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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편지/장현심

에세이향기 2023. 7. 3. 04:01

   읽지 않은 편지

 

                                                                                                                                  장현심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됐다. 특수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재난 지역의 극한상황 속에서 본분을 지키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름대로 내 젊은 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당시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도 수동적이었다. 상대가, 마음의 키워드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해도 대답을 피하거나 감정을 눙치는 것이 예사였다. 나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사람들은 주인공 '유시진 대위'와 '의사 강모연'이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연애 세포를 깨운다고 아우성쳤지만 나는 조연 커플인 '서대영 상사' 와 '윤명주 중위'의 연애에 안달이 났다. '쓰리스타' 장군 아버지를 둔 여자군의관 윤 중위와 부사관인 서 상사라는 인물의 설정, 힘든 사랑을 그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연합군의 장기작전에 투입됐다가 전사한 서 상사가 유서로 남긴 편지를 읽ㄱ지 않는 윤 중위, 그 장면에서 나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이 뻑뻑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우린 화해도 못했어요. 떠날 때 나쁜 말만 했단 말예요."

 윤 중위의 말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그녀는 내가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서 상사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는 해피엔딩으로 드라마는 끝났지만 그 편지 생각이 나서 나는 재방을 보고 또 보았다.

 내게도 읽지 않은 편지 한 통이 있었다. 화해하지 못하고 영원히 보낸 사람이 있다.

 남편이 시작한 사업은 손봐야 할 곳이 많은 자동차 같았다. 매연과 소음이 심했고, 제동거리도 길었다. 정비를 하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번번이 내 의견을 무시하더니 결국 차는 진창길에 처박혀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고장 난 차처럼 진창길에 처박힌 건 내 인생이었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이사 간 셋집은 풍뎅이 등딱지만 해서 풀지 못한 짐 더미 사이에 이부자리를 펴야 했다. 그와는 자연스레 별거하게 되었다. 정만 있으면 삿갓 밑에서도 산다는데 방이 좁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멀어서였을 것이다.

 불생의 원인이 모두 그에게만 있는 것 같았다.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고 어쩌다 마주치면 베어버릴 듯 눈초리에 날을 세웠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자기 멋대로 집안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단단히 버릇을 들여야겠다는 각오 뿐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팽팽하게 평행선을 유지한 채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이 오간다는데 집안을 풍비박산 냈으면서 변명조차 없더니 달랑 편지 한 통이었다. 싫은 소리 듣더라도 남자답게 앞에 나서서 말을 할 일이지 편지 뒤에 숨다니, 천하에 없는 못난이 같았다. 내 위에 군림하려는 알량한 그의 자존심만 크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지극히 쉬운 말을 그는 하지 않았다. 나도 더는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편지를 뜯지도 않은 채 돌려보냈다. 그것도 등기로.

 2주 후, 전화 한 동 없던 그가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 구급차 안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어쩌면 그 편지에 미안하다는 말을 썼을 수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포부를 밝혔을 수도, 즐거웠던 기억을 들추며 조금만 참아 달라고 적었을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그를 땅에 묻고 난 뒤에서야 들었다. 편지로 우선 내 마음을 누그러뜨려 놓고 다시 잘해보자는 말을 하려는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후로 나는 상상력을 동원해 허구한 날 그가 썼을 편지를 썼다 지우곤 했다.

 우울한 날이면 편지를 돌려보낸 사실에 그가 충격을 받아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단 말을 못했지 싶기도 하였다. 말뚝도 무른 땅이어야 박힌다는데 땅벌처럼 독이 올라 있던 내게 말인들 붙일 수 있었을까. 얼마나 매정하다고 생각했을까.

 솔직히 그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건강했고, 성격 또한 누구와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진작 깨달았더라면 후회할 짓은 안 했을 것이다. 사과도, 용서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소용없다는 것을 그땐 미처 몰랐다.

 마음이 오가기를 바라서 다리를 놓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을 텐데 나는 그 징검다리를 없애버리고 말았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속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더라면 우리의 관계도 칼날 위를 걷듯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힘들어할 때 '안아줄까? 술 한잔할까? 물었어도 좋았을 테고, 늦게 들어온 날 밤에는 조용히 내 무릎을 내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너무 걱정 말아요.'

 처진 어깨 쓸어 주며 꽁냥꽁냥했더라면, 이렇듯 가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움 없는 고요는 마음이 평화라면 난 가끔 평화를 잃는다.

 그 편지가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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