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101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사무실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엔 당연히 컴퓨터가 놓였다. 책상에 앉는다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컴퓨터를 밀쳐놓고 새삼 종이책을 펼치거나 펜글씨를 쓸 수는 없다. 종일 모니터 안에서 내가 읽어 치우는 활자가 도대체 얼마만한가. 그러나 정작 머리에 입력되는 정보는 많지 않다.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더욱이 드물다. 연초에 서로들 푸짐하게 복을 빌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은 미쁘고 고맙지만 남발되면 의미가 증발해 버린다. 복이 과연 뭔가? 돈인가? 건강인가? 잘난 자식인가? 편한 친구인가? 기분 좋은 마음인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친 것이라면 좋기야 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런 항목의 속성이 한결같을 수야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가졌다 하더..

좋은 수필 2022.03.26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파도를 앞세우고 몰아오던 바닷바람이 절벽을 돌면서 순해져 섬마을로 마실 오듯 넘나드는 곳쯤에 내가 서 있다. 일행 중 앞서 가던 이가 깎아지른 절벽 중턱쯤 깊숙이 파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너럭바위가 기氣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당자리라 한다. 그곳에 오르려면 물 빠질 때를 맞춰 와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대지 위 삼라만상에 광활한 우주의 기운이 스미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 앞에 서면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그 광대무변함 때문만이 아니다. 바다는 세상의 온갖 오물을 달게 삼키는 대신 끊임없이 새 생명을 만들고 생기를 뿜어내준다. 그 넉넉함으로 선순환의 질서를 베풀어 주기에 어머니의 품 같은 바다 앞에 서면 겸손해지고 생..

좋은 수필 2022.03.25

포대기 / 이혜경

포대기 / 이혜경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큰엄마는 기어이 봉투를 밀어 넣었다. “애 낳을 때 못 와서 미안하다. 이걸로 포대기라도 하나 사라.” 물기 오른 눈빛 앞에서 힘껏 뿌리치던 손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다녔으면 각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을까. 빈 봉투를 채우기까지 성치 않은 다리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걸레질했을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뜨거워졌다. 사람 좋기로는 동네에서 큰엄마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때마다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니 사람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부처라고 믿을 사람’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이웃들에게 선뜻 밥솥을 열었고, 마을 경조사에 내 일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이지만 찔레꽃을 닮은 미소에서는 은은한..

좋은 수필 2022.03.24

그림자를 따라서/최지안

그림자를 따라서 최지안 아직 해가 산을 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어떻게 알고 따라붙은 것인지, 바닥으로 길게 누워 앞장선다. 빛도 못보고 자란 식물처럼 가늘다. 그림자도 주인을 닮는가. 연하고 긴 목을 바닥에 누이고 가는 팔을 휘두른다. 가는 다리로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누가 밀면 금방이라도 저만치 나가 엎어질 것 같다. 발꿈치 끝을 물고 허물처럼 붙은 나의 동반자.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눈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그의 감정은 차가울지 뜨거울지 알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쳤을까. 제 맘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나를 따라다닌 지 꽤 되었다. 휘청거리며 걸음마를 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얇은 발목으로 디딘 지상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을..

좋은 수필 2022.03.23

등잔 / 유현주

등잔 / 유현주 시골집에 들렀다가 허드레 것을 쌓아 둔 창고에서 등잔과 부러진 등잔대를 발견했다. 석유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는 죽은 뿌리처럼 부서져 있었다. 골동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챙겨와 깨끗하게 닦았다. 명주실로 새 심지도 만들어 끼웠다. 부러진 곳까지 붙이니 본래의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저기 편안한 자리를 찾다가 아이의 책꽂이 한 칸에 세웠더니 맞춤이다. 겸손한 도령의 얼굴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이 환귀본처還歸本處를 이룬 듯했다. 등잔! 불러 보니 따뜻한 발음에서 봄볕의 나른함이 돌았다. 등을 담는 잔이라니, 세상 어떤 잔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등잔은 소심하지만 진실성 있는 맏이의 느낌이 난다. 꾸밈없는 단순함이 외곬수의 믿음을 준다. 위태로운 흔들림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관대함과 너..

