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09 5

물집 [박후기]

물집 [박후기]    선운사 배롱나무 관절을 어루만지다가당신 멍든 복숭아뼈를 생각했습니다몇 해 전, 날 저문 산길부어오른 당신 복숭아뼈를 만지던내 마음도 그만 쓸리고 접질렸던 것인데요그날, 허리 숙여 절을 하며 엎드릴 때당신 얼굴 슬며시 제 등에 업히더군요      * 요즘 학생들은 집에 책상과 의자가 있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 일이 없을 게다.우리 땐 밥상 같은 접이식 책상에 이른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야 했다.몸의 하중이 복숭아뼈에 실리므로 물집이 잡힐 만도 하다.좀 오래 되면 살이 단단한 껍질이 되어 시꺼먼 게 볼썽사납게 된다.내 경우엔 왼발 복숭아뼈에 하중이 실려 시꺼멓게 껍질이 생겼고가끔 껍질을 벗겨주어야 한다.한 꺼풀 벗겨내도 다시 껍질이 생긴다.평생을 어루만져주어야 되는 짐인 셈인데마음의 ..

좋은 시 2024.06.09

논두렁 [이덕규]

논두렁 [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좋은 시 2024.06.09

혼밥/이덕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혼밥[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낯선 사람들끼리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부담없이혼자서 끼니를 때우는목로 밥집이 있다혼자 먹는 밥이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막막한 벽과겸상하러 찾아드는 곳밥을 기다리며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메모 하나를 읽는다“나와 함께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하략)―이덕규(1961∼)혼밥은 한때 예사롭지 않은 단어였는데 지금은 흔한 단어가 됐다. 바쁘니까 빨리 먹어야 하고, 빨리 먹으려면 말없이 혼자 먹어야 한다. 사람이 싫고 말하기도 싫고 그러다 나마저 싫어질 것 같을 때는 휴대전화나 보면서 혼자 먹어야 한다. 이럴 때는 식사가 아니라 끼니가 된다. 이런 사람이 나 포함,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게 혼밥이 낯설지..

좋은 시 2024.06.09

홍어 - 이정록

홍어 - 이정록​​욕쟁이 목포홍어집마흔 넘은 큰아들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새우 눈으로 웃는다​개업한 지 이십팔 년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꽃잎 한 점 넣어준다​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얼음막걸리를 젓는다​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박복한 이년을 합치면,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우리 집 큰놈은 이제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좋은 시 2024.06.09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저녁 찬거리는 고등어였다살아온 날 만큼이나 무뎌진 식칼이고등어의 푸른 등줄기를 몇 차례 내려치고토막토막 나면서 오븐렌지 속에 들어가자고등어는 결국 바다에서의 푸른 생을 끝냈다 한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리식솔들을 이끌고 바다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밥을 찾아 끝없이 유영했으리가끔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우연찮은 골목의 끝을 지나배고픔을 달래며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었으리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참으로 길었다골목마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에 밀려얼마 만큼인지 흘러가고 나서야 나의 서투른귀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모처럼 고등어 찜을 해먹자며푸릇푸릇한 등줄기를 토막 내며새 칼을 하나 사든지 아니면 숫돌에서 갈아야 한다며무뎌진 식칼을 아내가 내 앞에 쓰윽 내밀자난..

좋은 시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