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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소춘(小春) / 김은주

에세이향기 2023. 6. 23. 02:41

소춘(小春) / 김은주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낀 볕 한 줌을 잡고 무를 썬다. 행여 짧은 해가 기울기라도 할까 봐 일하는 내내 조바심이 난다. 버릴까 생각하던 늙은 도마를 꺼내 좀 휘고 못생긴 무부터 자른다. 오랜 세월 칼맛을 본 도마는 깊게 살이 패여 둥근 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린다. 뭐 그러면 어떤가? 도마의 형편이 그러하다면 무가 도마의 비위를 맞추면 되지. 흔들흔들 무가 패인 도마 사이로 몸을 디밀고 안정감 있게 칼을 기다린다.
찹찹하니 물기 가득한 무는 무딘 칼날에도 스스럼없이 몸을 연다. 넉넉한 영양분을 받고 자란 매끈한 자태는 아니지만 휘고 구부러진 몸에 지난 계절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수북한 잔뿌리를 보니 돌봐 주지 않아 스스로 뻗어 나간 야생의 에너지가 거미줄처럼 엉켰다. 거친 뿌리는 비바람과 첫서리까지 계절을 이겨낸 질긴 생명력이다. 모양이 반듯한 것은 정과로 그렇지 않은 것은 말랭이로 장만한다. 딱 손가락 세 마디 길이로 무를 썬다. 넓게 보자기를 깔고 써는 족족 도마 밖으로 무를 밀어내며 다시 덩치 큰 무를 패인 도마 위에 얹는다.
무를 썰다 말고 감나무 할아버지 댁을 내다보니 벌써 붉은 감은 자취를 감추고 복숭아밭 아래 늙은 은행나무는 잎 다 떨어뜨리고 홀가분해졌다. 바야흐로 하늘의 기운도 땅으로 내려와 서로 마주보며 고요해지는 계절이다. 홍두깨 산 가을볕도 기운을 잃은 지 오래고 남은 볕마저도 코끝만큼 짧아진 터라 겨울 양식 장만에 하루해가 짧다.
음력 시월은 소춘小春, 가을과 겨울 틈에 낀 작은 봄이라 하지 않았던가? 금 쪽 보다 귀한 볕이 봄볕 못지않으니 그리 불렀을 터인데 그 귀한 볕을 어찌 허투루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살얼음이 얼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볕에 내다 말려야 할 음식이 줄을 섰다. 시래기 엮어 걸고, 무말랭이 썰고, 호박고지, 곶감, 끝물 풋고추까지 죄다 볕을 제대로 받아야 맛이 드는 겨울 음식이다.
밤이 긴 동지冬至로 갈수록 점점 일조량은 줄어들고 음의 기운이 강해진다. 이러니 겨울이 깊어 갈수록 볕에 곱게 말린 음식이 몸에 이로운 것은 정한 이치다. 짧아지는 해만큼 몸에 부족한 것은 볕이 듬뿍 든 음식으로 채워주고 가득 고여 넘치는 것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비워 낼 일이다.
무서리 내리기 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는 무다. 누가 가을무는 인삼에 버금간다고 말했던가? 사철 중 맛이 절정에 이르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땅에 온도가 점점 서늘해지며 여문 맛이라 육질이 단단하고 달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여름 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난다.
깜깜한 땅속에서 무던히 가을을 견딘 맛이니 어찌 만만하고 호락호락하겠는가? 어디 한군데 불쑥 도드라진 맛도 없고 그저 시원하고 음전한 맛이다. 결 따라 곱게 썰어 하얗게 나물을 볶아 놓으면 어느 맛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에 가깝다. 먹으면 찬 몸을 따뜻이 데워주고 무겁고 기름진 음식을 낱낱이 분해해 주니 무가 지닌 효소는 몸에 이로은 약藥이다. 날이 차면 움직임이 적고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으레 울체가 쌓인다. 쌓인 체기를 아래로 내려주고 막힌 기혈을 소통시켜주니 겨울 식재료로 이만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맑은 조청에 투명하게 익힌 무를 넣고 세월없이 조린다. 끓여 엿물이 스며드는 동안 해는 더 짧아졌다. 끓이고 식히며 닷새가 지난 뒤 제 몸에 수분은 거의 뱉어 내고 부드러운 단맛이 스며들면 볕에 널어 말린다. 더도 덜도 말고 휘어질 정도로만 말려 잣 하나 박아 돌돌 말아 두면 겨우내 따끈한 차와 합을 이루는 양식이 된다.
더운 차를 우려 무를 한 입 먹으니 입 안 가득 가을볕이 따사롭다. 캄캄한 흙 속을 비집고 내려간 흰 뿌리가 어둠과 빛을 한 몸에 담아 다시 잎사귀로 물을 길어 올린 사연을 밤이 새도록 듣는다. 그 속에 잠시 깃든 소춘小春이야기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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