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살문 / 주인석
꽃이라고 해서 다 물만 먹고 피는 것은 아니다. 향이 특별히 좋거나 자태가 고운 꽃은 사람의 손에 보호를 받으며 물을 먹고 꽃을 피운다. 과잉보호 탓인지 그런 꽃은 곱게 피지만 길지 않은 시간에 떨어진다. 그러나 물 한 방울 먹지 않고도 천년을 하루 같이 피어 있는 꽃이 있다.
아무런 연유 없이 내가 절집을 찾을 때는 꽃살문을 보기 위함이다. 꽃의 성질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꽃이라며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것에서 나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가로 세로 대각선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태와 문틀을 벗어나지 않는 꽃살의 지조가 내 마음을 잡고도 남음이 있다.
꽃살문의 꽃은 오직 붓과 칼로만 피어난다. 얼마나 목말랐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애잔한 마음이 든다. 꽃잎에 나이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꽃살마다 나이테가 인고의 세월처럼 감춰져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었기에 물로는 피지 못하는 꽃이 되었을까.
꽃살문의 꽃은 두루뭉술하고 건조하며 딱딱하다. 그런데도 생화보다 더 끌릴 때가 있다. 투박한 나무에 새겨진 문양과 단청 때문일까. 원색으로 덮여진 꽃살의 속내가 세월에 바래 희끗희끗하다. 평생 꽃이 되고 싶어 절절했던 까닭으로 수세기가 지났으나 결코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문틀 안에서만 피는 꽃이라서 화려하지는 않아도 눈과 마음을 더 길게 잡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절집의 작은 연못 주위에는 소나무가 있다. 연못에는 수련이 해마다 참으로 곱게도 핀다. 한철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수련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온 폐부를 파고든다. 사시사철 연못 안에 그림자만 빠뜨리고 있는 소나무는 연못의 품에 안겨있는 수련이 밉고도 부러웠을 것이다. 곱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꼭 한 번은 수련이 되리라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했던가. 백년 넘은 소나무가 3년간 바람의 고행을 참아내고 일 년 넘게 살을 에는 아픔을 참아 꽃과 잎이 되어 색을 입고 문틀을 꿰차고 앉으니 꽃살문이 되었다. 인고의 세월이 피워낸 꽃이다. 빼어나게 아름다워야만 꽃이던가. 이 말은 먼 이모께 자주 들었던 말이다.
내가 본 이모는 평생을 소나무로 사셨다. 남편을 향한 그리움만 품고 그 곁을 서성대기만 했다. 잘난 남편을 둔 아내의 고통이라고 하기에는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아마도 이모의 가슴은 소나무 줄기보다 더 갈라 터졌을 것이다.
옛날에는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이루어진 혼사가 많았다고 한다. 이모의 혼인도 그러하지 않았을까싶다. 죽을 때까지 이모를 외면했다고 하니 마땅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모 남편은 수련 같은 여인들을 곧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계절이 꽃을 피우듯 아리따운 여인을 곁에 두고 살았다. 옷매무새도 단정하고 얼굴도 고운 여인들이었다. 머무는 시간이 비록 짧았을지라도 끊임없이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살았다.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여인들은 몇 달을 못 버티고는 떠나버렸다. 그럴 때마다 앓아누운 것은 이모 남편이었다. 이모는 그 곁을 소나무처럼 서서 질투와 외로움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린 내 눈에는 이모가 너무나 무섭게 생겼기 때문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얼굴 윤곽선이 울퉁불퉁했다. 얼핏 보면 세로 길이보다 가로길이가 더 긴 얼굴형이다. 그리고 눈은 얼굴 살에 묻혀 자세히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오는 날에는 코를 조심해야 했다. 입은 코보다 더 돌출했고 두꺼웠다. 피부색은 유달리 붉었고 체격이 좋아 걷는다기보다 구르는 형상이었다. 이러하니 처음 본 사람은 무서워 할만 했다.
이모가 무서웠던 것은 사실이다. 웃는 얼굴보다는 화났을 때가 많았고 나긋한 음성보다는 고성이 더 잦았다. 그것이 남편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일수록 남자는 더 어긋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고 사는 이모를 주변에서는 당당하고 절개가 굳은 사람이라며 칭찬했다.
이모가 아리따운 꽃은 아니지만 늦게 핀 꽃임은 틀림없다. 원색 옷을 좋아하던 이모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옷에 다는 브로치 하나에도 색을 맞추는 섬세함이 있고 덩치에 비해 소품을 좋아하는 아기자기함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혈기로 이모가 참아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꽃은 피우지 못했을지 모른다.
평생을 바친 꽃살문의 정성을 연못 속 수련의 한철 아름다움에 어찌 비길 수 있겠는가. 빛바랜 꽃살문 앞에서 이모의 이런저런 모습을 기억해 내며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법당 안에 주렁주렁 매달린 연꽃이 보인다. 꽃살이 문틀을 저리도 꽉 잡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괴로움이나 번뇌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참아내는 것인가 보다.
꽃이 꽃인 채로 사라지거나 나무나 나무인 채로 소멸되는 것보다 소생하는 삶이 값진 것이리라. 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긴 시간을 감내하듯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삭혀야 하리라. 꽃살문이 되기 위해 수백 년을 참고 꽃살문이 되어서도 천 년을 한 날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은 지금 삶이 전부다 아니기 때문이리라.
문틀 속에서만 피는 꽃은 모진 세월에 색이 바랠지라도 꺾이거나 꽃잎을 날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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