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신발의 꿈 / 강연호

신발의 꿈 /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발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온 기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도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

좋은 시 2023.12.16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겨울산은 묵묵하고 담담하다. 골격을 드러낸 채 참선에 든 수묵담채화 속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뜨거운 숨을 내쉬다보면 마음도 시나브로 담백해진다. 산은 철마다 매력이 있지만, 삶의 장식을 하나씩 털어내는 인생의 가을이라서 그런지 이제는 겨울에 마음이 더 끌린다.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절, 산골에서는 산이 친구였다. 마음이 나만한 다람쥐와 도롱뇽에게 장난을 걸고, 진달래, 산딸기를 따먹고, 머루랑 다래랑 놀다보면 어느새 키가 한 뼘쯤 자랐다. 때가 묻지 않은 연둣빛 소년에게 나무는 두 가지 심상을 주었다. 햇살바람에 이파리를 팔랑이는 활엽수는 친근감이 들었고 하늘도 찌를 듯 뾰족한 침엽수는 경외감이 들었다. 산에서 꿈을 키운 소년은 청년이 되자 산골을 떠났다. 법관이 되기 ..

좋은 수필 2023.12.15

숫돌 / 도복희

숫돌 / 도복희 칼날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물을 적당히 축이고 일정한 리듬과 손목을 통해 가해지는 힘이 필요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과 몸이 섞이며 만들어 낸 날 선 눈빛으로 아침이 싹둑 잘려 나간다 잘려나간 아침들이 오래된 공복을 든든하게 채우리라 받아들일 때마다 얇아지는 살들의 쓰린 기억을 잊고 내 몸은 늘 똑같은 자세로 너를 향해 눕는다 닳고 닳는 것이 내 길이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면 내 전부를 내어주며 빛나는 너만을 지켜보겠다 날 선 날이 지나갈 때마다 온 몸으로 토해내는 소울음 노래로 들릴 때까지 나, 부동의 자세 바꾸지 않겠다 검은 눈물이 앞강을 채우고 움푹 패인 유방암 환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해도 네가 지나간 그 시간의 기억으로 즐겁게 우주를 떠다니고 싶다 바람이 되고 물이 ..

좋은 시 2023.12.13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 ​ 우포늪 둔치 만개한 저 여자 일생의 바닥 축축하다, 참고 견딘 오욕이 참 오래도록 삶을 삭혔겠다 스물여섯 신혼의 단꿈 채 익기도 전에 돈 벌어 오겠다며 집 나가 딴 살림 차린 사내 때문만은 아니리라 고딩잽이* 삼십 년 목숨이란 것도 늪 바닥만큼이나 시리고 깊은 것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 이제 대학교 졸업반 된 딸아이가 흰 날개를 저어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르기만 기다리는 저 여자, 설한雪寒의 바람 미쳐 날뛰어도 검은 잠수복을 입고 늪 가운데 서서 찬밥덩이 김치 몇 쪽으로 씹어 삼키며 너럭지** 가득 고딩이를 잡아 담았다지 어둠 밀려올 때서야 빙점의 물 헤치고 나오면 살 속 뼛속 서릿발 같은 통증이 우당탕탕 관절을 무너뜨려 한참이나 눈보라 속에 시커먼 죽음의 실타래를..

좋은 시 2023.12.12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3.12.12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 ​ 되돌려박기엔 너무 늦었지만 보트피풀처럼 막막한 날들을 노루발로 고정시키고 터져 나오려는 절규부터 박음질해 아버지 나라에서 온 한국인 사장이 재단한 하루를 쫓아 재봉틀을 돌리며 겉감에 안감 달고, 끝끝내 들키지 않는 한반도를 속감으로 솜뭉치 사이에 끼워 넣지 한국인 사장의 빈틈없는 눈길이 줄자처럼 치밀하게 내 움직임을 체크해도 골무처럼 단단히 오므린 채 사장의 매서운 가위질에도 상처 입지 않게 호지명루트처럼 바느질 선을 감춰 한국인 피가 섞였다고 말했을 때 한국인 사장은 잠시 들킨 것처럼 움찔하더니 38선보다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 실패에 감긴 시간은 쉽게 풀리지 않지만 빳빳하게 깃을 세우고 소매단을 달고 속주머니 깊숙이 끝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찔러 넣으면 폐기 처분..