좋은 수필 2022.03.20

헤어진 다음 날 / 김애자

헤어진 다음 날 / 김애자 그립고 아쉬운 것이 있어 비 내립니다. 실낱같은 외줄에 몸 기대고 있다가 지상에 내린 첫날, 깊어진 만큼 남아 있는 상처를 씻으라고 비 오시는가 봅니다. 서걱서걱한 가슴을 쓸어안고 문을 열어 첫 공기를 훑습니다. 퇴각 되어야 할 시간 속에 피어나야 할 무엇이 있는가 봅니다. 마른 기억들이 빗속에 떠다닙니다. 시간 속에 길이 있다 하셨지요. 한 몸인 양 인연의 옷을 입었던 그 순간들이 서러움 속에서 너울거립니다. 고통이라 여겼던 숱한 사연들도 이제는 슬프고도 아릿한 기억으로 허공에 매달리겠지요. 언젠가는 그대 없는 첫날을 맞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쉬 손을 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잠결엔들 꿈결엔들 한차례 불었던 바람이 뜨거웠던 한때를 식혀버렸습니다. 아직은 첫날이니 시간 ..

좋은 수필 2022.03.18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해연

11월은 빈 몸으로 서다 / 이해연 물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몇 번의 날갯짓으로 산만했던 대열을 가지런히 가다듬은 새들은 저무는 강 위를 두어 번 선회하더니, 선홍빛 노을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 간다. 휘모리가락처럼 사위를 온통 붉은 빛으로 휘몰아 넣던 노을이 스러지고 있다. 한지에 먹물 스미듯 시나브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시각이다. 한낮의 거센 빛살에 숨을 죽이고 있던 사물들이 수런수런 제 기색을 찾는다. 산 빛, 물빛이 깊어지고 불빛이 생기를 찾기 시작하는 시각. 낮이라기에는 어둡고 밤이라기에는 아직은 밝은,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이 짧은 순간을 음미하며 나는 하루의 고단함을 벗고 평온함에 잠긴다. 모자란 게 많은 탓일까. 돌아보면 나는 늘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좋은 수필 2022.03.18

현산일기 / 이인주

현산일기 / 이인주 마파람이 가슴을 넘나들어 잠이 오지 않는다. 몇 번을 자는 시늉으로 뒤척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복성재로 향한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자연 발길이 이쪽으로 향한다. 나는 지금 보름째 현산에 머물며 손암의 뒤를 좇고 있다. 손암의 육중한 그림자가 내 안에 들어와 겹쳐지며 하고 싶은 말들을 주술처럼 쏟아낸다. 그의 말 가두고 있기가 버겁다. 언덕길을 오르니 갑갑하던 숨이 좀 트이는 듯하다. 복성재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 근 열흘 동안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왔다. 혜성이 꼬리를 길게 동쪽으로 뻗치더니 서쪽 바다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숲의 저편으로부터 엄습해 온다. 내게 지금보다 더 암담한 상황이란..

좋은 수필 2022.03.18

껍질 / 권현옥

껍질 / 권현옥 너는 좋아. 너는 아니야. 야채 가게에서 분명 껍질을 보고 맘에 든 놈을 바구니에 담아왔다. 그런데 그것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앞치마를 두르면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먹을 것과 버릴 것, 순하게 말하면 ‘다듬기’라 할 수 있지만 실은 껍질을 죄다 버리는 일이다. 다듬어진 깔끔한 알몸이야 식욕을 자극하니 흐뭇하다 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껍질에게서 야릇한 선함을 느끼는 것은 무얼까 싶다. 체온을 위해, 속을 위해, 껍질이 되었다가 지쳐 벗겨진 빨래 통의 빨랫감처럼 껍질로 수북한 음식 쓰레기가 밉지 않다. 사람의 손과 입을 실컷 거친 음식쓰레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죽음 같은 것인지, 훌러덩 속을 던져 놓음으로 느껴지는 가벼움인지 모르겠다. 껍질은 제 존재의 깃발이었다. 제 몸..

