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테
조이섭
자형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잡은 손이 파르르 떨고 있다. 나를 지그시 건너다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처남, 인제 아파하지 않아도 되려나?”
김 노인은 먼저 간 큰아들의 딸아이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회색 잉크를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흐린 하늘이 을씨년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옆 강둑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다.
아들 대신 손녀를 신랑에게 넘겨주었다. 예식장 가운뎃길을 걸어가는 내내 오히려 신부가 팔짱을 끼고 곁부축하는 모양새였으나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실없이 밝은 조명 때문에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을 뿐이었다.
김 노인은 손녀의 결혼식이 덤덤하기만 했다. 작은 기쁨이 큰 불행의 척후병처럼 다가올까 두려웠다. 혼주석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호둣속 같았다.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구슬을 하나씩 넘겼다.
문득, 본당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기쁨의 합과 고통의 합은 똑같다고 했다. 기쁨이 크면 고통도 그만큼 크고, 고통이 작으면 기쁨도 작다는 강론이었다. 그동안 겪었던 고초보다 적지 않았을 기쁨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픔은 크게 오고 기쁨은 잘게 쪼개져 다가와 스치듯 지나쳤던 것일까. 기쁨의 날인지도 모르고 행복에 겨워할 새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연히 지나간 일상이 차라리 기쁨이었나.
사람 좋고 착하게만 살았던 김 노인에게 불행이 겹쳐 와서 켜켜이 쌓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두둑에 올라서면 곧바로 고랑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봉우리 언저리에 다다르기도 전에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릴 것 같아서 늘 불안했다. 안 좋은 예감은 어김없이 닥쳐왔고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스무 살에 결혼했던 동갑내기 아내가 오십 줄 초반에 갑자기 먼 길을 떠났다. 큰아들에게 간암이 왔다. 손녀가 제 아버지를 위해 간이식을 했으나 저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멀쩡하던 둘째 아들조차 역마살이 들었는지 밖으로 나돌다가 급기야 이혼까지 하고 말았다. 참한 아내와 생때같은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전국의 공사판을 전전하는 짓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장했던 큰 사위도 제 밥벌이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반거충이로만 살다가 일찌감치 큰 강을 건넜다. 큰딸이 자궁암, 작은딸이 유방암으로 수술하고 투병한 것은 숫제 사건 축에 끼지도 못했다.
김 노인은 그 많은 일이 모두 자기 탓인양 여겼다. 평생을 가슴 졸이고 애태우면서 안간힘을 다해 버티었다. 자식들은 김 노인의 온전한 그늘막이 되지 못했다. 다 익었다고 여겼던 열매마저 도사리가 되고 말았다.
물이나 눈이 얼어붙은 위에 다시 물이 흘러서 여러 겹으로 얼어붙은 얼음을 너테라고 한다. 강추위가 닥치면, 강물은 추위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밤에 살얼음부터 얼린다. 살얼음 위로 채 얼지 못한 덧물이 바람에 밀려 울컥울컥 올라온다. 덧물은 살그랑 쇠줄 긁는 소리를 내며 흐르다 힘이 다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는다. 뒤이어 고개 내민 물도 얼음 위를 미끄러지다가 갈비뼈처럼 가지런히 결빙한다. 싸락눈이라도 날리는 날이면 그 파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너테는 한겨울 강의 지붕골이 된다.
너테가 만든 단단한 지붕골은 고추바람에 맞서 싸운 흔적이다. 김 노인도 고난이 늘어나고 고통이 더할수록 강해졌다. 갈비뼈가 심장과 허파를 보호하듯 남은 자식과 손자들을 보듬고 껴안았다. 지붕골처럼 잘 버티고 있으면 손주들만이라도 끄떡없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만은 틀리지 않았다. 얼음이 얼고, 너테가 끼고, 눈이 쌓이는 현상現象은 그 아래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인 본질本質을 어쩌지 못했다. 동짓달 해거름 강물은 숨소리가 잦아들어 속으로만 흘렀다. 김 노인이 차가운 얼음 위에 엎드려 있는 동안에도 손주들은 제각기 제 분에 맞추어 자라고 있었다. 앙상한 노목에 애채※가 돋기 시작했다.
쌀쌀한 바람이 오랜만에 갖춰 입은 양복 깃을 파고든다. 청둥오리 두 마리가 부리를 마주치며 사랑놀이에 열중이다. 마른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예식장에서 환하게 웃던 신랑 신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먼저 간 아내, 큰아들과 맏사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손주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영글고 있는 것이 기껍다. 그러나 봄이 되어 얼음과 함께 녹아 사라진 너테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쿠, 신음을 뱉어내며 맨손으로 땅을 짚고 부스스 일어난다. 두 팔을 벌리고 크게 한 번 심호흡한다. 이제 다가올 겨울의 추위와 강물도 무섭지 않다. 어느새 붉게 물든 노을 한 자락이 강물 위에 나직나직 내려앉는다. 평생을 차가운 얼음 위에 엎드렸던 너테가 아름다운 윤슬이 되어 반짝인다.
이마에 깊게 팬 주름과 검실검실하게 변해버린 눈자위가 자형의 고단했던 날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파르르 떨고 있는 손을 힘주어 포개 잡는다.
“자형, 이제부터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 애채: 나무에 새로 돋은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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