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단맛을 들여라/김서령 가을무에 맛이 들 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다른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새 옷을 입는 것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 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그 아이의 입안에 밥을 넣어주는 것도, 내 몸이 이 땅에 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 이 덤이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

좋은 수필 2022.02.24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에 바친다/김서령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카시라고? 침대 머리맡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꿀처럼 흐르는 아침, 아카시아 꽃 위로 꿀벌 잉잉대는 소리 소란한 오월 오후, 아카시아 꽃주저리가 송이마다 빗방울을 달고 있는 어스름,그런 때엔 새로 바뀐 아카시라는 한글 표준어법 대신 애뜻하고 경쾌하게 두 입술을 활짝 벌려 라고 덧붙이는 걸 용서해줘야 한다. 비구니의 피부는 왜 저렇게 맑은 건가 늘 궁금했다. 밭일로 얼굴이 검게 그을렸어도 흰 살갗에 못지 않게 투명한 게 신기했다.유명 피부 미용실의 특수 석고 맛사지를 받는 것도 아닐테고 백화점 일층의 수입화장품 코너의 수십만원 하는 수분크림을 바르는 것도 아닐텐데... 여승들이 얼굴에 투명함과 윤기를 유지하는 비결은 생리심리학이 연구해볼 과제이기도 하고 뷰티 컨설턴..

좋은 수필 2022.02.24

사과/김서령

​​사과 김서령 나는 행복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뉘앙스로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희망이 없다고, 지금껏 잘못 살아왔다고, 곁에 손 내밀 사람 아무도 없다고 착각하는 날도 종종 있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 줘야 할 필요와 의무를 느낀다. 그런 날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직접 처방한 묘약인데 도마뱀의 눈물, 소금 뿌린 로즈마리, 밀랍과 복숭아씨 같은 까다로운 재료가 필요한 건 절대 아니다. 외려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효능은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그건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와사삭 깨물어먹는 일이다. 너무 시시하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까다로우면 까다롭지 간단하다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사과는 와사삭 소리가 입안에서 비강을 통..

좋은 수필 2022.02.24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김서령

[나목을 내다보는 시간] 김서령 내 등뒤에 나목으로 이뤄진 숲이 있다. 저 나무들은 아마도 참나무일 것이다. 누가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이 땅에서 절로 돋아난 나무들. 참나무에 꿀밤이 열리면 꿀밤나무다. 도토리를 꿀밤이라고 부르지 상수리라 부르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나무일 땐 도토리나무보다 상수리나무라고 부르는 빈도가 더 높은 건 왜일까(난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참'이라니, 그 외의 다른 나무는 '거짓'나무라도 된다는 뜻일까. 전에 꿀밤 나무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꿀밤을 먹고 사는 다람쥐를 오소리 같은 좀 큰 짐승이 잡아먹고 오소리를 잡아먹는 너구리같은 더 큰 짐승을 또 호랑이가 잡아먹고, 그런 먹이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

좋은 수필 2022.02.24

콩을 심자/김서령

콩을 심자/김서령 봄이 온다. 봄은 땅에서 뭔가 맹렬히 돋아나는 계절이지만 반대로 땅이 입을 벌려 씨앗을 맹렬히 삼키는 계절이다. 나무라면 꼬챙이만 꽂아둬도 물이 오르고 씨앗이라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싹이 돋는다. 우주가 약동한다. 모든 길짐승, 날짐승의 피톨과 핏줄들이 바쁘게 요동친다. 땅에 뭔가를 심지 않으면 안된다. 봄에 땅에 씨앗을 묻어본 사람은 그 짓을 안하는 봄을 견딜 수 없어진다. 한톨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이 피고 한들거리다 수백 배의 알곡으로 여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가을이 무슨 소용 있으랴. 봄에 씨앗을 묻는 이의 일년은 암만 빨리 흘러도 허망하지 않다. 진작 내 인생의 봄날에 깨우쳤어야 할 진리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알고 나면 너무 늦다. 대신 봄이 오면 나는 회한을 곱..

좋은 수필 2022.02.24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변명과 거짓말, 그리고 새벽 4시 / 노경실 남동생 부부와 사는 엄마와 나누는 아침 통화.. 나는 문안인사 뒤,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도 울고 갔지." "오늘은 왜요?" 그때마다 엄마의 답은 다양하다. '머리 모양 마음에 안 든다고', '반지 끼고 간다고', '비 오는데 구두 신고 간다고', '체육복 입고 오라는데 원피스 입고 간다고', '팔찌를 두 개나 차고 간다고', '밥 먹기 싫다고', '졸리다고', '괜히 짜증을 내고.' 6살이 된 조카, 채원이는 날마다 날마다… 어린이집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할머니와 제 부모를 뒤흔들어놓는다고 한다. 공주 되는 게 꿈이라는 어린아이 앞에서 팔십 인생을 살고 있는 백발과 청청한 마흔 초반의 두 사람이 절절매는 것이다. 단지 그 아이가 울며..

