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 덩어리
박희선
내 몸은 헐겁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어지럼병이 쉽게 들어 올 만큼 틈이 많다.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나를 사정없이 눕힌다. 한 해쯤은 건너뛰어도 섭섭하지 않을 일인데 벌써 삼 년이나 제집처럼 들락거린다. 천장이 빙그르르 돌면 모질게 내칠 수 없어 이석증, 너 왔구나 하고 반긴다. 다행히 죽을 만큼 아프지 않아 참을 만하다. 며칠이나 머물다 갈는지 하루가 아득해져 눈을 감는다.
우리 집 창문도 헐거워졌다. 나이를 먹어 자주 덜컹거린다. 내 몸은 병이 흔들고 창문은 주변 진동이 가만두지 않는다. 덕분에 누워 있어도 덜 심심하다. 문틈으로 찾아든 바람이 고요고요 소리를 내며 집안을 누빈다. 활기차게 움직일 때는 듣지 못하던 소리다. 나는 어지러움을 베개 삼아 바람의 고요를 무한정 받아들인다. 가만히 누워 고요바람에 휩싸이면 죽음에 대한 이해에 가까워진다. 피곤에 지쳐 누워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자연에 서서히 파묻혀 온몸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편안함을 맛보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한다. 눈만 크게 떠도 냉큼 자리 잡는 불청객을 밀어낼 수 없다. 배가 고프다. 뭉텅뭉텅 모인 허기가 구곡양장을 휘젓고 다닌다. 종일 누워 있어 기력이 소모될 일도 없는데 힘이 달린다. 부엌까지 갈일이 꿈만 같다. 어디쯤에 끓여놓은 죽이 있을 텐데, 난만한 생각만 오갈 뿐 몸은 방바닥에 착 달라붙는다. 더 이상 뱃속을 달랠 길이 없다. 최대한 앉은 키를 낮추어 보고 엎드려도 본다. 머리를 조금만 높여도 빙글빙글 돌아 다시 옆으로 눕고 말았다.
어둠이 몰아친다. 세상의 절반이 어둠인데 두려울 것 없다고 병을 달랜다.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지만 않으면 월요일 아침까지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휴일에 멋모르고 응급실을 찾았다가 검사비만 잔뜩 물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때 치른 팔십만 원이 지금도 아까워 그 병원 앞만 지나가면 속이 쓰리다. 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둠이나 불안도 너끈하게 잠재워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분에 심어둔 행복나무가 꺾여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싱싱했는데 언제 중병이 들었을까. 허리 중간이 뚝 잘려 마음만 떠다니는 내 신세와 같다. 따뜻한 실내가 아니면 살기 어렵다는 정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배밀이를 하듯 기어 올라가 꺾인 줄기를 손에 쥐었다. 추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단박에 잘린 흔적이 뚜렷하다. 벌레의 소행이다. 내 귓속에도 나를 꺾을 벌레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귓속이든 나무속이든 어떤 길을 통해 안방까지 왔는지, 둘은 꺾인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어지러운 것은 여전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두 끼를 굶었더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누워서 부엌까지 갈 수 없을까. 앉아서 엉덩이를 끌고 가거나 기어가는 것보다 머리를 더 낮출 수 있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배추벌레였다. 머리를 치켜들고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자 도르르 굴러 죽은 척했었지. 죽은 척하는 것, 몸을 작게 말아 움직여 보는 것, 하물며 사람인데 벌레보다 못하랴.
작년 가을 옥상 배추밭에서 벌레를 잡았다. 벌레는 눈에 띄지 않는데 동전크기 만한 구멍을 수도 없이 뚫어놓았다. 그러나 어디에 숨었는지 몇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잡힌 놈 중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탈출하는 놈이 있었다. 나선형의 몸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키만큼 쭉쭉 뻗어 나갔다. 기는 것이 아니라 누워서 달린다는 것이 알맞은 표현이다. 시속 삼십 킬로미터는 족히 되었으리라. 엉겁결에 잡으려고 뛰어갔지만 차마 밟지 못했다. 저리도 살려고 도망가는데, 어느 곳에 가든 잘살아보라는 생각에 미쳤다. 녀석은 기왓장 위에서 잠시 멈추더니 훌쩍 몸을 던졌다. 그 녀석이 안방까지 왔을까.
누워서 부엌에 가보기로 했다. 몸을 바닥에 최대한 붙여 벌레처럼 움츠렸다 폈다를 거듭했다. 벌레만큼 유연할 수는 없으나 생각보다 쉬웠다. 죽 반 그릇을 가볍게 먹고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토하지도 않는다. 이러다 내가 벌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좋았다. 죽 반 그릇이 눈을 환하게 하고 멈춘 우주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제 기운도 차렸겠다, 옆으로 그냥 누워 노닥거리면 시간은 흐를 것이다.
행복 나무의 꺾인 줄기와 함께 누웠다. 내가 그를 관찰하듯 그도 나를 탐색한다. 서로에게 아파서 누워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눈을 맞추었다. 손을 펼쳐보고 줄기를 바라보고 손도 줄기도 흔들어본다. 짙은 초록 잎은 속내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손등의 정맥은 푸른빛 나무줄기로 선명하다. 줄기를 따라가 본다. 다른 핏줄과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홀로 묵묵히 간다. 팔목을 지나 팔꿈치 어디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빛과 어둠이 나란히 있어야만 서로가 빛이 난다. 줄기에도 핏줄에도 생명을 입혀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한다.
눈을 감으면 제자리를 떠난 돌이 보인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병도 법칙에 순응하여 나를 찾아왔을까. 돌이 있던 자리는 황량한 벌판이며 깊은 블랙홀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것, 아무리 채우고 덜어내어도 어지러운 증세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육신을 떠난 영혼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잃은 돌은 내 삶만큼 찬란한 슬픔 덩어리다. 헐거워진 몸을 넉넉한 품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주 궤도를 벗어나 세월을 흔든다. 고통이 개개인의 사연을 안고 함께 가는 것 같지만 철저히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죽음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잘린 행복 나무는 꺾꽂이를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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