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늦가을, 밤하늘을 본다. 듬성듬성 떠있는 별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지나간다. 별은 빛났으며 언어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별은 보는 자의 몫이었고, 언어는 쓰는 자의 몫이리라. 하늘에는 은하수가 존재하고 내가 사는 지구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미미하게 살아가는 나의 내면에는 언어의 세계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존재한다.
하늘의 은하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현실의 하늘에는 견우와 직녀별을 품고 있는 은하의 강이 말라 버린 것인지 빈 공간만 널찍이 펼쳐져 있다.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함 속에 나는 은하수를 찾고자 밤마다 하늘을 우러르며 혼자 서성인다. 도회지의 회색빛 하늘에서 보이는 별이야 몇 안 되겠지만 가깝게는 북두칠성의 국자이야기에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먼 미지의 세계에 있을 것만 같은 제우스,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를 품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이르기까지 나의 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렇게 무르 익어간다.
어렸을 적, 시골의 깜깜한 가을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들의 장관이었다. 빈틈없이 빼곡히 메운 이름 모를 별과 별을 맞닿아 함축과 의미의 선을 긋기도 하고, 별의 밝기와 크기, 느낌에 대해 중얼거리며 서정의 이야기를 독백처럼 쏟아내기도 했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풀어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비로소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수더분하고 가슴을 적시는 은하수 같은 수필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것이 내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로 연결된 것이다. 사람을 알기 이전에 작품으로 먼저 그분들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었다. 세상에 널브러진 사소한 것들과의 만남 속에 나는 너무도 자연스레 다리를 놓고, 수필이라는 거대한 은하별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숨 가쁘게 오고 간다.
나는 아직도 방황을 거듭하며 공허하기만한 문학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반짝이는 곳이 아닌 어둡고 습한, 허름하기까지 한 내 유년의 기억부터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난한 내면의 정서가 슬프도록 나를 중심이 아닌 변방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며, 습성이었던 것 같다.
가난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조금 더 가난해져 보자고 주머니의 재산들을 털어낸다. 차라리 글을 쓰는 동안은 배고프고 아픈 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지금도 다수의 관심 밖에 펼쳐진 공간들을 떠돈다. ‘삶’이라는 공통된 이야기에서 좀 더 세분화된 내 습성들이 구체적인 소재와 주제를 제시할 때 나의 수필들은 비로소 수정되곤 한다.
한편의 ‘수필’이 되기까지 오로지 나는 미쳐야만 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가난한 미치광이 수필가로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모태를 떠나올 때부터 내게 부여된 과제가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의 수필은 한순간도 편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관심을 두면 둘수록 뼈마디가 삭아 내리는 통증과 날밤을 세는 몰입의 광기가 퍼덕거린다. 수필 속에서의 과거는 철저히 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다. 과거에 머무는 동안 며칠을 끙끙대며 앓았고, 현재로 돌아와 ‘왜’라는 고통의 질문을 쏟아 놓으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으며, 미래로 나아가 기쁘게 화해하고 용서를 했다. 그렇게 한편의 수필마다 심한 몸살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앓고 난 후에 후련하게 작품을 써 나갔다. 수필은 이해와 용서의 거대한 은하였으며 치유의 세계였다.
나는 퇴고를 모르고 글을 쓴다. 초벌 없이 시작된 서두에서 나의 에너지는 절반이상 소진된다. 그만큼 엄청난 집중과 집착을 가지고 시작한다.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벗어내기가 시작될 때면 세포 하나하나를 태워내는 고비를 맞는다. 몇 번씩 ‘때려 치우겠다’ 마음을 먹지만 어느새 다시 수필 속으로 달려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사뭇 초연해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혼을 들추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러기에 마무리를 한 후에 한동안은 수필 멀미로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수필 공간에서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수필을 쓰는 동안에는 어떠한 것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문단속을 한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아이들, 가족들도, 동료들도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다. 수필 속에서 ‘나’는 다수의 배역을 가진 철저한 주인공이었으며 이야기 전개의 작가였으며, 문제와 답을 제시하는 출제자와 수험자, 채점자의 중요한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나’가 아닌 ‘네’가 개입된다는 것은 자칫 지나친 독자의식으로 연결되어 겉멋부리기식의 흐름을 쫓아가게 된다. 수필을 잡문으로 마무리 해 버리는 생뚱맞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대부분의 습작은 한 밤중에 이루어지곤 한다.
나의 발신메시지는 다수의 관계를 끌어들이는 공감대를 모른다. 내면의 습한 기억을 끌어내 최대한 상처를 느끼고, 치유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풀어낸다. 울지 않으면 누구를 울리지 못하리라. 나는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내 감정에 충실하였으며 정직하였기에 그러므로 철저하게 독자를 제외시키곤 했다. 독자를 의식할 때 나는 나의 진실을 가장하여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윤색하여 잘 쓰고 싶어 하는 인간적 먹구름이 끼곤 했기에 나는 철저히 독자를 잊고 글을 쓴다.
요즘은 더욱 바닥으로 나를 가라앉히는 연습을 한다. 높은 산을 정복했다고 언제까지나 정상에서 살 수는 없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상賞에 수필을 쓰는 초심을 잃고 싶지 않다. 간혹, 상을 받고 마치 신분 상승이라도 한 냥 고개 빳빳이 쳐들고 거만해져 있는 수필가들을 본다. 그럴 때면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겠노라 초심을 재차 다진다.
나는 귀소본능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 사소한 것들과의 눈 마주침을 잊지 않을 것이며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수필가가 되고자 한다. ‘나’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날, 그때 나는 정중히 ‘수필가’라는 수식어를 달고자 한다. 인간의 눈으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따뜻한 눈빛이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와 일맥상통하는 그런 수필을 쓰는 날까지 오래토록 작품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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