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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정거장 / 곽효환

에세이향기 2024. 9. 27. 14:58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
호젓한 시골 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
백두대간 숲속 깊은 곳에/ 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
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 가게 해야겠다

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
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 / 숲의 정거장엔
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
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
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
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
단청 고운 절집 탱화 아래 앉아
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
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
몸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
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
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
그리고 방앗간이 더러는 정겹게
더러는 힘겹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 간이역
한때는 열차들 분주히 들고 나고 / 수많은 사람들 멈추고 떠나며
흥성하게 장도 이루었을 텐데

그 기억과 시간이 떠난 자리에 /숲의 정거장에 넘치게 붐비는
느림을 멈춤을 고요를 실어다/ 고루 나누어 줘야겠다

두 역을 오가는 기차의 차장을 해야 할 지
두 역 중 어느 역의 역장을 맡아야 할 지
고민은 초록과 함께 깊어간다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 몸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시인은 ‘숲의 정거장’을 곱게 지으신 것 같다. 이미 그곳에 머물러 사람들의 힘든 마음들을 쓰다듬어주고 있는 역장이 되신 것 같다. ‘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 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 단청 고운 절집 탱화 아래 앉아 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을 곳에 터를 잡고 이일 저일에 마음 상하고 지친 우리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네. 언제든 찾아가도 따뜻이 맞아주려고 초록색 두 팔을 벌리고 계시네. 미소가 번지는 우리…<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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