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28 3

오십견/정용기

오십견​정용기​  이미 생의 중반을 훌쩍 지나버린 거야.그러니까 수평이 무너진 거야. 엊그제까지는오른쪽에만 주로 무게추를 올려놓았던 거오른쪽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거두어왔다는 거너는 알기나 하는 거야?왼쪽을 늘 업신여기고 따돌려서 시르죽어 있었다는 거왼쪽은 그늘받이에서 눈칫밥 먹으며 견뎌왔던 거너는 알아챈 적이라도 있는 거야? 왼손으로는 이제 뒷주머니의 비밀도 꺼낼 수 없어.머리 위로 치켜들어 희망을 부를 수도 없어.차마 중심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견뎌 왔던 결기가,왼쪽 견갑골에 숨어있던 저 질긴 울분이이제 기우뚱 트집을 잡는 거야, 파업에 든 거야. 한쪽을 보태거나 덜어내도 소용없어.오른쪽과 왼쪽은 애초에 연대보증을 섰으니갈아엎기 전에는 중심잡기 힘들어.우리 삶에 세월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는 거야.물그림..

좋은 시 2024.06.28

낭만 유랑단​/이잠

낭만 유랑단 ​ 이잠​​ 우리 몽골 가서 살까요 더 가난한 사람 되어 낮에는 평원끝 눈 시리게 말 달려 야생 순록 새끼를 몰고 돌아오는 저녁은 어떤가요 ​ 들판에 누워 쏟아지는 별빛 맨몸으로 받으며 배부른 달과함께 숭숭한 꿈자리 없이 밀린 고지서 걱정 없이 곯아떨어지는 망망한 밤도 괜찮겠지요 ​ 뿌리 내리지 못한 슬픔 같은 거 아픈 꼬리 같은 거 삭제해버리고 끝 간 데 없이 밀리기만 하는 이 땅을 떠나 한데에서 떠돌이로 살아 보자요 ​ 난 여기서도 제대로 못 사네 술이나 한잔 더 하세

좋은 시 2024.06.28

접사(接寫)/ 이잠

접사(接寫)/ 이잠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

좋은 시 2024.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