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종자의 시간 / 조현숙

에세이향기 2023. 6. 29. 02:52

종자의 시간 / 조현숙

 
 
 

 

 

햇살이 하루를 깁고 있다. 분주한 도시에 너볏하게 들앉은 채종답採種畓은 묵묵히 써 내려간 붓을 거두고 빈 몸체이다. 논바닥을 훑던 까치들이 쌍쌍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떨어지고 다시 만난다. 퍼덕거리는 날개로 성급하게 봄을 부른다.

바람의 허밍에 햇살이 낮게 출렁인다. 질주하는 속도도, 번잡하게 엉키는 조음도 이곳에선 휴지와 묵언으로 스며든다. 때를 쫓아가는 것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동질의 빛과 시간 속에 있지만 같이 흐르지 않는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다. 볍씨의 시간은 더디고 질박해도 시절이 되면 기어이 제 빛깔의 문장을 보여준다.

늘 마음이 조급했다. 뭔가에 화가 나고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절박해도 열심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결과에 지쳤다. 꽉 막혀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가 가슴을 쪼개는 것 같았다. 숨통을 틔우려고 쏘다니다 만난 도시의 들판이 기묘했다. 넘치고 급하고 수선스러운 소용돌이 속에 고요하고 아늑한 시간이 차란차란 담겨있다. 이곳에 서면 바람은, 태양은, 흙내는 온통 날것으로 내 속을 휘돌아 훑었다. 그러면 나한테서도 새물내가 나는 것 같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걸음에도 참새떼가 화르르 날아오른다. 바람에 쓸리는 가랑잎 같다. 새들이 깃들였던 잡목 덤불이 마른 잎을 파들거린다. 성깔 있는 까치들은 가까이 갈 때까지 앙버티다가 마지못한 듯, 두 발로 콩콩, 조금씩 길을 비킨다. 흙구덩이에 고개를 박고 있던 비둘기들이 빛살을 안고 일제히 날아올라 건너편 논배미로 간다. 드문드문 서 있는 백로가 처연하다.

종자의 시간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날마다 떼 지어 모여드는 새들이 논바닥에 부리를 박고 땅을 흔들어 깨운다. 사시랑이 발로 흙을 차고 두드려 바람길을 낸다. 놀란 벌레들이 흙덩이로 숨어들며 포슬포슬 숨을 불어 넣는다. 논두렁에서 얻어가는 만큼 살아있는 흙으로 만들어 놓는다.

겨울 오후 4시의 해는 예각으로 빛살을 긋는다. 동지를 지나면서 조금씩 각의 크기를 늘려 한동안 가슴에서 만나던 햇살이 어깨로 쏟아진다. 벼그루터기를 안고 혼곤한 겨울잠에 취해 있는 흙덩이를 슬며시 지르밟아본다. 축축하고 흐벅지고 싱싱하게 흘러넘치던 땅은 그 몸에서 나고 거둔 것들을 내보내느라 지친 삭신을 뒤척인다. 퍼석거리면서도 푹신하다. 세상의 입들을 먹여 살리느라 조금씩 닳아지면서도 살아 있는 것들의 기운으로 따뜻하게 차오르고 다시 생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 도시의 논은 그 아래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뭇 생명의 씨앗들은 땅속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그렇게 기대하면서 지난겨울, 날마다 오후 4시를 이곳에서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신묘했다.

논바닥 엉그름처럼 쩍쩍 갈라진 내 목마름도 언젠가 이렇게 맹렬하게 피어날까?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던 논둑이 푸른 봄까치꽃으로 뒤덮였다. 노랗게 민들레가, 뽀얗게 냉이가 피어났다. 제비꽃이, 토끼풀이, 뽀리뱅이가 논틀길의 나를 비틀거리게 했고 흔전만전 퍼진 쑥은 주저 없이 주저앉게 했다.

환하면서도 어쩐지 슬프기도 한 봄이었다. 때때로 죽은 새의 깃털이 논두렁에 흩어져 있고 개똥이 뒹굴고 다리가 절단된 개구리의 사체가 말라갔다. 그런 날이면 까마귀가 낮게 날고 도마뱀이 튀어나올까 봐 장딴지가 땅겼다. 들짐승이 만든 크고 작은 구멍에도 햇살이 고이고 바람이 들락거렸다.

