지 하루가 아득해져 눈을 감는다. 우리 집 창문도 헐거워졌다. 나이를 먹어 자주 덜컹거린다. 내 몸은 병이 흔들고 창문은 주변 진동이 가만두지 않는다. 덕분에 누워 있어도 덜 심심하다. 문틈으로 찾아든 바람이 고요고요 소리를 내며 집안을 누빈다. 활기차게 움직일 때는 듣지 못하던 소리다. 나는 어지러움을 베개 삼아 바람의 고요를 무한..

좋은 수필 2023.06.24

소춘(小春) / 김은주

소춘(小春) / 김은주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낀 볕 한 줌을 잡고 무를 썬다. 행여 짧은 해가 기울기라도 할까 봐 일하는 내내 조바심이 난다. 버릴까 생각하던 늙은 도마를 꺼내 좀 휘고 못생긴 무부터 자른다. 오랜 세월 칼맛을 본 도마는 깊게 살이 패여 둥근 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린다. 뭐 그러면 어떤가? 도마의 형편이 그러하다면 무가 도마의 비위를 맞추면 되지. 흔들흔들 무가 패인 도마 사이로 몸을 디밀고 안정감 있게 칼을 기다린다. 찹찹하니 물기 가득한 무는 무딘 칼날에도 스스럼없이 몸을 연다. 넉넉한 영양분을 받고 자란 매끈한 자태는 아니지만 휘고 구부러진 몸에 지난 계절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수북한 잔뿌리를 보니 돌봐 주지 않아 스스로 뻗어 나간 야생의 에너지가 거미줄처럼 엉켰다. ..

좋은 수필 2023.06.23

분첩 / 김은주

분첩 / 김은주 분첩을 샀다. 까만 바탕에 자개가 촘촘히 박힌 분첩이다. 분첩 뚜껑을 장식하고 있는 조개껍질은 장미꽃으로 피어나 있다. 장미는 검은 뚜껑이 밤하늘이라도 된 냥 서로 줄기를 문 채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이는 뚜껑을 열어 보니 케이스 가득 분이 담겨져 있다. 그 분을 살포시 누르고 있는 분 솔은 보랏빛 솜털이다. 젊은 사람 화장대에나 어울림직한 이 분첩을 나는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께 드릴 요량으로 샀다. 삼월이 생신인 어머니께 무엇이 갖고 싶으냐고 물으니 주저 없이 분첩이라고 하셨다. 화운데이션도 아니고 분첩이라는 말에 잠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지가 온통 새싹을 틔우기 위해 꿈틀거리는 봄날,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노모의 목소리는 온통 나비 떼가 되어 내 귀에 날아들었다. 봄의ㅂ과..

좋은 수필 2023.06.23

수면/권혁웅

수면 권혁웅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시집『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5) ▶권혁웅=1967년 충북 청주 출생. 1997년 문예중앙신인상 시 당선.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등이 있다. 현대시 작품상, 현대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수면'은 물의 얼굴(水面)과 잠(睡眠)으로 읽힌다. 시인은 작은 돌을 던져 물의 깊이(水深)와 사람의 근심(愁心)을 짐작하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옛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水面은 돌팔매질 한 번에 주름치마처럼 구겨졌다, ..

좋은 시 2023.06.22

북미 원주민의 달력

북미 원주민의 달력 1 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 아리카라족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달 / 쥬니족 얼음 얼어 반짝이는 달 / 테와 푸에블로족 바람 부는 달 / 체로키족 2 월 물고기가 뛰노는 달 / 위네바고족 홀로 걷는 달 / 수우족 기러기가 돌아오는 달 / 오마하족 삼나무에 꽃바람 부는 달 / 테와 푸에블로족 3 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 체로키족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 / 수우족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 아라파호족 4 월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 블랙푸트족 머리 밑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 체로키족 거위가 알을 낳는 달 / 샤이엔족 옥수수 심는 달 / 위네바고족 5 월 들꽃이 시드는 달 / 오사지족 말이 털갈이하는 달 / 수우족 오래 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향기로운 글 2023.06.22