좋은 수필 2022.03.18

돌들의 묵언을 읽다 / 김정화

돌들의 묵언을 읽다 / 김정화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 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좋은 수필 2022.03.17

고등어의 눈물 / 최순덕

고등어의 눈물 / 최순덕 시퍼런 바다가 쏟아진다. 탱글탱글 터질 것 같은 싱싱한 고등어가 배에서 바로 집으로 왔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마나 꾹꾹 눌러 담았는지 박스가 미어터진다. 고등어 사이사이에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듯 쿡쿡 박아 넣은 한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쏟아 놓으니 큰 대야에 가득하다. 제매가 오징어 좋아하는 줄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제철 만난 한치를 많이도 보냈다. 맙소사, 작은오빠가 바다 한 귀퉁이를 툭 떼어 보낸 것 같다. 막내 오빠는 고등어잡이 선단의 운반선 조리장이다. 오빠가 전하는 고등어와의 사투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남항 부두에서 고등어잡이 선단은 새벽바다를 빠져나간다. 본선 한 척과 환한 불을 밝히는 등선 두 척과 운반선 세 척이 모여 여섯 척의 배가 선단을 꾸리고 목 좋은 ..

좋은 수필 2022.03.17

구멍/마경덕

구멍 ​ 마경덕 ​ 구멍은 사방에 있었다. 물 샐 틈 없는 바다마저 구멍이 있어 파도에 발을 헛디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밤마다 호롱불 아래 아홉 켤레의 양말을 기웠고 옆집 아저씨는 노름빚에 시달려 온몸에 구멍투성이었다. 솥이나 냄비를 때우러 다니던 땜쟁이 영감은 위장에 빵구가 나서 평생을 골골거렸다. 막히거나 뚫려도 걱정인 것이 바로 구멍이었다. ​ 내게도 기워야할 구멍이 얼마나 많았던가. 믿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에 걷어차여 뻥뻥 뚫린 흔적들. 나는 막힌 하수구를 뚫고 물이 새는 수도관을 틀어막으며 살아 왔다. 구멍에 익숙한 나는 단춧구멍 같은 구멍으로 간신히 목을 디밀고 살았다. 실이 풀린 단추처럼 간당간당 구멍에 매달려 살았다. 오래된 구멍, 은밀한 구멍하나를 기억한다. 돼지우..

좋은 수필 2022.03.16

멸치액젓/김덕임

멸치액젓 김덕임 추자도 앞바다가 펄펄 끓는다. 수천 마리 멸치가 장작불 가마솥에서 녹아내린다. 가느다란 멸치 떼는 잿빛 파도가 된다. 풀어진 살점들이 뜨거운 물마루 끝에 솟았다가 솥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봄부터 미뤄왔던 젓장을 내린다. 산들바람이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의 장작불이 활화산 같다. 시어머니가 정갈하게 가꾸던 장독대 맨 끝에는 항상 젓갈 항아리가 자리했다. 작년 여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독대 청소를 하다가 그 항아리를 열어보았다. 역시나 어머니의 손끝이 함께 버물어진 멸치젓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 익은 것 같았지만 혼자서 젓장 내리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나 내리려고 뚜껑을 덮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갔다. 며칠 전 시골집에 가서는 작심하고 그 항..

좋은 수필 2022.03.16

동태 / 김덕임

동태 / 김덕임 꽃샘바람이 분다. 운명의 신이 나를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죽어서도 감지 못한 똘망똘망한 내 눈. 그 속에는 오호츠크해의 끝 모를 수평선이 빗금처럼 그어져 있다. 까치파도에 부대끼는 수평선 위로 주먹만 한 별들이 밤마실을 내려왔고, 나는 세상모르고 그별들과 밤드리 노닐었다. 매초롬한 몸매로 파도 속을 유영하던 날이다. 촘촘한 그물이 느닷없이 내려왔고, 검푸른 바다를 붕새의 날개처럼 에워쌌다. 그때는 검은 바다의 물주름도 숨을 죽였다. 출구가 빤히 보이지만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미로였다. 갖가지 편법에 능숙한 인간들은 이럴 때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갈 텐데, 마음속에서만 수백 겹의 물마루가 굽이쳤다.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겨자씨만큼도 없다. 내 탓일까. 조상 탓일까. 그 후, 몸단도리..

좋은 수필 2022.03.16

지막리 고인돌/조후미

지막리 고인돌 - 조후미 옌날에는 전라남도 진도를 沃州옥주라고 했어라. 땅땡이가 겁나게 넙고 지름징께 그케 불렀다고 합디다. 요새는 뱃꾼보다 농사꾼이 더 많애라. 째깐매한 섬이지라잉. 지도를 치고 진도 동쪽을 찬찬히 살피믄 첨찰산 끄터리에 지막리라는 마음이 걸쳐 있어라. 뒷산에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응께 상당히 유서 깊은 동네것지라잉. 동네로 나댕기는 질 한피짝에는 찔쭉한 도팍이 서 있는디라 어른신들이 그 독을 슨돌이라고 부릅디다. 마을에 슨돌이 있다는 것이 뭔 뜻인지 아요? 그것은 엔날꼰날부터 거그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제라. 시방은 서울 같은 도시서 사람들이 오굴오굴 몰려 살지만 선사시대 때는 맹수들이 무사서 섬에서들 살았당께라. 섬에서 살다가 차근차근 육지로 퍼져나간 것이지라. 선사시대부터 ..

