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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봄이 아니다/이복희

에세이향기 2023. 3. 27. 04:11

3월은 봄이 아니다/이복희

 3월은 언제나 몸살처럼 왔다. 한겨울의 추위에 갇혀있던 몸이 해빙기의 지표면처럼 풀어지고 있는 걸까. 실제로 겨울을 잘 넘겨놓고 감기몸살에 시달리곤 하는 것도 다 3월의 일이었다. 성급하게 봄을 기대한 탓인지 추위도 한겨울보다 오히려 심하게 느껴졌다. 3월의 한기는 어디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움처럼 대책이 없다. 오래 앓던 이들이 숨을 놓아버렸다는 소식도 3월에 자주 들려왔다.
 그해 3월의 어느 날, 별 이유 없이 한복을 입어 보았다. 집에 있는 자투리 천을 이용해 언니가 만든 것이었다. 감색 바탕에 자잘하게 그려진 하얀 꽃송이들이 봄, 봄하며 어서 입어보라고 소는 대는 것 같았다. 꽃샘추위 속에 포근해진 날씨도 한몫 거들었다.
 "이쁘네, 우리 딸, 한복 입으니​…."
 수선 떠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엄마의 말씨는 여전히 어눌하면서도 별스럽게 다정했다. 건강할 때도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법은 자유방임이었고 유난스러운 애정표현도 없었다. 그날따라 그 한 마디는 깊은 한숨처럼 곡진했다.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몇 년째 누워만 계시면서도 오히려 아기처럼 무구해 보여 엄마로서의 넓은 자락을 거둔지 오래였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문득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절을 했다. 둥실하게 퍼진 치맛자락에 싸여 잠시 조신한 꿈도 꾸었다. 스물 셋은 엄마가 시집온 나이였다. 엄마는 한복을 입은 그 나이의 딸을 보며 가물가물한 그날의 일을 떠올리셨을까.
 다음날 아침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병세가 늘 그만 하기에 그렇게라도 우리 곁에 오래 계실 줄 알았다. 가파르게 몰아쉬던 숨이 얼마 후 거짓말처럼 조용히 멈췄다.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속설을 그때 내가 알고 있었던가, 아니면 나중에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뜬금없는 큰절이 엄마를 돌아가시게 한 것 같아 몹시 마음이 아팠다. 무슨 예감처럼 마지막 인사를 드린 셈이 되고 말았으니​…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프다는 표현을 실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괴롭게 몰아쉬던 숨이 멈추고 일순 찾아온 적막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아주 평온하고 놀랄 만큼 깨끗했다. 어쩐 일인지 신산스럽던 주름살도 다 펴져서 오히려 생시보다 고왔다.
 원래 소녀처럼 잘 웃던 분이지만 만년의 엄마는 늘 어두웠다. 그처럼 편안하고 환한 모습이 낯설기까지 했다. 어쩌면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 내려놓았더니 참 편하다'
  너무도 단정한 엄마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음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가족들의 지극한 애통함은 모르는 척, 눈을 꾹 감고 아랑곳하지 않는 품이 무심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당신의 한도, 남은 자들의 슬픔도 이제는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엄마가 영영 집을 떠나시던 날은 쌀쌀한 날씨에 간간이 눈발까지 날리고 있었다. 지금은 자취도 없는 홍제동 화장장엔 아직 회색빛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화구에 달린 작은 유리문 너머로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한 생명과 거기에 깃든 생애 전부를 무화시켜버리겠다는 듯 무섭도록 하얀 불길이었다. 그 순간 내 몸과 마음도 녹아내리며 한 줄기 진액이 되어버린​ 듯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 채 저녁이 왔다. 엄마의 빈 자리는 곧 남은 사람들의 일상에 가려졌다. 친척들이 식사 준비를 하는데 생각지도 않던 허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뜻밖에 입맛이 달았따.
 문득 누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촌오빠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지금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상주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뒤이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화장장에서 진액처럼 쏟아내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대다니. 민망하다 못해 내 존재 자체가 이물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빠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싶은 걱정은 오히려 뒷전이었다. 순간 너무도 다른 내 모습이 어찌나 낯설던지 참기 힘든 멀미처럼 혐오감이 울컥 올라왔다.
 스물 셋, 젊음 탓이라 해도 말이 안 되었다. 엄마의 긴 와병이라든가 극심한 상실감을 붙여 봐도,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길은 없었다. 다만, 그때 잠시 현실을 감감이 잊고 있지 않았나 싶은 어렴풋한 느낌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러다가도 부끄러움을 밀치고 꼭 하나의 변명이 슬그머니 똬리를 풀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는 생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일이었다고,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길,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자는 이미 뻔뻔해져 있을 뿐이라고​…
 가끔 문상을 간다. 하얀 국화꽃에 쌓인 고인의 얼굴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나면 사람들은 곧장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은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방금 다녀온 빈소의 짓눌린 정적과 향냄새에 섞여 떠도는 슬픔의 기운은 그릇 부딪는 소리와 음식 냄새로 그만 희석되어버린다. ​
 그런 시간이면 나는 오래된 내 부끄러움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샴쌍둥이 같은 것이다. 엄마를 그렇게 보내고 생애 처음으로 느꼈던 절절한 슬픔도, 정체모를 식욕도 알고 보면 한 통속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며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겨울의 심술과 봄의 머뭇거림이 자리다툼을 하는 3월은 언제나 불온하다. 3월은 내게 봄이 아니다. 피어나는 꽃을 두고, 한 생에 져버린 그 3월은 봄이 아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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