[우리말 바루기] “밥 한번 먹자”의 띄어쓰기

[우리말 바루기] “밥 한번 먹자”의 띄어쓰기 다음 중 ‘한 번’ 띄어쓰기가 바른 것은? ㉠ 언제 밥 한 번 먹자 ㉡ 한 번 해보겠습니다 ㉢ 너 말 한 번 잘했다 ㉣ 한 번만 봐주세요 한국인의 뻔한 거짓말 1위가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한다. 거짓말인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괜찮은 말이다. 이를 글로 적는다면 ‘한번’을 붙여 써야 할까, 띄어 써야 할까? ‘한번’ ‘한 번’ 띄어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부분이다. 먼저 정리하면 ‘한번’은 기회·시도·강조를 뜻하고, ‘한 번’은 횟수를 의미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에서는 기회를 뜻하므로 ‘한번’으로 붙여 써야 한다. “시간 날 때 한번 놀러 오세요”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습니다”도 이런 경우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는 시도를 의미하므로 ‘한..

우리말 2023.06.22

【우리말 바루기】 ‘걸까’는 띄어 쓸까, 붙여 쓸까? -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걸까’는 띄어 쓸까, 붙여 쓸까? - 중앙일보 독자분께서 질문을 해 오셨다. “그런걸까”를 붙여 써야 하는지, “그런 걸까”로 띄어 써야 하는지 물으셨다. 우리말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가 띄어쓰기다. 여간 노력을 기울여도 제대로 띄어 쓰는 것이 쉽지 않다. ‘걸까’의 띄어쓰기를 판단하려면 ‘걸까’가 무엇의 줄임말인지 따져 보면 된다. “그런걸까”에서 ‘걸까’는 ‘것일까’의 줄임말이다(‘거’는 ‘것’의 구어). ‘것’은 항상 띄어 써야 하므로 “그런 걸까”로 띄어 쓰는 것이 맞다. ‘건지’나 ‘걸’도 그렇다. “그런건지”에서 ‘건지’는 ‘것인지’의 준말이므로 “그런 건지”로 띄어 써야 한다. “그런걸 왜 물어?”에서 ‘걸’은 ‘것을’의 준말이므로 “그런 걸 왜 물어?”라고 적..

우리말 2023.06.22

가지치기하다가 / 최명임

가지치기하다가 / 최명임 그가 배롱나무 무용한 날개를 잘라내려고 한다. 나무는 통증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어찌 감당하려나. 언젠가는 성장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오늘은 눈물깨나 흘려야 할 거다. 탁, 탁 가위질이 끝난 자리에 허연 핏물이 배어 나온다. 멀대 같은 나무 정수리에 남은 서너 가지가 오롯한데 한편에선 흐느낌이 들린다. 내가 없는 사이 이웃과 경계 목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가지 하나 없이 몸통만 남겨 놓았다. 놀라 물었더니 눈치 없이 옆집 고추밭을 침범해서 그랬다고 머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적당히 다스리지!” 그와 나는 ‘적당히’란 말을 놓고 자주 티격태격한다. 세상사가 알맞음의 기준만 지키면 금상첨화겠지만, 너나없이 아집이 끼어들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몇 년째 가지치기할 때마다..

좋은 수필 2023.06.21

고추 / 강미나

고추 / 강미나 종묘상 앞이다. 모종판들이 인도를 반이나 점령했다. 원고지 칸칸에 쓰인 글자들처럼 포트 안에 서 있다. 저잣거리에 불려 나오느라 물을 흠씬 맞았는지 앳잎 끝에 방울 물이 대롱대롱하다. 나는 눈으로 고추 모종을 고른다. '안 매운 것은 저쪽이요' 순한 맛을 찾는 내게 주인아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다가섰다. 이쪽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 매운 건 없을까. 색이 짙은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 뒷줄에 연두색들이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 있다. 나는 목을 쑥 빼서 눈을 맞춰 준다. 어느 게 순할까? 한참을 망설인다. 모종은 실해야 된다고 옆에 선 아저씨가 말해 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산골 냄새 풍기는 가늘한 것에게 끌렸다. 그 가녀린 허리를 외면하지 못해 두 판을 데리고 온다. 마음..

좋은 수필 202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