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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서성남

에세이향기 2023. 6. 25. 07:26

팔월 

 

   

                                                                                                                                              서성남

 

 팔월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여느 달보다 더 많이 모습을 바꾼다.

 

 이른 새벽, 물꼬를 보러 들판으로 나가면 살갗에 닿는 공기가 신선하다. 새벽의 정령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른 해는 들판의 옅은 안개를 서서히 걷어낸다. 햇빛이 퍼져 가면 밤새 쉬었던 뭇 생명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지 사방은 왕성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햇볕은 점점 강렬해진다. 한낮이 되면 오만한 본색을 드러낸다. 기세등등하고 의기양양하다. 제왕처럼 행세한다. 개도, 사람도 그를 피한다. 풀은 몸을 비틀며 항복하고 나뭇잎은 생기를 잃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엎드리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않고 하루 내내 해바라기를 해야 한다. 반항은 용납되지 않는다. 공간을 채워버린 열기로 숨도 크게 쉴 수 없게 목을 죈다. 그는 폭군처럼 군림한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가린다. 낮게 드리운 검은 장막. 어둑해진 하늘에 번개가 친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섬광을 긋는다. 잠시 숨을 돌리는가 하면 이번에는 천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질 듯 한 굉음을 동반한다. 천둥은 공포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다 거부하고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려는 소리 같다. 인간은 보 잘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순간 무수히 빗금을 그으며 소나기가 달려온다. 피할 사이도 없다. 마당에는 금세 황토물이 차고, 다투어 왕관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말랐던 밭이랑에는 어느새 물이 흐르고 미꾸라지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이랑을 헤치며 다닌다. 삽시간에 불어난 산고랑 물은 고함치며 작은 돌들을 쓸어내린다. 울부짖는 짐승 같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해가 얼굴을 내민다. 햇살이 번지며 평화로워진다. 산과 들은 방금 목욕한 소녀처럼 깨끗하다. 몸을 비튼 풀잎도 생기를 되찾는다. 포효하고 소용돌이치듯 격정을 토해내고는 바로 시치미를 뗀다. 폭풍우 뒤의 평온, 모든 격정을 응축시켰다가 일시에 분출시킨 뒤의 안온함. 전원 교향곡 같다. 4악장 폭 풍우와 5악장 폭풍이 끝난 뒤의 기쁜 감정. 이어지는 악장이 날씨 그대로다.

 

 어쩌다 단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진다. 아낙네는 콩밭 매던 손을 멈추고 보리를 볶는다. 한 집에서 볶으면 고소한 냄새가 온 동네에 퍼 져 집집마다 볶게 된다. 남정네는 모처럼 한낮에 마루에 등을 대본다. 달콤한 망중한이다.

 

 밤하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달도 팔월이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덕석을 깔고 누우면 하늘을 총총히 메운 별들과 마주하게 된다. 마구 쏟아질 것만 같다. 똥바가지 모양의 북두칠성도 찾아보고 은하수도 본다. 유성이 선을 그으며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일까 생각이 따라간다. 어른들이 옛이야기라도 하시는 날이 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슬이 내려 몸이 촉촉해지며 차가워진다. 얼핏 잠이 들면 어머니는 나를 안아 마루에 누인다.

      

 햇볕과 소나기가 그러하듯 팔월은 대담하고 짜릿하며 솔직하다. 화려하기도 하다. 맞은편에 있는 이월과는 정 반대다. 있는 것을 다 드러낸다. 뒤에서 수군거리지도 않는다. 이월은 연약해 보이고 은밀하다. 단출하기도 하다. 곧 잎이나 꽃으로 틔울 눈을 몇 겹으로 싸서 감추고, 땅속에서는 바쁘게 물을 자아올린다. 이월이 내숭 떠는 처녀 같다면 팔월은 이파리 하나 감추지 않고 가진 걸 다 드러낸 채 몸값을 당당히 요구하는 밤거리 여인 같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겨울 바다가 차오르는 한을 억누르느라 신음하며 뒤척이는 것으로 절제한다면 팔월의 여름 바다는 관능적인 일렁임으로 한을 풀어내고 내 품 에 뛰어들라 유혹한다.

 

 열두 달 중 떠날 때를 가장 잘 아는 달이 팔월이지 싶다. 앞선 칠월은 여름이 계속되고 뒤에 오는 구월은 가을이 시작되는 달이니 떠난 게 아니다. 이월은 꽃샘추위로 뒤를 돌아보며 간다. 팔월은 미적대지 않고 간다. 중순이 지나면 햇볕과 바람에는 더운 기운이 옅어지고 하순이 되면 새벽녘 찬 기운에 벽장의 이불을 끄집어내야 한다. 왕성하던 매미 소리는 아침저녁으로 잦아들고 풀벌레가 대신하여 그 소리를 높여가다 차츰 비슷해지고는 이윽고 풀벌레 소리만 가득해진다. 어느새 하늘은 더 높고 푸르며 뭉게구름은 솜털 같다. 선선해진 바람, 이제 햇볕도 너그럽다. 아이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는 할머니 손길 같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는 벼가 팰 때의 비릿한 냄새 대신 익어 갈 때의 고소한 맛이 묻어난다. 격정을 쏟으며 포효하고 소나기를 퍼부으며 한바탕 천지를 뒤흔든 것은 결국 잉태해서 결실을 보기 위한 자연의 합방의식 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팔월처럼 해보고 싶은 일을 후련하게 하지 못했다. 젊었을 때도 늦은 게 아닌가 뒤돌아보며 쭈뼛거리기만 했다. 소나기처럼 퍼붓지도 못했고 햇볕처럼 뜨겁지도 못했으며 천둥처럼 부르짖지도 못했다. 어떤 일에서도 팔월처럼 모든 걸 쏟아붓지 못했다.

 

 천의 얼굴 팔월, 하루에도 온갖 변신을 하며 마음먹은 걸 죄다 해보고야 마는 달, 그러고는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달. 이런 팔월이 나는 부럽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팔월처럼 살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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