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목리/배문경

목리 배문경 장롱 한 짝을 들였다. 친정집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차지하던 장롱이다. 앞은 느티나무에 옆과 뒤는 오동나무로 된 전통 방식의 맞춤이다. 비록 유행이 지나고 낡았지만 합판에 무늬 필름을 덧씌운 가구보다 나을 것 같았다. 장롱은 부모님과 오래도록 한 방에서 숨을 쉬었다. 연륜이 있는 물건은 내력을 품어서 그런지 곳곳에 부모님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듯하다. 두런두런 나누는 말이며 갸릉갸릉 가래소리와 쿨럭쿨럭 기침소리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까지 느껴진다. 물걸레로 닦고 광택제로 문지르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삶의 무늬가 깨어난다. 물결일까, 바람의 무늬일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의 등고선일까. 이쪽에서는 산모롱이를 지나는 물처럼 유려하게 휘돌고 저쪽에서는 들판을 달리는 ..

좋은 수필 2022.03.07

바람악보 / 전성옥

바람악보 / 전성옥 바람이 내려앉는다. 힘없는 바람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 앞에서 주저앉는다. 무릎에 얹힌 뼈 없는 바람. 먼 길을 지치도록 왔는지 긴 병에 몹시 시달렸는지 몹시도 야위었다. 가난한 집 굴뚝의 연기처럼… 참으로 가볍다. 야윈 바람의 무게에 휘청한다. 나는 풀썩 주저앉는다. 담도 없고 울도 없는 짙은 고동색의 마루청. 휑하니 넓은 그 마루청 한쪽 가장자리에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비스듬한 그 마루의 중간 높이쯤에. 벌써 한참 되었다. 초가을 아침의 눅눅한 하늘이 사람의 어깨로 내려앉은 지가. 팔랑팔랑, 얇은 것들이 날아 내린다. 마루청 가장자리를 따라 듬성듬성 둘러선 느티들. 어리다. 아직 어리다. 마루를 뚫고 선 세 그루의 느티들. 이들 역시 허리가 두어 줌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

좋은 수필 2022.03.07

내 몸은 생로병사를 세습한다 / 김서령

내 몸은 생로병사를 세습한다 / 김서령 초저녁 잠이 많아졌다.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꾸벅꾸벅 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면 좀 전에 보던 드라마가 아직도 계속된다. 이건 영락없이 우리 엄마의 동작이다. 만년의 엄마는 아홉 시만 넘으면 텔레비전 앞에서 지금 나처럼 꾸벅꾸벅 졸곤 했다. 그러지 말고 누워서 자라고 권하면 얼른 정색하곤 했다. “안 잤다, 야야. 안 자는 사람을 왜 자꼬 잔다카노?” 어떨 때는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 글쎄 안 잤다캐도!” 맞다. 졸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집중해야 마땅할 흥미진진한 프로그램 앞에서 내가 졸다니! 비록 자식이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게 노화(老化)든, 피로(疲勞)든, 해이(解弛)든 스스로 수긍하기도 싫고 남에게 들키는 건 더 싫다. ..

좋은 수필 2022.03.07

스타킹/김경희

스 타 킹 김 경 희 에로티시즘의 기호학은 여인의 다리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스타킹에 환호한다. 본다는 행위는 육감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다리의 아름다움은 스타킹에서 완성된다. 발끝서 엉덩이까지, 입었지만 말갛게 속살이 비치니 감각이 핀처럼 날카로워지는 걸까.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에 유혹이 강렬한 원색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계단을 오르면 남자들은 목이 탄다. 스타킹과 속살의 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특별한 자극을 선사한다. 늑대들의 심장박동이 다급해진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허벅지의 깊숙한 곳까지 숨바꼭질을 해대니 어질어질해지리라. 덩실 뜬 달도 내려와 핥고 싶어질 만큼 홀리는 아찔한 곡선에 남자들의 상상력은 꼭대기에 다다른다. 페티시즘도 스타킹에서 퍼지지 않았던가.《남자의 물건》으로..