좋은 시 2023.12.12

국수를 말다 / 최정란

국수를 말다 / 최정란 택배로 관棺 하나가 배달되었다. 삼 킬로그램의 진혼곡을 개봉한다. 잘 건조된 미라들, 종이 수의 안에 빼곡히 몸을 눕히고 있다. 손에 집히는 시신 몇 구 끓는 물 속에 던져넣는다. 수장이다. 물에서 났 으니 물로 돌아가라. 아득한 남해 바다 죽방렴의 기억이 은빛 지느 러미를 꿈틀거린다.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출렁거리는 삶 의 파도소리를 실토한다. 한참을 뼛속깊이 뜨거운 절망 속에서 펄펄 끓었을까. 한 방울의 비린 심연까지 다 쏟아내고 거품으로 끓어오르 는 주검을 건져낸다. 얼마나 오래 영혼을 우려내며 국수발처럼 살아 야 하나. 남의 생의 내력에 잔치국수를 만다. 멸치국물에 국수를 잘 말던 그를 우려낸 연못에 그 해 유달리 큰 연꽃이 피었다

좋은 시 2023.12.12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책상서랍을 정리하다보면 책상의 前生이 보인다 책상 표면에 매끄럽게 그려진 결마다 뿌리와 가지의 힘이 모여 있다 나이테로 몰려든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던 힘들이 물을 빨아올리던 뿌리의 힘들이 나무의 옹이를 향해 제 몸을 둥글게 구부려 단단한 우주를 만들고 있다 중력을 떨치며 태양을 향해 방사선으로 피어나던 잎들이 숲을 지탱하던 나무들이 결국은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밤마다 책상에서 뿌리들이 뻗어 나와 오래된 기억들을 점자책처럼 더듬어 읽어간다 책상모서리마다 나사못들이 단단하게 조여져 있다 맞닿은 곳마다 숲의 온기가 생생하다 내 방엔 결가부좌한 책상의 前生이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살고 있다 밤새 먼지 내려앉은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면 단단하게 조립된 생나무들의 숨결이 별에 닿고..

좋은 시 2023.12.12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마땅히 닦아내야 할 무엇도 없는데 닦고 계신다 어른들 말이 법인 줄 알고 사시던 꽃다운 시절부터 큰 상은 시부모와 남편, 작은 상은 시동생들 어머니의 밥상은 따로 두지 않았다 몸 쪼그리고 앉아 먹던 울음밥 부엌과 방 사이를 닳도록 드나들면서 짱짱했던 허리도 활처럼 휘었다 여든이 넘어서도 고향 집을 지키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생시에 심어놓은 나무만 꼿꼿하다 솥단지 같은 시절을 가족에게 다 퍼주고도 푸성귀 많은 밥상조차 호사스럽다고 눈물로 쓸고 닦고 지켜 오신 시골집 부엌 훌쩍 자란 나무가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아득히 온기 사라진 부뚜막 대처에 사는 자식들 기다리시는 어머니 밥상에는 태반이 그리움이다. 박일만 시집 『살어리랏다』 -달아실출판사 -중에서 - 부뚜막, 참 정..

좋은 시 2023.12.11

배추를 묶으며/박일만

배추를 묶으며 -육십령 44 박일만 가을이 밭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조각 볕을 쬐는 날 널브러진 팔을 가지런히 묶어준다 맨 바깥 잎은 엄마, 아빠의 팔 안쪽 몇 잎은 언니, 오빠의 팔 그 안쪽은 셋째, 넷째의 팔 식구들이 팔을 들어 겹겹이 감싸주자 막내가 포대기에 싸인 듯 중심에서 웃는다 따뜻한 표정, 막내는 이제 속이 꽉 차도록 자랄 것이다 찬바람 막아주고, 서릿발 대신 맞고 방패막이가 된 넓적한 팔들 양팔을 서로 겯고 체온을 모으는 혈족들 한 울타리 속에서 온 가족이 밥 먹고 사는 중이다 찬 기운 스며드는 땅속에 기둥 박고 팔이란 팔 죄다 벌리고 있던 배추 한 포기 가슴께를 단정히 매주자 신공법으로 지은 잘 생긴 집 같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나 홀로 밥 먹고 나 홀로 술 마시고..

