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19 11

모딜리아니, 파란옷의 소녀 /김채영

모딜리아니, 파란옷의 소녀 /김채영    파란색은 피안 (彼岸)의 저쪽에서 온다는 장콕도의 시 '파란색의 비밀'처럼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빛깔이다. 일상의 구도 속에 적절하게 조화로우면서 파란색은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럽다. 파란색은 마치 유리창 밖의 풍경처럼, 혹은 양초를 입힌 종이처럼 실체는 눈에 보여도 본질은 손에 묻어나거나 결코 순화 될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아스라한 둔덕이나 벌판 위에 파랗게 내려앉은 이내는 애수를 동반하고 가슴에 젖어온다. 초저녁의 하늘은 파란색으로 깊어지다가 검푸르다가 종내는 까만 어둠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여명직전의 하늘도 강물처럼 파랗게 물들어 온다. 검푸른 물이 조금씩 바래면서 푸르다가 파란색으로 서서히 밝아 아침 하늘의 지평을..

좋은 수필 2024.06.19

他人의 거울 /김채영

他人의 거울 /김채영      아버지는 내게 어떤 의미인가. 가끔 혼자 생각에 잠겨본다. 내 나이 아홉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 분은 언제나 내 생각 밖에서 마른 미역처럼 무심하게 건조되었다가 일단 내 안에 들어오면 거침없이 풀어지는 슬픔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는 아버지를 기억할만한 사진조차 없다. 오빠들에게 아버지의 독사진이나 추억의 가족사진이 누렇게 빛 바랜 보채 몇 장씩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아버지의 사진을 한 장쯤은 갖고 싶었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 소중한 것들은 오빠들이 간직하는 게 훗날을 위해 나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도 친정에 가면 사진에 대한 미련인지, 해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잠시 아버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비록 시골..

좋은 수필 2024.06.19

남빛 치마의 추억/ 김채영

남빛 치마의 추억/  김채영    여체의 부드러운 곡선을 최대한 반영시켜 제작한 악기는 기타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을 가장 여성답게 연출해 주는 의복은 아무래도 치마가 제격일 것 같다. 펼쳐놓으면 밋밋한 보자기인 한복 치마만 해도 그렇다. 폭이 넓은 치마는 우아하고, 폭이 좁은 치마는 정숙해 보인다. 같은 치마라 해도 치마 말기를 돌리는 쪽에 따라, 허리끈을 조절하기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치마가 가정이 아닌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쓰인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군사들을 도왔다. 행주대첩의 그 유명한 설화를 남긴 앞치마는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불려졌다. 여인의 치마폭에는 이렇듯 여러 가지 삶의 그림들이 채색되어 있다. 멋과 개성,..

좋은 수필 2024.06.19

위험한 곡예/ 김채영

위험한  곡예/ 김채영     실내의 작은 연못에서 금붕어와 비단잉어들이 헤엄을 치며 놀고 있다. 아는 이가 경영하는 음식점인 이곳은 중앙에 분수와 화려한 조명으로 멋을 낸 연못이 볼거리였다. 크고 작은 섬돌을 괴어 만든 연못가에는 보기 좋게 자라난 화초들을 배열해서 풀숲 같은 자연미를 살려주었다. 적당한 먹이와 환상적인 조명과 분위기 있는 음악, 관상용 물고기들의 호사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었다. 식물에게 자연의 소리를 녹음한 그린 음악을 들려줌으로서 성장을 촉진시킨다는데 물고기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녹아있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살고 있었다.    비단잉어와 금붕어가 뒤섞여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는 평온한 연못 .그 안에서 그것들은 답답한지 몸을 푸는 듯 했다. 이곳에는 한동안 야생붕어와 함..

좋은 수필 2024.06.19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지킬수 없었던 약속   /김채영     그녀에게서는 결국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역시 약속 날짜를 잊은 것일까. 휴대폰을 힘주어 눌러본다. 부재중이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사무적인 자동 응답 장치로 돌아간다. 호출도 해보고 문자 메시지도 보내본다. 영영 무반응이었다. 맹랑한 그녀, 두 번씩이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십여 년 정든 곳에서 살다 고향으로 이사를 했을 때 타향보다 더욱 낯설어 있었다. 외로움에 적당히 지쳐있을 무렵 한 친구를 만났고 ,한동네에 산다는 그녀의 친구를 소개받았다. 둘보다 셋이 더 좋을 것 같았다. 트라이앵글처럼 다채로운 화음을 경험할 것 같은 설렘도 있었다.    친구의 친구인 M은 활발한 여인이었다. 상큼한 단발머리에 캐주얼 차림이 어울리는 그녀, 스카프 한 장으로 멋을 낼..

