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8월엔 시그널 뮤직을/김애자

에세이향기 2023. 6. 25. 07:25

8월엔 시그널 뮤직을

 

 

                                                                                                                                김애자

    

  8월엔 입추와 처서가 들어있다. 절기로 처서가 지나면 식물들은 더 이상 성장세포를 만들지 않는다.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벼가 패고 꽃이 피는가 하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계엄군처럼 천변을 점령하던 억새 포기에도 배동이 선다. 동부콩이 꼬투리 안에서 태아처럼 하얀 막을 뒤집어쓰고 영글어가는 것도 이때부터다. 

 

 8월엔 태양의 열기도 절정에 이른다. 한낮이면 얀정머리 없이 내리 꽂히는 햇볕으로 아스팔트는 불가마를 연상케 한다. 호박잎이 지열을 견디지 못해 축축 늘어지고, 연잎에 자발없이 올라앉은 청개구리는 턱밑 살가죽이 발랑거리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이런 폭염 속에서도 고속도로는 종일 붐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받은 직장인들이 연인이나 혹은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바다로, 강으로 계곡으로 떠나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 

   

 양력 8월은 음력으로 치면 7월에 해당된다. 이때쯤이면 농가에선 김매기와 김장배추파종이 끝난 터라 한가롭다. 그래 어정칠월이라고도 한다. 강촌에 살던 두보선생이 종이에다 장기판을 그리는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바늘을 두드려 고기 낚을 낚시 바늘을 만드는 모습을 시에 등장 시키던 때도 필경 어정칠월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팔월은 책 읽기에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책을 읽기 전에 앞서 책을 거풍시키는 일이 먼저다 흰 면장갑을 끼고 서재로 들어가 오래된 화집이나 전집과 고전을 누마루로 내다가 바람을 쐰다. 이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갈피에서 꽃잎이나 나뭇잎이 나오곤 한다. 그러면 잠시 손을 놓고 이런 것을 따서 책갈피에 끼우던 때가 언제였던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만 퇴화된 나의 기억은 매번 시간의 미로에서 헤매다 돌아오곤 한다. 

 

 여름엔 쪽수가 많은 책보다는 단행본이 좋다. 지난여름엔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포리스트 카터가 쓴「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다산 산문집」을 잼처 읽었다.

 

 책을 읽다가 엉덩이가 의자에 마치면 마당으로 내려가 소나무 아래에 놓인 바위에 걸터앉는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울음을 듣거나 데크 난간 사이에서 열심히 그물을 짜는 거미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도 심심치 않다.

 

 녀석은 언제나 혼자다. 저 혼자서 진액을 방사하여 허공에다 그물을 짜는데 내 눈이 침침하여 녀석이 난간과 난간 사이를 바쁘게 오고가는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한참후면 우산살 모양의 은색 그물이 완성될 것이다. 그 다음엔 한쪽 귀퉁이에서 죽은 듯 숨어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거미가 유독 외롭고 허기져 보이는 것은 늘 혼자서 행동하기 때문일 게다. 

    

 가끔 소나기가 지나가면 이건 예기치 못한 특별 보너스다. 번개가 번쩍 섬광을 긋고 천둥이 지축을 흔들며 비바람을 몰고 기마병처럼 달려오면, 열어 놓았던 창문을 재빠르게 닫아야 한다. 빨래 줄에 걸린 빨래도 어마지두 뛰어나가 걷어 들인다.

 

 소나기는 빗방울이 굵다. 굵어서 생동감이 넘친다.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빗방울이 연잎을 두드리고 칸나 잎을 후려진다. 장독대 옆 봉숭아꽃과 배롱나무 꽃이 송이채 떨어져 빗물을 타고 둥둥 떠내려간다. 바라만 보아도 장쾌한 카타르시스다.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엔 애호박전이 제격이다. 빗물에 씻긴 애호박을 따다 채치고, 부추도 한 줌 뜯어 넣고, 청양 고추는 잘게 다져 감자전을 부친다. 이때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잔에 붓는다. 막걸리가 더 어울릴 터이나 20리 산 밖으로 나갈 일이 엄두가 안 난다. 대신 남편이 여름철 음료로 마시는 맥주를 꺼내어 따르면 노란 액체가 유리잔에 반쯤 차고 나머지는 거품이다. 입술에 거품을 묻히며 단숨에 들이키곤 따끈한 전을 젓가락으로 살살 뜯어 먹는다. 

  

 그런 후에는 오래된 오디오 뚜껑을 열고 나나 무수쿠리의 음반을 꺼낸다. “사랑의 기쁨”과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태양의 계절”을 듣고 있으면 흑발에 검은 테 안경을 낀 그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소나기가 지나간 8월의 저녁 한 때를 자신을 위해 시그널 뮤직으로 보낸다. 아날로그적이긴 해도 그런대로 즐길만하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살문 / 주인석  (0) 2023.06.26
팔월/서성남  (0) 2023.06.25
식은 죽/강표성  (0) 2023.06.24
푸른 텐트/정영숙  (0) 2023.06.24
섬/김희자  (0)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