일꾼들은 논을 뒤집어 땅심을 채웠다. 햇빛이 널뛰는 못자리가 김 양식장처럼 검푸르게 반들거렸다. 사름이 시작되고 생생하게 초록을 세운 벼들은 백옥찰, 무복토, 다솜쌀, 일품 등의 머리말과 파종 5.16, 이앙 6.15 같은 숫자를 명찰로 달고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밤이면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양수기 물소리가 장단을 맞췄고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물꼬에 부스러기 그림자를 만들었다. 초승달이 반달로, 보름달로 익어갔다.

가을이 채 여물지 않은 어느 날, 군데군데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아이의 버짐 핀 머리통을 하고 있었다. 농사를 몰라도 수상쩍었다. 낫을 들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그걸 또 비밀이라며 입을 다무는 게 아닌가. 무안해진 내가, “혹시 젤 좋은 벼를 젤 먼저 골라서 높은 사람에게 갖다주려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품종별로 우량종자 상태를 살피기 위해 논배미마다 조금씩 먼저 수확하는 거란다. 가을이 되도록 여전히 빈손인 나는, 누구의 화급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게 안심이 되었다. 밥 먹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쌀을 수입하고 또 한쪽에서는 우수한 미질 개량을 위해 채종하고 보급하고 있다. 누구는 화급한 오늘을 살고 누구는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의 종자의 시간도 더디게 흐를 뿐, 시절이 되면 거두게 될 거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돌아섰다.

 

발밑에 쓰러졌던 잡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갈변한 초록을 굳게 보듬고 논두렁에 깊이 뿌리내린 채 강풍을 견디는 로제트 잎들이 둥글게 터를 넓히고 있다. 머지않아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고 대로가 생길 것이다. 그때도 이 땅은 수굿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가장 밑바닥에서 뿌리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도 논두렁 옆에서는 매연이 날리고 경적이 울리고 욕지거리가 들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올라간다. 그래도 땅은 잠잠이 늙고 낡아가며 세상을 기르고 배불리 먹일 궁리를 하고 있다.

싹둑싹둑 잘린 볏짚들이 논흙을 덮고 있다. 풀 내가 난다. 쇠죽 내 같기도 하다. 기억이 전해주는 냄새다. 길섶에 뒹구는 벼 이삭을 주워서 들여다보니 쭉정이다. 손톱으로 낟알을 까보려고 했던 적이 있다. 알갱이를 감싼 낟알의 투지가 내 손톱으로는 어림없었는데 용케도 새들의 입으로는 들어간 걸까. 혼자 뿌리 내리고 피어나고 영그는 수고로움에 깃든 외로움을 생각한다. 땅심이 해와 달빛과 비바람과 어우러져 우리의 밥심을 키워줬던 시간을 바라본다.

5시 반에 바투 선 겨울 해가 오늘의 마지막 빛을 뿌린다. 그 순정한 햇덩이에서 나오는 빛살은 한오라기 허투루 날리지 않고 뜨뜻하게 흙을 비춘다. 땅도 가슴을 열어 빛살을 남김없이 담는다. 이윽고 빛은 한순간, 툭 떨어져 땅에 잠긴다. 살아있는 것들이 부스럭거리는 곳으로.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저벅저벅 걸어와 이곳에서 다시 피어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이 장하다. 세상을 돌아오던 바람이 흙과 씨앗을 건들며 건네줬을 탄생과 소멸의 이야기, 푸르스름한 동살이 환하게 내려앉으며 보여주던 숨탄것들의 흔적과 서사, 흙빛을 객토하고 촘촘히 글씨를 뿌리던 시간, 연두의 밑그림에 초록을 더하고 볼품없는 꽃에 열매도 달아주면서 붓질은 더 누런빛으로 익어가는 한 생을 그렸다. 이제 논두렁은 통속의 하루를, 어제에 덧댄 오늘과 내일의 서사를, 발걸음을, 숨결을 품고 있다가 새봄이 부풀어 오르면 재채기처럼 터뜨릴 것이다.

내 키보다 더 기다란 접시꽃 대가 허공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다. 꽃과 이파리, 씨앗까지 다 떠나보내고 한 모라기 바람 따라 낭창거린다. 쓰러져 땅에 눕지 않고 그 뿌리에 봄을 보듬고 있다. 겹겹으로 껴입고도 추운 나는 접시꽃 마른 뼈에 코를 대고 내 영혼의 허기를 채운다. 조급증을 벗어던지면 저 먼 곳의 봄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0) 2023.07.02
자반고등어 / 조현숙  (0) 2023.06.29
막돌탑 / 박양근  (0) 2023.06.27
햇귀/박필우  (0) 2023.06.27
엄지발톱 / 박경혜  (0)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