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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에세이향기 2024. 6. 19. 09:53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그녀에게서는 결국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역시 약속 날짜를 잊은 것일까. 휴대폰을 힘주어 눌러본다. 부재중이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사무적인 자동 응답 장치로 돌아간다. 호출도 해보고 문자 메시지도 보내본다. 영영 무반응이었다. 맹랑한 그녀, 두 번씩이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십여 년 정든 곳에서 살다 고향으로 이사를 했을 때 타향보다 더욱 낯설어 있었다. 외로움에 적당히 지쳐있을 무렵 한 친구를 만났고 ,한동네에 산다는 그녀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둘보다 셋이 더 좋을 것 같았다. 트라이앵글처럼 다채로운 화음을 경험할 것 같은 설렘도 있었다.

    친구의 친구인 M은 활발한 여인이었다. 상큼한 단발머리에 캐주얼 차림이 어울리는 그녀, 스카프 한 장으로 멋을 낼 줄 아는 센스도 갖고 있었다. 애교가 많은 그녀는 낯가림이 심한 내게 쉽사리 거리감을 걷어냈다. 나와 친구인 K는 무덤덤한 성격이었다. 둘 중 누군가 쉽게 자리를 펼 줄 몰랐으며 인연이 되면 반갑고 헤어지면 그뿐이었다. 어찌하다 어렵게 다시 만나면 몇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여성적인 M이 나타나자 우리의 건조한 만남은 윤기가 흘렸다.

    어느 날 M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그날은 자연스레 첫 모임이 되었고 그녀들과 있는대로 분위기를 잡으며 호젓한 경양식집에서 찬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이젠 가정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회비를 비축하여 영화 속의 여인들처럼 자유롭게 여행도 떠나자고 했다. 혼자 불쑥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영화 한편조차 여자 혼자 보면 청승맞은 일, 셋이라면 별 눈치 안보고 서로를 보안하는 믿음까지 있으니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범죄를 도모하는 공범자처럼 우리는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가끔 나이트클럽에 가자느니 댄스를 배우자느니, 점점 담대한 계획을 세워갔다. '그런데 모임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M이 물었고 '우리도 자연을 즐기며 살자는 의미로 '풍류'라면 어떻겠니'내가 말했으며 K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서 그 모임의 명칭은 풍류였다. 어떤 틈새를 만들어줌으로서 기분전환이 오히려 가정에 생기를 줄지 모른다며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합리화도 시켰다. 꽃철에는 막걸리를 싸들고 화전놀이를 가고, 겨울 바다는 어디쯤이 풍광이 좋은가를 상상하다 기분 좋게 헤어졌다.

   한 달이 지난 후 약속부터 예기치 못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총무인 M이 정작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늦겠지 하며 기다린 게 한 시간, 그녀는 집에도 없었고 전화기조차 꺼져 있었다. 코에 바람만 잔뜩 들었던 두 여자, 내용도 없는 지루한 얘기를 이어나가다 지쳐 힘없이 헤어졌다.

     며칠 후 M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바빠서 까마득히 약속을 잊고 지냈다고 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까마득히’ 라는 어절에 심사가 뒤틀렸다. M은 성의 없이 뭉뚱그려 조만 간에 만나자는 말을 했고, 나는 그때의 시간 낭비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약속을 정하라고 졸라댔다. 그 것은 맹목적인 치기에 가까웠다. 그녀가 약속 장소와 날짜를 말했다.

  "시간은? 시간을 말해줘야지..."

  "글쎄 몇 시가 좋을까?"

   나는 늦은 일곱 시가 좋다고 했다. 적당한 허기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조수처럼 밀려오는 시간 아닌가. 어둠 직전의 나트륨 등은 오렌지 빛 솜사탕 같은 감미로운 빛을 발하며 외출을 설레게 할 것이다. 저녁 안개가 끼어도 근사하지 않을까. M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눈치인 듯 쉽게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운전 중이라며 시간은 다시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성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약속날짜가 와도 M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오지 못한다거나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은 왜 못하나.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무시당한 감정까지 슬그머니 치밀었다. 약속을 쉽게 허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인연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리기로 했다. 그럴수록 왠지 그녀를 꼭 만나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한 어느 저녁에 K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몹시 허둥대고 있었다. 방금 전 동네 미용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속에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M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 며칠 전에 일어난 끔찍한 자동차 사고 얘기였는데 기막히게 피해자는 M이었다. 식구들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운전자였던 그녀가 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한 것이었다. 늘 바빠서 머리할 시간도 없다던 K는 하필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던가.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싶었다. M은 그런 식으로라도 지킬 수 없었던 약속을 우리들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우리와 만나기로한 날 이틀 전에 이미 세상에 있지 않았다.

    나는 M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약속 날을 넘겼을 때까지 주인도 없는 전화기에다 메시지를 남기고 호출을 하지 않았었나. 단지 여흥을 위해 집요하게 연락을 시도할 때 가까운 산에서 그녀를 떠나보내기 위해 젖은 흙에 삽질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심한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수첩을 펼쳐보았다. 그녀의 이름이 붉은 펜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모임에서 헤어지며 그녀는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불러주었다. 백 속에서 손에 잡힌 것은 얼핏 붉은 색 펜인 것 같았지만 어두운 자동차 안이어서 우선 급한 대로 사용했었다. 그리곤 까맣게 잊은 일이었다. 붉은 글씨는 죽은 사람에게나 쓴다는 미신이 아니더라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매사에 야무져서 절대 남에게 손해를 보지 않을 것 같았던 M이었다. 그렇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도 않는 단정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M은 우리들의 미안함을 덜어주려 약간의 회비 모은 것을 반납하지 않고 자신의 부조금으로 챙겨간 것은 아닐까.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다가왔던 그녀는 꽃철 나비처럼 잠시 머물다 허망하게 떠났다. 자유와 낭만을 추구하던 '풍류' 모임도 그녀와 함께 종말을 맞이했다.

   지금도 만남을 종용하던 순간을 생각해본다. '시간은? 시간을 말해줘야지...' 장소와 날짜를 말하면서 끝내 시간을 정하지 않았던 그녀는 어떤 예각이 있었던 것일까. 막무가내로 채근하듯 약속시간을 받아내려 했던 나의 태도는 뭐란 말인가. 나또한 떠나려는 M을 절박하게 붙잡아두고 싶었던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은 아닐까. 약속 날은 하필 그녀의 육신이 땅에 묻히는 날이었다. 아무리 성능 좋은 전화기라도 지상과 천상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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