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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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밀개/윤승원

에세이향기 2022. 10. 9. 09:47
 
 

 

밀개 
 
윤 승 원    
 
   
 
 
   밀개가 딱이다. 치맛자락으로 입을 막고 고래 깊은 곳의 재를 죽죽 긁어내어 삼태기에 담았다. 식은 아궁이 재는 채마밭 거름으로 제격이었다. 밀개로 골고루 재를 분산시키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민들레 홀씨 같은 재가 폴폴 사방으로 날렸다. 봄바람에 살래살래 허리를 비트는 채마밭 정구지들이 오늘 따라 더욱 푸르다.   
 
  밀개는 고무래의 사투리다. 주로 밭에서 흙을 덮을 때나 곡식을 펴 말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농기구다. 친정에 가면 오래된 밀개가 있다. 여든이 다 된 엄마는 허리 수술 후 힘이 부치는지 내가 올 때를 기다렸다는 듯 밀개를 주며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 낡은 밀개를 잡으면 왠지 따뜻함이 밀려온다. 오동나무로 만든 울퉁불퉁한 손잡이는 세월의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졌다. 
 
  밀개를 보면 할머니를 만난 듯 반갑고 정겹다. 엄마는 농사일이며 다른 일은 잘했지만 군음식은 그렇지 못했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콩을 볶아 준다든지 정구지 지짐을 부쳐주는 사람은 언제나 할머니였다. 봄이면 나를 데리고 산나물을 하러 가는 것도, 가을이면 뒷산 밤을 주우러 가는 것도 할머니와 함께였다. 길가에 핀 조그만 꽃들이며 나무들의 이름을 또래들보다 먼저 익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커서 살림을 잘 하라며 내게 꼭 맞는 맞춤형 앞치마도 손수 만들어주었다. 외동딸이었던 나를 할머니는 다른 형제보다 더 애지중지했다. 
 
  마을에선 오지랖쟁이 할머니로 통했다. 파평 윤가의 씨족들이 모여 사는 건천읍 모길마을은 모두가 친척이었다. 할머닌 누구 생일이 언제인지, 어느 집이 제사 날인지를 달력 보듯 다 알고 있었다. 누구네 집 잔치음식을 해야 하는데 떡쌀이 부족하다며 넉넉지 않은 쌀독에서 쌀을 퍼다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디딜방아라도 찧는 날이면 당신은 꼭 그 한쪽을 밟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싶으면 굼뜬 손길이라도 보태고 싶어 했다. 가끔은 약방의 감초처럼 참견이 많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동네 대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어른이었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내어 놓고 보리를 널었다.햇살과 바람이 드나들며 부지런히 보리를 말렸다.그럼에도 한 번씩은 보리를 뒤적여 주어야 골고루 마른다며 할머닌 나더러 자주 밀개를 맡겼다. 아무래도 그 일은 오빠나 남동생보단 내가 나았던 모양이다. 맨발로 보리멍석에서 밀개 질을 하는 일은 힘들기보단 오히려 재미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멍석의 까끌까끌한 질감과 발가락 사이로 올라오는 보리알의 간지러움이 괜스레 좋았다. 햇살을 오래 머금은 보리의 온기는 모래찜질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초등학생 계집아이는 늘 보리깜부기처럼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어 있었다. 
 
  저녁이면 밀개로 넓게 펴져 있던 보리를 가운데로 끌어 모았다. 둥그렇게 둔덕을 만들고 멍석자락을 이불 삼아 덮어 주었다. 밤새 이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해가 뜨면 멍석을 걷고 밀개로 다시 펴서 말리기를 반복했다. 비단 보리뿐만 아니라 나락이며 콩도 그렇게 말렸다. 햇살과 바람이 미처 하지 못하는 일을 밀개는 거뜬히 해냈다. 자신의 몸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밀레의 그림 중에 ‘고무래를 든 여인’이 있다. 추수한 곡식을 말렸다가 다시 모으는 모습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밀개를 들고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차분해졌다. 부엌 아궁이의 재를 끌어낼 때는 먼지가 날릴까봐 조심스러웠고, 정구지 밭에 가서 재를 퍼낼 때는 바람결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까 조마조마했다. 보리를 널어 말릴 땐 혹여 한 톨이라도 멍석 밖으로 나갈까봐 서두르는 일이 없어야 했다. 
 
  모처럼의 친정나들이였다. 보약에 버금간다는 초벌 정구지를 수확했다. 오랜만에 묵은 아궁이도 청소하고 재거름을 골고루 흩뿌리고 나니 한나절이 지나갔다. 보들보들한 정구지로 김치도 담그고 전도 부치고 새콤달콤 겉절이도하고 오늘저녁 상차림은 향기로웠다. 할머니가 있었더라면 아마 “우리 손녀,맛나게 잘 무쳤네.” 하고 칭찬했을 텐데. 말끔하게 청소를 한 고래에는 불이 더욱 활활 타오를 것이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길,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 멈춰 선다. 여름이면 마을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느티나무도 할머니와 같이 오지랖쟁이였다. 느티그늘 아래서 어른들은 부채질을 하고 아이들은 공기놀이며 술래잡기, 땅따먹기를 했다. 가끔은 뱀까지 등걸에 태우고 미끄럼을 타게 해 우리들을 놀라게 했지만 언제든지 누구든지 편안히 품어주는 나무였다.작은 벌레며 매미, 새들까지 ……. 
 
  올려다본 저녁하늘에 별들이 잔불처럼 반짝인다.밀개 같은 구름이 지나가자 별들이 더욱 환하게 빛난다. 라코타 인디언들은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마다 할머니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구한다고 한다. 오래 축적된 경험들에서 나오는 현명함의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이리라. 
 
 밀개의 소용이 점차 사라지듯 할머니들의 존재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핵가족화로 노인들은 요양원으로 떠밀리거나 독거노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과거가 없는 현재도 없고 과거가 없는 미래도 없다. 슬픔을 다독여주던 할머니들이 사라지고부터 사회는 더 각박해졌다. 위로와 위안이 없어져 분노와 원망이 그대로 표출되는 현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서 할머니의 오지랖을 닮고 싶어진다. 삶의 주름을 펴주는 밀개처럼. 시원한 그늘을 나누어주는 느티처럼. 그러면 묵은 재 가득한 이 고단한 세상도 다시 환한 아궁이로 회복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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