좋은 수필 2022.03.04

몽돌/김만년

몽돌 김 만 년 한 바탕 격류가 휩쓸고 간 뒤라서 그런지 강가에는 지층 깊숙이 숨어 있던 햇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돌의 온기를 느끼며 자근자근 맨발로 걷는 이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돌들의 형상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마치 갓 입문한 동자승들이 절간 뜨락에 앉아 재잘재잘 일광욕을 즐기는 듯 모두가 개구지고 정겹다. 느린 발끝에 유독 둥글고 반짝거리는 돌 하나가 채였다. 작은 몽돌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나이테 같기도 하고 사람의 귀 모양 같기도 한 몇 가닥의 문양이 고지도처럼 흐리게 새겨져 있다. 회색빛 결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돌에도 나이테가 있을까. 이 돌은 어느 먼 시간에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일까? 문득 돌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돌의 문양 속으로 억겁의 풍화가 느껴진다. 흐릿한 돌의 등고..

좋은 수필 2022.03.03

바지랑대 / 허이영

바지랑대 / 허이영 가을장마인가 보다. 잠깐 해가 비추더니 금세 퉁퉁 부은 하늘에서 횃대비가 쏟아지고는 하다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이 열렸다. 그 동안 궂은 날씨로 볕을 보지 못한 이불은 습기가 차고 쾨쾨한 냄새가 났다. 문득 이불에서 나는 햇살 냄새가 그리웠다. 여름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 가을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릴 쯤, 이불 걷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에서 폴폴 날리는 햇볕 냄새와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질 때,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땀이 밴 속옷과 여름살이 흰옷을 모아 찜통에 넣고 푹푹 삶았다. 밥을 짓는 소시랑게처럼 북적거리던 거품이 이내 찜통 밖으로 울컥 끓어 넘쳤다. 속옷에..

좋은 수필 2022.03.02

박하사탕 / 김영미

박하사탕 / 김영미 현관 계단 끝에 검정 봉지 하나가 놓여 있다. 봉지에는 이름도 성도 없지만 나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있다. 안에 담긴 것도 반갑지만 봉지 주인의 안녕을 확인했기에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이렇게 봉지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읽는다. 봉지 안에는 봄빛을 겨우 받은 어린 쑥이 한 줌이다. 옆에는 깨끗이 다듬은 달래 한 움큼이 곁들여져 있다. 그대로 냄비에 들이기 좋을 만큼 단정한 모습이다. 봄이라 향기 머금은 그것들을 애써 장만하신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 집에서 보면 어머니가 사시는 마당이 보인다. 지척이라도 문 꼭꼭 닫고 들어앉으면 백리도 넘는 거리다.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마당을 내다보며 밤새 걱정이고 궁금하다. 이렇게 다녀가신 흔적을 봐야 마음 귀퉁이 짐을 내려놓..

좋은 수필 2022.03.02

처마/장미숙

처마 / 장미숙 “동네입구 가게 처마 밑에서 공기놀이 하던게 나는 제일 생각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동창모임에 간 날, 먹때왈이란 별명을 가졌던 친구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먹때왈은 여름에 밭에서 많이 볼 수 있던 까만색 앙증맞은 열매로 까마중의 사투리다. 눈동자가 새카맣고 야무졌던 친구를 동네 사람들은 먹때왈이라 불렀는데 그 친구는 유난히 고향에 대한 정이 깊었다. 처마란 말 때문이었을까. 공기놀이란 말 때문이었을까. 여섯 명 친구들의 표정도 어느새 유년으로 돌아간 듯 얼굴마다 그리움이 가득 번져나고 있었다. “맞아. 가게 집 처마 밑에 어지간히 들락거렸지. 학교 끝나면 와르르 몰려가서 공기놀이 하고 핀 따먹기 하고 놀았던 걸 어떻게 잊겠어.” “그 뿐이야. 갑자기 비가 오면 가장 피하기 ..