좋은 시 2023.12.11

텃밭 / 김선녀

텃밭 / 김선녀 비가 내린다. 테라스 바닥에 빗방울이 피우는 찰나의 꽃들을 본다. 피는 순간 져버리는 꽃이 촘촘하다. 고요한 새벽에 소리로 내리는 꽃을 보며 울컥한다. 비 오는 새벽은 맑은 공기 같으면서도 어둠에 갇힌 숨 같다. 창가에 놓인 전동침대 위 엄마 숨소리 같기도 하다. 하도 조용해서 내 몸도 새벽이 된 것 같은.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공책에 소리를 담고 꽃을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그런 새벽과 마주하고 있다. 테라스 앞 작은 텃밭은 엄마의 삶이었다.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 풍경화를 그렸다. 겨울 끝으로 추위가 몸을 털기 시작하면 흙을 토닥여 땅을 깨우고 봄 향기를 입혔다. 깊이를 더듬고 뒤집은 땅에 햇살이 고루 들면 심심한 밭에 거름을 부렸다. 고향의 냄새인 듯 아닌 듯 썩..

좋은 수필 2023.12.10

단나/박순태

단나/박순태 육면체의 근원은 점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을 채워주는 물체가 된다. 입체의 출발은 미미한 점이었으나 결과는 삼차원 예술품이 되었다. 작은 것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후에는 당초 예상할 수 없었던 큰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 삶의 삼차원 예술인 단나도 초배기라는 옛날 도시락이 근원이다. 단나는 남을 사랑하여 나눈다는 뜻이다. 이 일은 이순을 코앞에 둔 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초배기를 만난 것은 포항의 '덕동마을 민속 박물관' 이다. 그곳에는 항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옛날 물건이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정감이 가는 물건에서부터 아주 생소한 물건까지 진열 되어 있다. 그때 내 눈을 잡은 것은 옛날 도시락, 초배기다. 유리관을 통과한 내 마음이 허기..

좋은 수필 2023.12.03

빗/조문자

빗/조문자 머리를 빗질하는 시간은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빗은 여인의 모습을 더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머리를 빗질하면서 삶의 궤적과 사랑의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은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을 빗어내는 조그만 현악기처럼 보인다. 빗을 샀다. 화장대 한쪽에 딱히 이유도 없이 사들인 빗들이 풀꽃처럼 빽빽이 통에 꽂혀 있다. 빗살이 논의 벼 포기처럼 촘촘히 붙어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빗은 각 시대 생활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다. 최근에 와서 인체 공학과 재료 공학의 발달은 빗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피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넓적한 쿠션 빗을 비롯하여 생머리 구부리는 드라이용, 긴 머리 다듬는 일자형 빗, 짧은 머리에 꼬리 빗, 웨이브를 살려주는 도끼 빗까지 색상..

좋은 수필 2023.12.03

사마귀/조미정

사마귀/조미정 눅진한 이불솜을 널어놓은 창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비집고 들이치던 오후이다. 열어놓은 창으로 사마귀 한 마리가 들어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지레 겁을 먹고 긴 막대로 허공을 툭툭 쳐 조용하던 일상을 흔들어 놓은 건 아마도 내가 먼저였을 것이다. 못마땅한 듯 사마귀가 지그시 나를 노려본다. 배가 납작한 수컷이다. 언젠가 다큐에서 사마귀의 교미 장면을 보았다. 열 시간이나 계속되는 짝짓기 동안 배고픔을 참지 못한 암컷이 수사마귀의 머리를 뜯어 먹고 있었다. 몸의 절반이 사라졌는데도 짝짓기의 행위를 멈추지 않을 정도로 수사마귀는 집요했다. 자기의 영역 안에서 평생 혼자 살아가는 사마귀는 교미를 할 때만 페로몬을 방출하여 수컷을 유인한다. 그 유혹은 치명적이지만 수사마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숙..

