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들다 / 정상미
저녁을 우려 넣은 매실주 놓고 한지에 연서를 씁니다 한지의 속살은 뿌리를 머금을 줄 알아 애인은 한지에 쓴 편지를 좋아하죠
한지국國에 들어갈 때는 닥나무국國을 거쳐야 해요 닥나무국은 나의 산골, 우듬지에서 하품하던 흰 구름이 여권을 검사하고 파수꾼 딱새는 포르르 내려와 안내를 하죠 닥나무 아래 풀 뜯던 홍보담당 노루, 종이는 품격,이라 외치네요
한지에선 닥나무를 키우던 바람소리가 배어 나와요 이파리 끝까지 적셔주던 빗방울 소리 들려요 나는 색감 자욱한 몽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노을 한 됫박, 달빛 서너 줌 입고 참매미 소리 접어 선녀라도 되고 싶어요 누구라도 나무꾼 되어 내 연서 받아줬으면
?푸른 볼펜으로 시를 읽다 / 박남일 문학평론가
이적의 손바닥만 한 양상추는 구운 고깃점 얹히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고릿적 예닐곱 장의 자잘한 조선상추는 된장만 알맞추 발려도 쌉싸래한 맛이 그만이었다. 쌉싸름하지 않은 상추는 맛국물 아닌 장醬물에 풀어 놓은 국수처럼 아무 맛이 없다. 조선간(된)장 조선기와 조선낫 조선무 조선솥 조선집, 장구럭 든 아낙들과 장돌림들이 섞갈려 어런더런하던 오일장이나 외갓집 가는 길허리질러 고리 잇던 회똘회똘한 모롱이 길만치 정다운 이름들이여. 안해 늦가을에 벗은 빈집인 본가 방문 바를 문종이 파는 데가 없더라고 중덜거리며 격세지감을 털어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별別짜인가 보다. 1947년 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과 『초적草笛』(김상옥)을 곁에 두고 『한지에 들다』를 읽고 있다. 이 둘은 바로 조선종이로 된 책이다. 오십년대 것들이 아무리 신주 모시듯 해도 들치는 족족 바스러지건만, 고희 넘긴 ‘얘들은 ’(옷가게 아줌마들은 의류를 요렇게 부르데) 신간 다루듯 해도 까딱없어 신라 왕조만큼 오래갈 듯하다. 더군다나 속표지는 유난스레 괭하고 허여멀게 물오른 처자 알종아리같이 만질만질하다.
다저녁때 매실주 곁에 두고 그는 조선종이에 글씨를 쓰고 있다. 속물근성이 판치는, 아니 횡행하는 이적에 얼마나 멋거리진 취미이며 가람 처마 끝 매달려 뎅그렁 우는 물고기처럼 고풍스러운가. 그의 생각도 매한가지다. 자신의 글을 ‘연서’라 하고, 애인은 조선종이에 쓴 편지를 좋아한단다. 옳아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꿀 같은 구절”(빙허憑虛, 『B사감과 러브레터』)의 연애편지만 연서랴, 애정의 대상인 종이에 또깡또깡 쓰는 글씨도 연서일 것을. ‘애인’ 또한 단순히 ‘사랑하는 이성’은 아닐 터, 어쩌면 그것은 2연의 ‘흰 구름/딱새/노루’일 수도, 시의 독자일 수도 있겠다.
조선종이의 품격을 무지 도두보는 그에게 ‘한지/닥나무’는 그냥 ‘한지/닥나무’가 아니다. 출입국관리소가 있고 파수꾼이 있고 국가공보처가 있는 어엿한 ‘한지국/닥나무국’이다. 조선종이를 펼치기만 하면, 그에게는 고향 산 자드락의 닥나무들이 보인다. 우듬지에 퍼질러 앉아 심심한지 하품하는 흰 구름, 구름에 자리 내주고 포르르 날아내리는 딱새, 만날 소素밥으로 때우는 노루도 보인다.
조선종이에 들면 그 두메가 보이기만 할까. 이제 그의 귀에는 닥나무 키우던 빗소리/바람 소리/참매미 소리마저 들린다. 이쯤이면 한지국/닥나무국은 선동仙洞으로까지 격상되고, 그는 노을/달빛 옷 걸치고 선녀가 된다. 선단仙丹이란 영약 먹지 않고도 신선 될 수 있다니, 마음속 때 덕적덕적한 나도 어서 한번 그 닥종이 속으로 들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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