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를 위하여 / 공순해
아침부터 집안에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냇손자 때문이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캠핑을 겸해 갖는 슬립 오버 생일잔치에 간다. 이제 여섯 살 된 본인은 멋모르고 가겠지만 가족에겐 낯선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몇 아이를 이렇게 치렀으나 처음 보내는 그때마다 낯선 긴장감은 가시질 않는다.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 아련한 심정으로 즐거워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즐겁고 흥분된 감정 외에는 집 떠나는 서운함 또는 두려움 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른들만 대책 없이 긴장했을 뿐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 선생님이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미리 안녕을 고하고 전화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음성은 갈라져 지치고 피곤하게 들렸다. 월말 목요글방이 언제지요? 이번엔 참석 못 할 듯합니다. 시카고에 갈 일이 생겼어요. 시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니 가뵈어야 해서요. 참석 못 해 미안하다는 인사 여러분께 전해주세요.
참으로 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주 전 부산에서 돌아왔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목까지 잠겼는데, 이번엔 시카고행이라…. 그가 한국에 갔었던 이유는 친정아버지가 위독하시단 전갈을 받아서였다. 그러나 두 달여 소일 했음에도 아버지 증세는 똑같아 하는 수없이 그냥 돌아온 참이다. 한데 이번엔 시어머님이라니. 안팎으로 고단한 그 심정을 헤아려 잘 다녀오라는 인사로 통화를 마쳤다.
그에게도 삶의 기둥이 여기저기서 부러지는 시기가 닥쳤구나. 나도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 그랬지. 시아버님이야 결혼 전에 돌아가셨다. 시어머님은 7년 병 수발 뒤에 돌아가셨다. 언어 기능을 잃고 본능에만 충실하셨던 분이었다. 하기에 그분이 내게 의지하고 사셨다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보니 집안이 빈 집 같았다. 세상이, 인생이 그냥 가설무대 같기만 했다. 누가 누굴 의지하고 살았던 건지. 친정 쪽에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 그 5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부음을 듣던 날, 전화기를 내려놓는 내 손은 맥이 있는 대로 풀려 있었다. 가슴을 훑으며 날카롭게 내리꽂히던 슬픔, 아! 이젠 진짜 고아가 됐구나. 웅크린 태아처럼 컴컴한 우주 속을 홀로 유영하는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한데 지금은 매미 껍질 벗는 광경이 떠오른다. 첫아이 낳았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다. 여자가 애를 낳는다는 건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과 같은 거야. 딱 부러지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혼자 푸듯이 뇌며 누워 있는 내 이마를 쓸어주셨다. 같은 혼잣말을 여러 번 하시던 어머니는 살짝 쓸쓸해 보였다. 이제 너도 어미로서 살아야 할 날이 온 거다, 그 어려운 길을 짐작이나 하겠니, 그런 눈빛이셨다. 그 길을 가야 할 딸, 비로소 동지(?)가 된 딸의 처지가 안쓰러우신 거였을까.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딸에게 매미가 허물을 벗듯 했다고 하셨지만 지금의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므로 해서 껍질 벗은 느낌이 든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농담으로 애 엄마를 찾으며 아이들에게 네 껍데기 어디 갔니 하듯 모든 자식에겐 부모가 껍질이다. 해서 부모는 자식을 낳으므로 껍질을 벗지만, 자식은 부모를 여의므로 껍질을 벗는다.
관찰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매미가 껍질을 벗고 성충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선 온 밤이 걸린다고 한다. 나무의 적당한 자리를 골라 밤이 이슥해지면 비로소 등을 여는데 한꺼번에 벗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공기의 흐름을 익히며 여린 살갗이 적응하도록 서서히 밖으로 몸을 빼낸단다. 그런 뒤에도 꼼짝 안 하고 주변 동화를 거쳐, 새벽이 되어야 마침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몇 년을 땅속에서 애벌레로 적자생존을 거친 뒤 드디어 지상에 도착한 그 성충이 우화를 이루어 허공으로 날아오른 뒤 누리는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이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성장을 거쳐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연로한 부모가 마른 꽃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새로 태어난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이 모든 연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섭리다. 한 달 남짓 누리는 지상의 시간을 위해 땅 밑에서 다섯 번 껍질을 벗어야 성충이 된다는 매미의 삶에 비해 인간의 삶은 몇 번 껍질을 벗어야 성충이 되는 걸까. 죽음이란 날개를 고 날아오르는 순간이 완전한 성충을 이루는 찰나가 아닐지.
저녁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자리가 빠진 게 영 허전하다. 큰 애 둘이 앞에 앉았는데도 빈집 같아요. 애 어미 말에 애를 데려다주고 온 애비는 한술 더 뜬다. 생소하다고 밤에 자다 오줌을 지리면 어떡하지. 잠 못 자고 자꾸 깨서 우는 건 아닐까. 문득 오늘 일을 적어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너희가 또 허물벗는 날이구나. 나도 애비, 널 처음 캠핑 보냈을 때 그렇게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애가 닳았다. 바로 막내 요맘때였지. 하지만 이 말은 삼키고 대신, 그럼 우리 애 찾으러 갈까, 했더니 위의 두 녀석까지 다들 웃고 만다. 또 한차례의 탈각(脫殼)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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