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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에세이향기 2022. 2. 10. 10:53

벼랑에 핀 꽃 / 고경서(경숙)

 
 

- 굳게 닫힌 시간의 수문을 열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지나고, 빈 원두막을 돌아 오솔길로 접어들면 솔향기가 먼저 달려들었다. 밀밀한 솔밭에서 젊은 아버지는 걸음이 느렸고, 나는 펄쩍펄쩍 뛰어가도 자꾸만 뒤처졌다. 그 길을 벗어나면 저수지가 나왔다. 저수지 양옆으로 바다를 밀어낸 해안선과 갈대를 품은 늪지가 있었다. 그 사이를 차지한 방죽이 우리가 즐겨 찾던 낚시터였다.

저수지 수문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발목까지 찬 물속에서 낚시를 하셨다. 석축 틈새는 뱀장어들의 은신처였다. 거름더미에서 파낸 지렁이를 일 미터 남짓한 댓살 끝에 미끼로 달았다. 소쿠리 안에는 내 손목보다 굵은 뱀장어들이 뒤엉켜 똬리를 튼 채 미끌미끌한 점액질을 게워냈다. 긴 등짝에 새긴 흑갈색무늬가 선명할수록 무섭고 징그러웠다. 한 나절 봄볕을 갖고 놀다보면 물이 담긴 고무신에 송홧가루가 노란 꽃을 연신 피워댔다. 그런 날은 바다도 몸을 치대느라 물빛이 자주 바뀌었다. 그 물빛을 영원히 볼 수 있으리라고 그때는 믿었다.

세월이 훌쩍 흐른 뒤 낚시터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섰다. 유년의 추억도, 뱀장어들도 숨을 곳이 필요했을까. 봄빛 일렁이던 수면 위로 쓰레기들이 산처럼 쌓여갔다. 인간이 버린 욕망의 찌꺼기가 추억을 뒤덮었다. 불로 태울 수 없고, 물로 흘려보내지 못한 것들만 그곳에 묻혔다. 소용이나 쓸모가 다했다고 할 말이 없을까. 삼복염천에 불볕이 꾹꾹 누르면 부패하면서 생긴 침출수가 악취를 게워냈다. 역한 냄새가 길을 물고 늘어지자 땅을 지키던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리며 피해 다녔다. 마침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기 위한 긴 침묵에 들었다. 폐허는 오래 지속되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다가 우뚝 발길을 멈췄다. 파릇파릇한 것들이 바람에 얄랑얄랑 흔들렸다. 죽은 땅을 뚫고 올라온 생명,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인간에게서 내쳐지고 버림받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그곳이 성소였을까. 키 작은 풀꽃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바람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열매도 바짓가랑이에 들러붙어 발길을 낚아챘다. 그것을 보자 시들어가던 내 안의 봄날도 생기가 돌았다. 캄캄한 어둠에 갇혀 소생한 자연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는 눈길에 먼지 같은 세월이 엉겨 붙었다.

- 패총, 인고의 시간을 살다

 

동삼동 패총이다. 해안가에 자리한 발굴 현장은 여인의 펑퍼짐한 둔부를 닮았다. 그 위에 소나무 몇 그루가 표식인 양 서 있고, 주변은 잔디밭이었다. 외관상으로 유적지를 지시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흔하디흔한 갯가였다. 그러나 갯바람도 숨을 죽였고, 먼 바다로부터 밀려왔다 돌아가는 파도 소리도 어느 하루 편안한 날이 없었다며 거대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내부 전시관은 긴 잠에서 깨어난 조개무지를 절단면으로 보여줬다. 연대기를 달리한 퇴적층은 암갈색의 지층으로 켜켜이 쌓였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다와 바람과 햇빛, 눈과 빗물에 노출된 채 풍화작용을 거쳐선지 흙냄새조차 말라버렸다. 그 속에 패각 부스러기들이 드문드문 박혔고, 흰빛이 선연한 소라껍데기가 귀를 열고 동태를 살피는 듯 했다.

그것을 보자 형체가 없는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른 흙과 삭은 조개껍데기 속에 오롯이 들어있었다. 덩어리 째 한 시대를 증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 천 년이라는 시간의 영속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 무게와 부피는 작고 가벼웠다. 문득 거센 풍랑을 안으로 삭혀 수용하기보다 겉으로 대결하고 저항한 주상절리가 겹쳐졌다. 빛과 어둠으로 양분한 시간의 다른 모습이랄까. 상처 입은 시간의 민얼굴, 즉 무심과 평온을 가장한 견고한 고독이나 정제된 슬픔 같았다. 적막의 가장 깊은 곳을 내통한 중심과 대면하는 듯했다.

아득한 세월 저편에서 한낱 쓰레기가 보물로 발견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진열장에 전시된 유물을 바라보는데 여기저기서 수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격이 다부진 사내가 사냥터로 떠나는 발자국소리, 골격이 튼튼한 여자가 움집에서 물고기를 요리하는 둔탁한 도마소리, 태곳적 파도와 바람 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긴 수염고래를 끌어 올리던 눈부신 함성은 어디에 묻혔는가.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버리고 총총히 사라졌던 여인의 한숨은 어디에 찍혔는가. 산산이 깨진 시간을 이어붙인 붉은간토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비릿한 갯내와 해조음에 귀가 젖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패총은 살아있는 화석이다. 누대로부터 환원된 시간이 그 시대를 대변하는 역사가 되고, 박제된 시간은 생명력을 가진다. 원시인들로부터 쓰레기로 내쳐졌지만 스스로가 버려졌다는 긍정의 힘으로 견뎌야 했던 인고의 시간이다. 쓰레기란 갈 데까지 간 마지막이요, 생이 끝난 것들의 무덤(塚)이다. 그 절박함으로 세세토록 피어난 영생의 꽃이다.

- 삶의 퇴적물, 기약 없는 기다림을 보다

오늘도 빵을 먹고, 하루치의 일상을 봉투에 담아버린다. 누가 그것을 꺼내본다면 내 기호나 식성, 취향을 가늠할 것이다. 내가 먹어 치운 욕망의 조각들은 생명의 에너지이지만 정작 내 몸속에 방치되는 배설물들은 어떤가. 이것은 때론 회오리바람처럼 정신에 혼돈을 일으킨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라는 말에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다. 언제쯤 내 안의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는 청소부가 될까.

삶의 과적으로 심신이 중력을 벗어나 휘청거리면 이곳에 온다. 해산 후에 뼈를 맞춰가는 산모처럼 스스로에 대한 휴식과 명상이 필요할 때다. 기억의 지층에 삽질을 한다. 유적으로 발굴된 아버지와의 추억은 패총의 소라껍데기처럼 뚜렷한 이미지로 다가선다. 뱀장어 입질에 숨도 크게 못 쉬던 당신은 먼 길을 떠나신 이후로도 여전히 뱀장어를 잡고 계신다. 나는 그 뱀장어 울음소리를 뭉근히 고아낸 국물로 흘러간 시간의 속살과 해후하며 마음속 찌꺼기를 걸러 낸다.

파란만장한 세월이 휘적휘적 물길을 건너간다. 옛 여인은 그녀가 버린 탄미(炭尾)에서 하얀 벼꽃을 피우며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도깨비바늘, 도꼬마리가 키를 세우는 내 기억의 매립장 속에는 매몰된 추억이 밤낮없이 뒤척거린다.

이제 사라진 저수지는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그곳을 향해 나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아버지는 솔향기를 데리고 천천히 뒤따라오신다. 점점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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