좋은 수필 2022.03.15

풍차 / 김영식

풍차 / 김영식 바람을 독법 하는 저 수직의 삶이라니. 표표한 공중의 벼랑에 뜨거운 심장을 걸어놓고 제 삶의 중심을 응시하는 고독한 아나키스트. 거인처럼 우뚝 솟아 수평선 너머를 예지하는 수도승의 모습으로. 바람의 시원始原이자 바람의 완결자인 그는 바람이 머무는 육체이자 바람의 정신을 이루는 뇌다. 찰나 속에서 영원을 꿈꾸며 영원 속에서 찰나를 완성하는 은둔의 철학자이다.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과 강하고 약함과 생성과 소멸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시간의 아메바다. 빛나는 비굴절의 이마를 가진 그는 한 번도 삶을 등지거나 회피하거나 우회한 적이 없다. 직립의 우직함은 언제나 정공법을 선택한다. 변화지향주의자인 구름은 그런 그를 보고 평면적이라거나 비타협적이라며 비판하지만 그건 천성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 2022.03.14

바람의 영토에 들다/문경희

바람의 영토에 들다 문경희 미완의 그림처럼, 자그마한 어촌마을은 여백으로 넘쳐난다. 붉고 푸른 지붕이 퍼즐처럼 아귀를 맞추고, 연초록 색감의 야트막한 언덕은 키 작은 인가들을 넉넉하게 아우른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대신 푸른 바다를 마당삼아 거느린 탓일까. 여백이 키워놓은 마을의 배포가 여간 두둑해보이지 않는다. 따끈한 햇살이 소박한 화폭을 분주하게 오간다. 시시각각 채도를 달리하는 태양의 화법에 그림 속의 풍경들이 소리 없이 뒤척인다. 내내 펄떡이던 숨결을 한 템포쯤 늦춰주는, 묘한 위력의 그림 앞에서 잠시 망연해진다. 해금강의 길목, 거제 도장포마을이다. 바다와 길이 만들어내는 절경 속을 한참 동안 달려왔다. 간만에 ‘빨리’를 벗어 놓고 가능하면 느리게 해안길을 에둘러 온 참이다. 내비게이션은 연..

좋은 수필 2022.03.14

끝/박시윤

끝/박시윤 땅 끝에 와 있다. 물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바다 앞에 아이를 안고 섰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이 아이와 나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해는 수평선 끝에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계를 불살라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묽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건물과 산들이 엷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틈틈이 비워진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나간다. 해넘이가 끝난 사방천지는 어둡고 싸늘하다. 끝을 본 전쟁터의 뒷날처럼 숨죽인 채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가슴으로 자작이 흘러든다. 모래밭에 다다라서야 조각조각 깨어져 생을 마감하는 파도의 눈물은 가슴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켜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바람을 맞는다. 뜻하..

좋은 수필 2022.03.13

몽돌/백명철

몽돌 백명철 쏴 밀려왔던 파도가 스르르 밀려나간다. 봄날 오후, 눈부신 햇살아래 바다가 고른 숨을 내쉰다. 푸근한 그 품에 안겨 눈을 감는데 신기하게도 자그락거리는 숨은 소리가 들린다. 연인들의 은밀한 속삭임 같기도 하고, 아픈 상처를 하소연하는 웅얼거림 같기도 하다. 돌이 파도에 구르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는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옅은 갈색, 검은 색, 회색 등 색깔은 제각각이지만 모양새는 동글납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자세히 보니 어느 돌이나 몸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이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구르면서 서로 다듬어 마침내 둥그스름한 모습이 되었다. 문득 저 돌들처럼 나의 각진 삶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삶의 파..

좋은 수필 2022.03.12

섬돌/박양근

섬돌 박양근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 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르내릴 때의..

좋은 수필 2022.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