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바람의 목소리/마경덕

에세이향기 2023. 12. 22. 09:09

바람의 목소리

 

마경덕

 

작업실 이층 추녀 끝에서 풍경이 운다. 잠잠하던 풍경 하나가 입을 열고 있다. 바람의 크기에 따라 풍경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은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건너오다가 이내 흩어져버린다. 바람이 센 날은 요란해서 별로 감흥이 없다. 자발맞게 몸을 흔드는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한다. 그저 곁을 스치듯 슬쩍슬쩍 등을 미는 정도가 좋다. 고요가 몸을 여는 소리, 침묵이 아람처럼 벌어지는 소리, 허공의 징검돌을 밟고 조심조심 건너오는 소리는 귓맛이 있어 깊이 스민다.

무언가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그 애련하고 가녀린 소리는 길가 냉이꽃의 목을 흔들던 한 줄기 바람이거나 풀잎을 어루만지던 바람일 것이다.

아마도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을 것이다. 허공의 오솔길을 걸어 내게로 올 때 숲의 냄새가 난다. 오직 무언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은 저 풍경을 흔들어보기 위해 먼길을 달려왔을 것이다. 모빌에 걸린 장난감을 만지듯 조물락거리는 바람의 손을 상상한다.

바람은 그곳에 매달린 작은 풍경 하나와 오래전부터 낯을 튼 사이이다. 쇠종에 매달린 그 놋쇠물고기는 바람이 올 때마다 메마른 허공이 바다인 듯 헤엄을 친다. 평생을 휘저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늙어가는 풍경은 바다를 알고 있을까. 오직 바람만이 물고기를 깨어나게 하는 시간이다. 출렁출렁 바람 파도에 온몸을 맡긴 풍경 소리는 바람의 목소리일까, 물고기의 목소리일까.

풍경이 머금었다 내뱉는 여음(餘音)은 마당을 건너 내 마음에 물무늬를 그리며 번져간다. 소리의 파문이 어디쯤에서 꼬리를 남기며 사라질 즈음, 왠지 애틋해진다. 그 소리는 마치 전날밤 상엿집에 모여앉아 청년들이 부르던 만가를 떠오르게 한다.

 

그 소리는, 이슥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와 밤바다를 철썩이며 선잠을 흔들던 청승맞은 그 기운은

언젠가 밤길에서 만난 혼불처럼 어둠의 틈새로 사라지고

 

어느 순간 소리에 꼬리가 돋아 그 꼬리를 붙잡고 가늘게 명줄을 이어 갔다

 

주거니 받거니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다리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젖은 곡조여서 사무치고 사무치는 것이었다

 

누구일까

폐병쟁이 황 씨, 노름쟁이 곰보 천 씨,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도 그 길을 따라갔는데

 

또 누구일까

 

날이 밝으면

집 앞을 지나가던 꽃상여와 꽃잎처럼 붉은 울음과 노잣돈 없어 못 간다는 요령 소리가 귓전에 매달려

 

어린것이,

세상을 다 살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찔찔 흘리던 밤이 있었다

― 「만가(輓歌)」 전문

상여꾼이 부르던 그 만가는 꺼진 불씨가 살아나듯 다시 바람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가슴을 적시고 내 선잠을 흔들었다. 자욱하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두 다리를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서러운 곡조여서 어린 가슴에 사무치곤 하였다.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우리집 앞을 지나갈 꽃상여의 주인이 궁금했다. 상여 맨 앞에 올라탄 요령잡이의 요령소리와 행상소리에 맞춰 상여는 멈추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였다. 노잣돈이 없어 못 간다는 요령잡이 영감의 구슬픈 능청에 뒤따르던 상주들의 곡소리는 절정에 달하고 쌈짓돈까지 꺼내 상여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동네 사내아이들은 잔칫집에 온 듯 흥겨운 얼굴로 만장을 붙잡고 상여를 뒤따라 가곤 했다. 죽은 이를 기리며 쓴 글을 비단에 적은 것이 만장인데 한문으로 쓰여있어서 어린 나는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만장의 수를 헤아려 그 집의 가세(家勢)를 짐작했는데 살림이 넉넉한 집들은 만장 수를 늘려 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일찍 바다에 가족을 잃은 아낙네들은 초상집에 몰려들어 자신의 기구한 슬픔을 꺼내 제 설움에 울고 또 울었다. 곡소리가 그치지 않는 초상집은 사나흘 잔칫집처럼 흥청거렸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돼지를 잡고 떡을 치고 전을 부쳐서 푸짐하게 이웃과 나누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며 문상객들은 함께 밤을 지켜주었다. 사돈에 팔촌까지 몰려들어 분주한 손님맞이에 상주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고인 한 사람을 위해 동네가 함께 치르는 잔치 아닌 잔치였다. 다른 동네에서 각설이들이 몰려와도 박대하지 않고 푸짐히 상을 차려주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이처럼 좋은 기회는 없었다.

이제는 장례문화도 바뀌어서 동네 어른이 맡았던 염습은 장례지도사가 해결하고 상여는 검은 리무진이 대신한다. 노란 봉투에 담아 문앞에 꽂아두고 가던 부고장도 문자메시지로 날아온다. 간소화가 되어서 편리한 점도 있지만 왠지 서운한 점도 없지 않다. 그리운 옛것들은 점점 빛이 바래 잊히고 있다.

 

건들거리는 바람이 추녀 끝 물고기와 속엣말을 나누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중일까. 바람의 목소리가 다정하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푸른 바다를 들려주고 있을까. 작은 물고기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치며 짤랑거린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징어 / 정해경  (1) 2023.12.27
비굴한 굴비 / 공순해  (1) 2023.12.27
마루의 품 / 허정진  (0) 2023.12.19
김장 버티기 / 은유  (1) 2023.12.17
겨의 노래/김선주  (1) 202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