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책 / 박영란
주문한 책이 왔다. 반가웠다. 포장을 풀고 책장을 넘기니 뭔가 훅 덮쳐왔다. 담배 냄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장 갈피마다에서 일어나는 냄새는 들숨과 함께 코로 흡입되었다. 니코틴에 젖어 있는 책은 매번 머리통을 자극했다. 후각은 시각보다 강했다. 절판된 책을 애써 중고로 구입했지만, 냄새를 거두어 내지 않고는 내용에 접근할 수 없었다. 밀쳐두었다가 다시 손이 갔다가 냄새에 놀라 다시 밀쳐두기를 반복하면서. 이 불량한 책을 보낸 사람은 남자일 거라는 단정을 내렸다. '남자'라는 단정은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거풍시키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엉뚱한 한 남자의 이미지가 삽화처럼 끼어들었다. 남자는 골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무람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애연가다. 가벼운 러닝 차림으로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책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욱한 연기 주변 여기저기에는 책과 꽁초들이 흩어져 있고, 그 공간은 간접흡연에 중독되어 있다. 이 책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사진책'이라는 특성상 남자는 분명 사진에 관심이 있는 자다. 낡고 후줄근한 이 책의 상태는 그가 책을 열심히 반복해서 오랫동안 본 흔적이다. 많은 시간 책을 끼고 있었던 손때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남자는 책을 팔았다. 아끼는 책과 이별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미련을 두지 않는 사람이다. 상상이 여기에 이르면 자유방임형의 남자는 다른 스타일로 전이된다. 그는 경제관념이 있는 자다.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여 책을 사고파는 실리를 가졌다. 그런 매체를 활용할 수 있는 연령이라면, 20대? 30대? 40대? 나이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도 나처럼 이 사진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시간적으로 훨씬 앞서 책을 남틱한 그에게 묘한 동질감이 생긴다. 같이 공유했다는 것, 슬쩍 담배 냄새도 용서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것'과 '중고'. 백지 상태가 새것이라면, 중고는 거기에 뭔가 덧씌워져 있는 상태다. 흠집이 생겼거나 얼룩이 있거나 낡았거나, 이렇게 냄새가 배여 있거나…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그건 누군가와 함께했던 과거다. 유독 골동 가구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으로 봐서 난 이런 과거를 수용하고 좋아한다. 대개 나무로 만들어진 오랜 가구에는 꼼꼼히 삭은 나름의 체취가 있다. 묵향 같기도 한 나무의 묵은 냄새에는 타인의 기운 같은 것이 반드시 남아 있다. 골동을 구입하고 내 집 한 귀퉁이에 놓아두어도 한동안 '내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낯선 서먹함이 있다. 아직 내 것이 되기에는 이른, 옛 주인의 정리를 품고 있는 둣한 이물감이 있다. 이것이 중교의 매력이자 마이너스다. 중고에 대한 사람의 호불호가 나뉘는 것은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커피 한 방울이 틘 자국이나 희미하게 그어진 밑줄이 지워져 있거나, 심지어는 '이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하시길' 이런 자필이 덧붙여 있는 헌책에는 분명 넘어서야 하는 기분이 있다. 하물며 이렇게 지독한 골초의 취향에 대해 더 이상 뭘 말하겠는가. 반년의 시간이 지나자 냄새는 서서히 엷어져 갔다. 남자도 사라지고 책의 과거도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러자 한동안 책이 휑해 보였다. 휘발하는 것에도 아쉬움이 남는지 차츰차츰 옅어지는 것에 이상한 충동이 따랐다. 어릴 적 방역하는 차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면서 그 냄새를 잡으려 할 때처럼, 가끔 책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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