좋은 수필 2022.03.02

바람을 먹는 돌 / 김정화

바람을 먹는 돌 / 김정화 마을로 들어선다. 구릉에 우뚝, 그들이 줄지어 있다. 바람을 맞은 검은 나신들이 하늘을 떠받든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부동의 자세가 숭고하다 못해 신령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이 석상들을 만나고자 무던히도 많은 돌을 지나왔다. 조심스레 그들 곁에 다가선다. 서 있는 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인디언처럼 단단한 어깨와 구도자의 평온한 등이 보인다. 묵묵히 눈을 감고 있거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석(老石)도 있다. 얼굴 또한 여유롭고 신비롭다. 각각의 표정과 몸짓이 다르고 햇살 따라 낯빛이 변하기도 한다. 강물을 닮은 논매와 노을빛 미소가 지긋이 나를 내려다본다. 움푹 들어간 눈자위에 빗물 고인 석상은 눈물을 담은 듯 슬퍼 보이고 하..

좋은 수필 2022.03.01

속돌/안희옥

속돌 안희옥 겨울이 지나가는 바다는 부산하다. 끊임없이 물결을 만들어내는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얼굴에 부딪히는 갯바람이 봄을 재촉하듯 습습하게 불고 있다.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는 건너편 해안 풍경도 이제 손에 잡힐 듯 정겹게 다가온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만이 숨죽인 채 밤을 기다리는 해안가의 건물에 엷은 실루엣을 드리우고 틈틈이 비어져 있는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 나간다. 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이 오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질펀한 삶의 눈물이 되어 내 가슴에 자박자박 녹아들고 있다. 바다의 냄새에 한껏 취해 걷는데 뭔가 발에 툭 걸렸다. 돌이다. 돌은 붉은 노을빛에 몸을 말리는 듯 길게 누워 있었다. 돌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보드라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는 이곳과는 ..

좋은 수필 2022.03.01

우렁각시를 찾아서/신성애

우렁각시를 찾아서 신성애 검은 비닐봉지를 든 한 노인이 들어선다. 희끄무레한 피부에 군데군데 검버섯이 피었고 머리에는 낡은 베레모를 눌러썼다. 모자를 벗으니 드러난 머리카락은 얼룩덜룩 제멋대로 자라있다. 목덜미를 덮도록 뒷머리는 덥수룩하고 귀 옆머리는 유난히 짧다. 면도날로 집에서 노인이 직접 밀었다는 옆 머리카락은 짝짝이다. 이발을 하고 싶다는 노인이 베레모를 다시 쓰고서 뒷머리를 만지며 거울 앞에 선다. “미용사 양반, 삐어져 나온 머리를 얄브리하게 잘라주구려. 내사 암만해도 잘 안되는기라.” 머뭇머뭇 말을 건네고도 웬일인지, 노인은 의자에 앉을 생각을 않으신다. 나는 영문을 몰라 돌아선 노인의 다음 동작을 기다리며 애꿎은 거울만 문지르며 서있다. 노인은 소파에 놓아둔 검은 비닐 봉지를 집어들더니 나..

좋은 수필 2022.02.28

도침(搗砧) / 우광미

도침(搗砧) / 우광미 ​ ​ 해가 기울자 바깥은 마치 도량처럼 정(靜)하다. 가을공기에 풀벌레 소리는 더욱 또렷이 들린다. 이런 적막을 깨고 방문 너머 무언가 문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다닥, 엷은 인기척 같아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불빛을 향해 저돌적인 비행을 하던 하루살이와 나방들만 툇마루에 널브러져 있다. 불을 끄자 잠시 풀벌레소리가 약해지는가 싶더니 방안엔 어둠이 내리고 어둠이 짙었던 바깥은 달빛으로 환하다. 창호지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은 내 영의 불빛을 환히 밝혀주는 듯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만 같다. 내 안 욕망의 불을 내리면 이렇듯 환한 빛을 볼 수 있을까. 이 빛은 절로 나의 내면으로 들어와 지난 시간의 궤적을 찾아 나선다. 빛은 맨살의 한지를 넘어 들..