좋은 수필 2024.06.19

마루가 있는 집/김채영

마루가 있는 집/      김채영     창을 열면 언제나 안채의 마루가 눈에 가득 찼다. 한낮의 햇살이 털실처럼 따사롭게 내려앉은 마루가 쉬었다 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 곳에서 보송보송한 빨래를 개고 싶고, 윤이 나게 마루를 닦아 반가운 손님을 맞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다 집장만이 내게 거리가 먼 현실로 느껴질 때, 차라리 마루는 도도하게 높아 보이기까지 했다.    단칸셋방에서 오글오글 네 식구가 모여 살았다. 늦은 밤 예고 없이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남루한 이불이나 옷가지를 장롱 속에 꼭꼭 숨기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나마 어려운 손님이면 슬쩍 자리를 빠져 나와 하릴없이 부엌을 서성거려야 했다. 부엌 유리창에서도 안집 마루가 훤히 보였다. 아이들이 시원..

좋은 수필 2024.06.19

담벼락에 걸린지도/ 김채영

담벼락에 걸린지도/   김채영     깊은 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다채로웠다. 바람이 문풍지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가면 뒤뜰의 나뭇가지에서 눈 뭉치 풀썩 내려앉는 소리, 밤새 댓돌 위 마른 나뭇잎 도란대는 소리며, 날씨가 조금 풀리기라도 한다면 고드름이 와지끈 부러져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나른한 잠 속에 섞여서 감미롭게 전해졌다.그리고 유년의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소리 하나, 밤이면 윗목에 놓인 하얀 사기요강에다 오줌 누는 소리. 파란 붓꽃 그림의 사기요강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는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는 것처럼 청량했다. 그런 밤이면 조용하던 방안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세 살 터울인 작은오빠는 호기심 많은 나의 표적이었다. 그가 요강에서 뒤 돌아앉아 소변을 볼 때는 매우 궁금했다. 왜 남자는 ..

좋은 수필 2024.06.19

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스치는 사람의 실루엣 / 김채영     어쩌면 오늘 그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불안감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텅 빈 실내의 무거운 적막을 뭉텅뭉텅 베어내며 등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이별의 통보처럼 날카로웠다.고개를 돌린다면 그의 얼굴이 보일 텐데, 나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척 밀실 안 연노랑 커튼의 꽃무늬만 건성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게 몇 번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이삼일에 한번 씩은 만났을 것이다. 그게 한 달이 지난 일이니까 열 번은 족히 넘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바리톤이다. 그윽하고 귀족적인 음색이어서 대화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그가 소화해낼 법도 한 오페라의 부분 부분이 불쑥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는 물 찬 제비처럼 잘빠진 공단 연미복..

좋은 수필 2024.06.19

금지된 사랑 / 김채영

금지된 사랑    / 김채영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환시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더위의 적막한 산길에서 눈보라를 만나다니. 어둠 속에서 자동차의 불빛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눈보라의 향연, 늦여름에 어떤 이적이 창궐하나 싶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은행잎 같기도 했고 공중에 분해된 새털 같기도 했다. 자동차 앞 유리에 꾸물꾸물 몰려드는 괴이한 물체의 비행에 정상적인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운전을 하던 일행이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이게 뭐야 , 무슨 나방 떼가 눈을 쏟아 붓는 것 같군 그래"    여행 중, 주말이라 차가 밀리는 고속도로를 피해 낯선 산길을 택했다. 고즈넉한 시골길에서 자동차는 상쾌하게 미끄러지듯 질주해갔고 드물게 지나치는 농가의 불빛이 정겨웠다. 시..

좋은 수필 2024.06.19

사인용 식탁/ 김채영

사인용 식탁/  김채영      식탁 하나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아담한 사인용 식탁이 떠올랐고, 그 것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이 활발하게 그려지곤 했다. 식탁에 우선 빨간 타탄무늬 식탁보를 깔고 싶었다.  그 생각 속에서 수없이 갓 지은 밥과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향기로운 나물 반찬을 꽃무늬 그릇에 담아 상을 차렸다. 식탁 중앙에는 애호박과 두부, 조갯살이 달싹거리면서 달궈진 된장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안온한 시간. 내 옆자리에는 남편이 있고 아들, 딸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장면까지 상상하면 뜻 모를 감동에 눈물이 났다. 그 것은 식탁이라는 물건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매료되어, 수차례 수정 끝에 완성된 내 기준으로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좋은 수필 2024.06.19

고등어를 굽고 싶다 /김채영

고등어를 굽고 싶다 /김채영                                                                                      창가에 서면 싱그러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집에서 살았다. 맑은 날의 바다는 은빛 거울처럼 백사장 위에 고요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남편은 바다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그는 낚시를 떠나기 전 반드시 베란다에 나가 바다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날의 날씨 여부를 판단하곤 했다.  가을이면 하늘과 맞닿은 바다 또한 감청색으로 물든다. 그즈음 바닷가 주변은 어떤 생기로 술렁거리곤 한다. 찬바람이 불면 남해안으로부터 반가운 손님인 고등어 떼들이 따스한 남쪽바다를 찾아오는 것이다. 고등어 주요어장의 하나인 울산 방어진은..

좋은 수필 202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