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삼각도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한글사전을 들여다본다. 자음들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줄을 서 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열 네 개의 자음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본자이든, 가획자이든, 아니 이체자이든 다른 것의 자리를 넘보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들이 꼼지락거리면서도 사전 속에서 자리한 모습은 개미의 질서처럼 신기하다. 한참을 훔쳐보던 나는 신기하게도 지켜야 하는 규율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나서는 놈을 발견한다. 맨 뒤에로 밀렸던 ㄲ, ㄸ, ㅃ, ㅆ, ㅉ 등이 본실 소생의 ㄱ, ㄷ, ㅂ, ㅅ, ㅈ의 곁으로 가서 서출을 숨기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빙긋이 웃는다.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모음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태어날 때의 순서를 지킨다. ㅏ, ㅓ, ㅗ, ㅜ, ㅡ, ㅣ의 순서는 그들이 생명처럼 중시하는 질서이다. 요물 인간을 상징하는 ‘ㅣ’가 가끔 요령을 부리고 주위 것들에게 잔꾀를 부리지만 결코 순서를 어그러뜨리는 일까지는 범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이 질서를 뭉개지 못하고 지키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태어난 순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입을 딱 벌렸다가 다물 때까지의 순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 사전에 따라 자음은 더러 질서가 무너져 있어도 이 모음은 결코 흐트러짐이 없다. 입 안에서 발음되는 곳을 파악하여 그 위치를 그려보면 자연스럽게 삼각형을 이루게 된다. 이를 모음삼각도(母音三角圖)라 한다. 혀의 길이가 가장 짧고 아래인 곳이 ‘ㅏ’이고, 그곳에서부터 조금씩 위로 향하고 뒤로 물러서며 ‘ㅓ’, ‘ㅗ’, ‘ㅜ’가 자리하게 된다. 위에까지 올라와 ‘ㅜ’에 이른 혀가 이제는 앞으로 밀려나오며 제자리를 확보한다. 그게 ‘ㅡ’ 이고 ‘ㅣ’이다. 그러니까 이 ‘ㅣ’는 혀의 맨 앞에 있기에 세상을 자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의 못된 꼴을 흉내 내어 주위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모음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순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 통하는 삶을 영위한다. 한번 그들의 데이트하는 모습을 훔쳐보라. 절대 일방적인 헌신이나 배려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주 합리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ㅏ’와 ‘ㅣ’가 만날 때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더 보고 싶다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상대에게 달려가거나 찾아오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정확히 반쯤 움직여서 만난다. 이들은 가운데 지점에서 만나 ‘ㅐ’를 낳고 즐거워한다. 같은 질서 속에서 ‘ㅓ’와 ‘ㅣ’는 ‘ㅔ’를 만들고, ‘ㅗ’와 ‘ㅣ’는 ‘ㅚ’를 생산한다. 정해진 질서를 생명처럼 지키는 모음이 참으로 부럽다. 태생이 하늘과 땅, 인간이라더니 정말 자연의 이치를 어김없이 받드는 심지가 놀랍다. 나보다 앞서 가는 자라 하여 모함하지 않고, 나보다 늦게 따라 오는 자라 하여 업신여기지 않는 모음의 심성을 배우고 싶다. 이제 백수(白手)가 과로사하는 이유를 알겠다. 제 분수대로 살아가면 탈이 없을 것을, 조금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 하여 다른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다 쓰러지는 것이리라. 오늘도 나는 모음삼각도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지혜를 익힌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걷고, 그에 따라 순리대로 살면 될 일이다. 오늘도 허한 가슴 속으로 예리한 각을 가지고 삼각점이 나에게 훈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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