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20 8

애도의 밤 / 최 태 준

애도의 밤 / 최 태 준  형수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나는 영안실에서 혹시 늦게라도 찾아올 문상객이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형수는 스무 해 남짓 혼자 살아왔었다. 조카들은 영정실을 지키며 눈물을 삼켰고, 나는 접객실에서 차츰 자라나는 슬픔을 매만졌다. 문상객이 뜸해질 무렵, 낯익은 중년부부가 영안실의 마루에 올라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반가움과 함께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영정 앞에 예를 차린 후 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두 사람을 맞아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오래 뵙지 못한 이모의 돌연한 별세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는 여인은 바로 내 추억 속의 인물이었다. 그녀를 마주 대하자 나는 그녀가 소녀로부터 긴 세월을 달려와 내 앞에 멈춰 섰다는 생각에..

좋은 수필 2024.06.20

안녕, 춘자 고모/이상은

안녕, 춘자 고모/이상은      대구로 가는 완행버스가 돌무리(고향 동네 옛 지명) 앞에 도착하자 보따리를 든 동네 아낙네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고마 다음 차 타소 아지매들. 이러다 터져 죽겠소. 고추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열 대 여섯 살이나 되었을가 싶은 안내양이 차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그럼 밭에 썩도록 두냐. 이년아.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차장이 벼슬이다. 벼슬. 목구멍에 밥이 어째 들어가는지 모르고. 어서 문이나 열어.”절름발이 율리댁이 안내양의 말을 되받아쳤다.“아지매. 너무 그러지 마소. 나도 고향 가면 아지매 같은 엄마 있소.”버스 문이 열렸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율리댁이 앞장을 섰다. 아낙네들이 힘..

좋은 수필 2024.06.20

늦어도 11월 하순에는 / 김광일

늦어도 11월 하순에는 / 김광일그 날 눈이 왔던가 기억엔 없다. 그보다 난 기억을 믿지 않는다. 기억도 날 믿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서로 배반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기억이 날 배반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지난 사십 몇 년 간의 세월을 지내온 것으로 믿어지는 기억의 총합이겠지만 그 기억은 언제든 나를 배반할 준비가 돼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기억도, 절망했던 기억도 청회색 살의殺意의 기억도 매우 불분명한 형태로 나를 따라오고 있다.다시 말하자면 그 날 눈이 왔던가 기억에 없다. 다만 파편화되고 변색된 기억 조각들의 축조물 위에 배반을 게임처럼 설정하고 사귄 관계는 결코 배반의 쓰라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만 남아 있다. 얼핏 말장난 같지만 우리 선대..

좋은 수필 2024.06.20

호롱불 / 황소지

호롱불 / 황소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응접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옛날 놋쇠 화로와 흰 사기 호롱을 보았다.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에서 옛 정취를 느껴보려는 집주인의 생각인 듯하다. 호롱을 본 순간, 보고 싶었던 옛 친구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지난 시절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이 깔리면 동네에는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그때는 호롱불 하나를 켜놓고 그 밑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었고, 그날 일어났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고 위안을 받았다. 석유를 아끼려고 웬만한 어둠에는 불도 켜지 않았기에 저녁밥도 어둡기 전에 먹어치웠다.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섣달 그믐날이 되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게 사방에 유리를 끼운 등불을 처..

좋은 수필 2024.06.20

사금(砂金) 한 조각/이귀복

사금(砂金) 한 조각  이귀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오르자 투명한 가을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무언지 모를 죄책감에 햇빛조차 싫어졌다. ‘그래, 어젯밤 나는 외박을 했어. 외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가 당당할 수가 없지.’자괴감에 빠져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는데 어젯밤 통화에서 따지고 들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계획된 일이 아닌데, 어떻게 엄마가 외박을 할 수 있어요?”맞다. 나는 엄마다. 엄마가 외박을 했으니 고통스러워야 당연하지. 자조하듯 내뱉는 혼잣말이 소태처럼 쓰다. 누가 뭐래도 오늘 밤은 자고 가겠노라고 가족에게 호기롭게 통고하던 결기(決氣)는 어디로 가고 집이 가까울수록 자꾸만 움츠러든다...

좋은 수필 2024.06.20

아프지 않다/ 변애선

아프지 않다/ 변애선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미칠 것만 같은 그리움의 척도일까. 사랑을 잃고 난 이후 죽을 것만 같았던 통증의 강도인가. 그 존재의 부재가 주는 하염없는 외로움일까. 평생 잊지 못하는 안타까움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마려움이었다. 터질 것만 같은 상태로 차마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는 고통.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그토록 흠모하고 사모하였던 사람과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 때는 이메일이 없었으니 분홍편지지에 푸른 잉크로 그리운 마음을 소나기처럼 적어서 보내는 나의 집요함에 그 사람도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매순간 그 사람을 먼빛으로나마 스치기라도 해보려는 심정으로 살았으니 ..

좋은 수필 2024.06.20

방 속의 작은 방/김채영

방 속의 작은 방김채영 겨울은 어느 절기보다 공기가 맑고 무결하다. 바람의 거칠고 빠른 이동과 반복적인 순환은 갖은 공해를 멀찌감치 날려버린다. 겨울은 또한 춥기에 따뜻한 계절이다. 코끝이 찡하도록 매운 냉기와 건물들의 문짝을 덜컹대며 흔드는 바람에 한줌 밖에 안 되는 얇은 스카프가 더 없이 포근하고, 먼 곳에 사는 친구의 다정한 전화 목소리에서 온기를 읽는다. 혹한 속에서 길을 걷다가 마신 자판기의 커피 한잔의 의미가 어느 계절보다 간절하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외출 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남루한 방 한 칸은 내게는 왕궁처럼 호사롭다. 소소하게 작은 것들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겨울이 어느 계절보다 길고 추운 탓일 것이다.겨울은 우리가 끌어안은 근본적인 서사를 하얀 눈을 덮어 서정으로 채색한다..

좋은 수필 2024.06.20

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백합, 안녕하신가/김채영                               배꽃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배 밭에 촘촘하게 백합이 피어났다. 배꽃이 만개할 무렵에는 그저 풀보기에 불과했을 여린 잎들이 눈부시게 끝도 없이 피어 하얀 나팔을 분다. 이른 봄날부터 한바탕 휘몰이 장단에 꿈같은 향연을 펼쳤던 배꽃이 낙화로 뒹구는 산간 밭은 온통 백합의 차지가 되어 이국적 정취로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날 배 밭을 지나면서 백합 몇 뿌리를 신문지에 조심스럽게 싸들고 온 뒤 베란다 화분에 옮겨 심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백합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 듯 날마다 두 세 송이씩 청신한 꽃을 피워냈다. 나는 그 때 베란다를 환하게 밝히는 순결무구한 백합을 보면서 다음날 피어날..

좋은 수필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