좋은 수필 2023.12.03

머리카락/정성희

머리카락 / 정성희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 다음에는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지는 컴컴한 심연 속..

좋은 수필 2023.12.03

못 / 배단영

못 / 배단영 못을 뺀다. 낡은 벽장을 수리하기 위해 못 머리에 장도리를 끼우고 낑낑거리며 못을 뽑았다. 못은 야무진 벽을 뚫고 들어가 긴 세월 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제 크기의 수십 배, 수백 배도 더 되는 무게를 견디느라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무엇을 얹거나 걸면 못은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억지로 끌려나온 못이 허리 굽은 아버지를 닮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는 해가 뉘엿할 때 들판으로 논물을 보러가셨다. 아침저녁으로 들판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벼들의 성장이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버지의 다리가 허방을 짚는듯하더니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좁은 논둑은 아버지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흙을 밀어내며 내려앉았고 그 바람에 논바닥으로..

좋은 수필 2023.12.01

적막이 오는 순서

적막이 오는 순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16〉 적막이 오는 순서 조승래(1959∼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조승래(1959∼ ) 여름은 격렬하다. 그것은 타는 듯한 열기와 소란스러운 매미 소리와 장맛비 같은 것으로 온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여름은 부담스럽다. 사는 일 자체도 경쟁으로 달아오르는데 거기에 여름의 열기까지 보태자니, 청춘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쳐 갈 무렵 여름의 격렬함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그 사라진 빈자리로 가을은 온다. 그러니까 가을은 지우..

좋은 시 2023.12.01

나무 한 그루 / 정문숙

나무 한 그루 / 정문숙 동 트기 전, 희붐한 거리의 풍경은 운치를 더하고 수시로 정체되는 도심의 길에 익숙하던 네 바퀴도 간만에 신바람으로 속도를 높인다. 근래에 남편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지 싶다. 집을 나서며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으로 충만해진다. 한때 우리는 달랑 지도만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한 숲을 찾아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는 말이 없어도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유난을 떠는 잉꼬부부라고 지인들의 눈총 아닌 눈총도 꽤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그럴 여유를 잃어버렸다. 부부 사이도 건조해져 아이들이 매개체가 되는 대화만 오고갔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떠난 후 둘만 남겨진 우리는 부부라는 오래된 이름으로도 ..

좋은 수필 2023.11.29

옹이, 그 아픔을 읽다/허석

옹이, 그 아픔을 읽다 허석 한옥이 멋스러운 전통찻집에 갔다. 방으로 안내되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다탁이 원목이었다. 넓고 묵직해 보이는 탁자 면에 물결치듯 부드럽게 뻗어나간 목리가 나무의 성정처럼 기품있고 웅숭깊다. 그런데 가장자리 쪽에 갑자기 회오리치듯 시커먼 옹이 무늬가 드러나고 표면이 우둘투둘 파인 곳이 있었다. 설핏, 옥에 티처럼 느껴졌다. 그때 ‘결만 있으면 상품인데 옹이가 있어서 작품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을 바꾸니 옹이로 인해 생긴 기하학적인, 비정형적인 나뭇결이 오히려 신선한 자연미로 다가왔다. 옹이는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이다. 나무는 자라면서 곁가지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무가 지속적인 부피 생장을 하면서 함께 자란 곁가지도 심지를 박고 파묻혀 자라게 ..

좋은 수필 2023.11.29

주춧돌과 기둥 / 변해명

주춧돌과 기둥 / 변해명 뒷산에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시인의 시 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맴돈다. 나는 눈먼 처녀처럼 눈을 감고 꾀꼬리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시인에 대한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 고비를 청노루 맑은 눈으로 바라보시던 시인의 맑은 영혼이 그리운 하루다. 우리 집은 숲과 닿아 있다. 뻐꾸기, 꾀꼬리가 울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아름다운 숲과 함께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김동리 선생의 수필 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숲은 동양인에게 성격이 다른 신神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목이 없는 세상은 아..

좋은 수필 20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