좋은 수필 2022.02.26

놋쇠종 / 지영미

놋쇠종 / 지영미 작고 앙증스러운 모양이 한 손안에 쏙 들어온다. 세월의 때가 묻었다. 장인이 수없이 두들겨 만들어낸 고운 결은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다. 나비 모양 무쇠공이가 가만히 흔들린다. 바람결에 깊은 여운을 담은 소리를 금방이라도 들려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 대문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어느 해 할머니가 메어 놓은 후부터 청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것이 질병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마치 고목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종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주술적인 믿음을 담은 종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함께했다. 어린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좋은 수필 2022.02.26

소금 벼락 맞던 날/김서령

소금 벼락 맞던 날/김서령 어릴 적 내 이름은 웅후였다. 수웅자 뒤후자. 뒤에 사내동생을 낳으라는 염원이 담긴 작명인데, 그건 나만의 소유는 아니었다. 내 이름은 고모 이름 '후웅'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고모의 고모는 '웅후', 고모는 '후웅', 나는 '웅후'. 대를 거듭하며 우리 집안 딸들의 이름은 반복됐다. 딸의 이름은 이를테면 사내동생이 태어날 길을 터주는 전령 노릇을 맡긴다는 임명장이었다. 여러 입에 자꾸 불리면서 이름은 일종의 주문이 돼버렸다. 그 효력은 탁월해 고모에게는 아버지가, 내게는 남동생이 생겨 대문 앞에 떠들썩하게 고추를 매단 금줄을 치는 날이 왔다. 각자 남동생이 태어나던 날, 우리 숙질은 3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어른들에게서 사랑스럽게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좋은 수필 2022.02.25

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설거지 방식을 다시 살핀다/ 김서령 부엌 안에 하수구가 없던 시절 엄마의 설거지는 복잡했다. 먼저 밥솥 안에 두 바가지 정도의 물을 붓는다. 숭늉을 긁어 냈으므로 밥 찌꺼기가 남아 있지는 않은 솥이다. 거기다 식사한 그릇들을 거두어 담는다. 나물 접시, 국그릇, 된장찌개 냄비도 거기 들어간다.한 번씩 헹궈낸다.그릇에 묻은 곡기와 간(엄마는 소금기를 '간'이라 불렀다)은 물에 말끔히 헹궈진다. 솥 안의 물은 금방 뿌옇거나 누레진다. 이 물을 다시 바가지로 퍼낸다. 퍼낸 물이 더럽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땅에서 나온 곡식기운이 뿌옇게 담겼으니 소중하고 아까울 뿐이다. 이 물은 부엌 뒷문 앞에 놓인 항아리에 조심스레 부어진다. 이건 집에서 기르는 짐승의 밥이다.개가 먹을 때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소죽 끓일 재..

좋은 수필 2022.02.25

그에게 열광하다/ 김서령

그에게 열광하다/ 김서령 죽은 윤택수의 박물지를 읽는다. 엊저녁 읽던 것을 아침에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이 친구의 글만큼 날 격렬하게 만드는 게 없다. 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두어 문장만 읽으면 핑그르르 눈물 돈다. 아무리 누선 관리가 안 되는 갱년기의 나라지만 윤택수, 그는 내 정서의 핵심 스팟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긴 별 것도 아니다. 대단한 내용이랄 게 아무것도 없다. 고작 국수를 먹거나 무밥을 먹는다는 얘기다. 떨어지는 낙숫물을 손등으로 받으면 물사마귀가 생긴다고 했다는 풍문들, 사마귀를 잡아서 물사마귀를 뜯어먹게 하면 그게 없어지더라는 기억들, 국수 빼는 엄마를 따라 방앗간에 가는 걸 좋아하는 이유에 관한 글들이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임하만한 마을이었을 그 동네의 방앗..

