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七의 생각 / 강돈묵
분명 이는 십진법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배운 이 십진법은 지금까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십十이면 가득 찬다. 아니 가득 찬 것은 모두 십으로 보인다. 만족도 십이고, 기쁨도 십이고, 슬픔도 십이다. 백두산도 십이고, 남극도 십이고, 북극도 십이다. 보름달도 십이니, 삶도 십이다. 그래서 나는 아홉만 되어도 포만감이 밀려와 나머지 공간 하나에 애착을 갖게 된다. 이런 까닭에 칠七을 만나면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꽉 차는 것보다야 좀 여유가 있는 칠이 훨씬 멋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안타까움은 감출 수가 없다.
가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십진법을 배우지 않고, 십이진법이나 십사진법 정도를 익혀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면 칠 정도에 와서도 조바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겨우 반이네’ 하며 느긋했을 것이 뻔하다. 모든 것을 십진법으로 타래를 풀려하니 칠만 되어도 조바심이 일어 안절부절 못한다.
칠에다 ‘럭키세븐lucky seven’이니 뭐니 하며 아무리 호사스런 옷을 입혀도 맨드리는 그리 온전하지 못하다. 얼마 가지 않아 종착점에 도달하고 말 팔자에 무슨 치장을 하나 싶다. 열 중에 일곱까지 온 주제에 하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드는 것이다. 바윗돌처럼 메말라버린 내 가슴에 인정의 비가 퍼붓는다 해도 무슨 인정이 고일까. 두렵기까지 하다. 아무리 감미로운 감촉으로 피부를 적신다 해도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십사진법에 꿀을 발라 혀에 대 주어도 십진법에 길들여진 일상은 그 심오한 맛에 빠지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정확히 고백하자면 나는 유리관 속의 벼룩처럼 십진법에 길들여져 있다. 제자리에서 천정까지 뛸 수 있는 벼룩은 유리관을 씌워 놓으면 높이 뛰다가 관 벽에 부딪히어 나뒹굴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에 길들여져 관 높이 이상은 뛰지 못한다. 유리관을 치워도 관 높이 이상 뛰지 못하는 벼룩이 내가 아닐까. 여하튼 나는 매사를 십진법 사고에 묶여서 사는 것은 확실하다.
흔히 백세시대라 한다. 역시 사람의 삶도 십이 종착점이고, 백이 종착점이다. 동네에 환갑을 넘기는 어른이 한 분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환갑잔치를 하는 사람은 이웃 동네에까지 전갈을 넣으며 사람을 모아 술잔을 돌렸다. 지금처럼 초고령화 사회를 걱정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서른아홉에 장총을 들고 동네를 활보하여도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서른아홉은 동네의 상늙은이였으니까. 동네에서는 사십만 넘어도 자신이 들어갈 관을 짜기 위해 옻나무 판을 마련해 두는 사람이 많았다.
시절을 잘 만나 백세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칠을 가슴에 달고 떨어지는 낙엽의 의미를 처절히 음미할 때가 되었나 보다. 실없이 부는 바람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퉁소 소리에도, 낙엽 타는 냄새에도, 거리에서 만나는 된장 맛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와야 할 때를 지키지 못하고, 아무 때나 주책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이 꼬락서니를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십진법으로 생각해 보니 내 나이가 쉽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옛 친구들과 모여 앉으면 여기저기 이 빠진 자리가 드러난다. 머지않아 내 자리도 빈자리가 될 것이다. 좋은 곳에 터 잡아 놓으려 먼저 떠났겠지 하며 그들을 그리워하다가도 밀려오는 허전함은 주체할 수 없다.
살아오면서 많이 들어온 말 중에 ‘칠십 노인네’라는 말이 있다. 팔십도 되기 전에 갈 곳은 오직 한 군데뿐이라며 노인네 칭호를 붙여준다. 그동안 십진법으로 굳어버린 나는 이 말에 단 한 번도 거부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 나이 칠십이면 당연히 종착점이 눈앞에 보이는 노인네가 틀림없다. 계절로 치면 늦가을이고, 하루로 치면 노을 진 저녁인 칠십. 지금 내가 그 석양 아래 축 늘어진 모습을 곧추세우며 들판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칠십이 나이냐!”
왜 이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들 수가 없을까. 십진법이 자꾸 내 머릿속에 질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아, 인간아’ 소리가 귀에 윙윙거린다. ‘칠십 노인네’에서 ‘노인네’를 떼어내고 싶은 나의 욕구에 십진법이 용서할 수 없다고 꾸짖는 소리다. 어느 상황이든 척도의 자尺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엉뚱하다. 남에게는 혹독한 잣대를 들이밀면서 제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말라는 호통을 들으면서도.
호통의 소리가 유리관 속을 뒤흔든다. 깨지지 않는 관 속에서 나는 높이뛰기를 반복한다. 온힘을 다하여 고함까지 치는 모습이 발악에 가깝다. 이제는 십이진법이나 십사진법을 익힐 용기마저 나질 않는다. 아무리 뛰어도 십진법의 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순순히 순응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꾸만 탈출하려는 마음을 다독여 본다. ‘열 중의 칠은 제법 되었어.’ 되뇌며 자리를 옮기는데 어느새 머릿속에서는 ‘마음은 아직도 이십대’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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