좋은 수필 2022.02.24

예산장터 버들국수 집/김서령

예산장터 버들국수 집/김서령 예산 장터엔 휘장을 친 국수집이 5군데 있다. 국수뿐 아니라 국에 만 밥도 판다. 예산은 언제부턴가 장터국밥과 장터국수가 유명한 고장이 돼버렸다. 예산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들이키고 갱지에 싼 국수 한 묶음을 사기 위해 충남 내륙에선 일부러 예산장(1일과 5일)에 들른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예산국수는 슈퍼마켓에서 파는 기업형 국수가 아니다. 기계와 사람이 반반쯤 품앗이를 해서 만드는 핸드메이드 국수다. 게다가 햇살속에 널어 말린다. 이게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국수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깊은 맛을 지닌다는 것이다. 맛뿐 아니라 씹는 감각인 치감( 齒치 感감 )과 목구멍에 넘기는 감각인 설감( 舌설 感감 )에 있어서 공장국수들이 범접 못할 매력을 지닌다는 평가였다. 대도시는..

좋은 수필 2022.02.24

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덕산 양조장에 가보셨나요/김서령 술조사라는 것이 있었다. 술조사는 대개 세무서 직원이 맡았는데 그들이 오면 할머니는 누룩자루를 들고 다락으로 숨으셨다. 밀주빚기가 그처럼 범법이 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집에서 가양주 한 두종류쯤 담글 줄 아는 것이 되려 범절있는 집안으로 환호받는다. 술빚기는 똑같이 쌀을 재료로 하는 일이지만 밥이나 떡과는 다르다. 뭔지 들뜨고 흥청거리고 비일상적 설렘이 있다. 누룩이란 말 자체의 은밀함, 노을 아래 술익는 마을이란 도가적 서정, 아랫목에 묻어둔 술항아리의 추억들이 뒤얽혀 술빚는 행위에 모종의 문화적 아우라를 형성한다. 누룩냄새를 맡고 싶었다. 술항아리에 귀대고 아득하게 괴어오르는 소리에 집중하던 순간이 그리웠다. 양조장은 사양산업이긴 하지만 면단위로 내려가면 아직 어렵..

좋은 수필 2022.02.24

아름다운, 낡은, 빈,집/김서령

아름다운, 낡은, 빈,집/김서령 아름다운, 낡은, 빈,집? 하나의 명사앞에 세 개의 관형사를 늘어놓는 것은 온당한 짓이 아니다. 아름다운을 빼거나 낡은을 빼고 빈 만 둬야한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저 빈 집은 낡지 않았다면 빈 집이 될 리 없고 낡지 않은 빈 집이라면 비었다는 의미는 전연 달라진다. 저 집은 말하자면 천명을 다한 집이다. 자연사해서 자연 속에 녹아들어 이물감이 사라진 집이다. 그랬기에 아름다운을 그 앞에 척 걸쳐놓는 것 역시 자연스러울 수 있다. 아름다운을 빼고 낡은과 빈만을 둘 수도 물론 있었다. 요즘의 글쓰기는 너무도 간단해 내가 맨처음 글쓰기를 연습하던 시절처럼 지우개로 뭉개거나 줄을 죽죽 긋거나 종이를 구겨서 내던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커서를 화살표에 올려놓고 자판을 누르..

좋은 수필 2022.02.24

삶은 테크닉이 아니다/김서령

삶은 테크닉이 아니다 올해가 사흘 남았다. 지진과 해일이 남아시아를 휘덮어 수만명을 검불같이 끌고 가고 멀쩡하게 파안대소하던 사람이 배 속에 암세포가 가득 찼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래도 아침해는 잔인할 만큼 무심하게 떠오르고 앞산도 태연하게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새삼 사람의 무력이 실감나는 연말이다. 해는 사흘 뒤에도 분명 똑같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낯설고 새로운 2005년의 해일 터이니 올해의 남은 사흘을 안타깝게 부둥켜안지 않을 수 없다. 뭘 할까 궁리하다 나는 결국 피같이 아까운 이 시간을 청소에 쓰기로 작정한다. 군사정부 시절 징역살이를 경험한 소설가 송기원 선생의 말 중 잊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 "감방을 새로 옮겨가면 통 정이 안 붙는단 말이야. 그러면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

좋은 수필 2022.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