좋은 수필 2022.02.21

도마소리 / 정성화

도마소리 / 정성화 함성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다각다각' 하는 소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도마소리였다. 잠결에 듣는 소리는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진다. 그래서 아련하다. 윗동네의 예배당 종소리나 이른 아침 '딸랑딸랑' 들려오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도마 소리가 그러했다. 어머니는 소리로 먼저 다가오는 분이었다. 펌프질을 하는 소리, 쌀 씻는 소리, 그릇을 챙기는 소리 등. 그 중 도마소리는 잠을 더 자라고 토닥여주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이불 삼아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 스무 평밖에 되지 않는 집이었다. 부엌이 집 가운데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방이 붙어있는 ㄷ자 구조의 집이라 부엌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는 어느 방으로든 이내 전해졌다. 도마소리가 잠잠해지고 '보글보글' '자글..

좋은 수필 2022.02.21

그리움에 익다 / 이문자

그리움에 익다 / 이문자 태풍에 얹혀온 가을이 상처투성이로 보채다가, 어느새 순환의 섭리에 맞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촌부들이 내놓은 좌판을 훑어 애호박 한 아름을 안아다 창가에 썰어냈더니, 조금씩 들어앉는 볕 덕분에 오글오글 잘 마르고 있다. 호박오가리와 벌이는 ‘사랑 놀음’에 빠지다 보면 애지중지 손자 녀석들 보듬는 듯해서 가을날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한 여인네로 만든다. 결벽증(?) 다분한 남편이 창문 열어놓고 산다고 성화가 심해 어렵사리 이 일을 하면서도, 첫서리 전까지 끝 호박 사 나르는 일을 접을 수가 없는 건, 백로가 지나면서부터 도지는 내 유년의 그리움 때문이다. 새발 마냥 가는 다리를 총총거리며 내가 제일 신나했던 심부름은, 저녁밥솥에 쌀을 안치며, ‘어서 호박 따오라.’시..

좋은 수필 2022.02.19

진수식( 進水式 ) /조숙

진수식( 進水式 ) 조 숙 큰댁에서 분가하면서 받아온 목숨이 이 배 한 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날이 정월 초아흐레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답니다. 사람사이에 인연을 몇 억겁의 세월을 건너 만나지는 것이라면 아버지와 우리 배 어승호와 인연은 어떤 세월의 강을 건너서 다다른 것일까요. 어린 싹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그것이 한 척의 배로 건조되어지기까지 시간의 나이테를 되돌려 점 하나로 시작되었을 그날을 떠올리자면 말입니다. 어승호는 아버지의 몸과 같은 생채리듬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몸으로 말하지 않아도 배의 휴식 즈음을 아시고 도크에 올립니다. 바다의 이빨에 물린 상처와 격랑을 건너온 관절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른 힘줄 불끈거리는 아버지의 손 어디에 그 토록 자상한 부드러움이 숨어있었던가. 도크에 올려 ..

좋은 수필 2022.02.18

미역할매의 노래 / 조숙

미역할매의 노래 / 조숙 미역에서 풀내가 난다. 미역도 등줄기 꼿꼿한 한그루의 바다나무다. 줄기, 잎사귀, 뿌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척박한 바윗덩어리에 뿌리박고 포자로 번식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년 전에 동남아의 어느바다에서 스킨스쿠버로 물속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음 한 조각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미역 숲이 마치 육지의 밀림과도 같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역을 식용으로 하지 않는 나라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 숲인 셈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미역이 물결 따라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재래시장에 갔다가 참기름 바른 듯 반질거리는 미역을 사왔다. 철지난 미역이라 날것으로 먹기에는 좀 억세다 싶은데 ..

좋은 수필 2022.02.18

글탁 / 문경희

글탁 / 문경희 "짜구 잡은 지 십이 년 됐어요…" 뭉툭한 경상도 억양 탓일까. 턱밑으로 바짝 들이대는 카메라에 곁눈도 주지 않고 하던 일에만 묵묵한 청년에게서 남다른 뚝심을 읽는다. 잘 익은 누런둥이 호박처럼 둥글 길쭉한 나무통에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느라 여념이 없는 노옹을 흘낏 돌아보며 머쓱하게 내뱉는 말에는 '아직 멀었지요.'라는 한마디가 말줄임표로 매달려 있는 듯하다. 아버지이자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듯 사선으로 슬쩍 비쳐 앉은 품새가 단단히 그러진 금기의 벽처럼 섣부르게 욕심내기에는 언감생심인 경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다만 다른 상의 찬을 넘겨다 보는 아이처럼 부러운 기색만은 은연중에라도 감출 수가 없는지 자귀를 움켜쥔 투박한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백여 년에 걸쳐 삼대가 온전히 ..

좋은 수필 2022.02.18

당연한데도 민망한 / 정재순

당연한데도 민망한 / 정재순 아뿔싸, 몸이 춤 트기를 한다. 미스터트롯 열풍으로 방송채널마다 네 박자가 난무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들썩거린다. 어깨와 발바닥이 근질근질거리는가 싶더니 남편 앞에서 춤을 추고 만다. 순전히 익숙해진 탓이다. 설마하니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판이 제대로 깔리고 분위기가 딱 들어맞아야 춤이 나왔었다. 하물며 뽕짝이 나오면 귀를 닫아버리던 때가 어저께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튼 몸은 부끄러움을 잊은 모양이다. 쿵짜작 쿵짝, 발라드나 힙합이 나와도 찔뚝 없이 장단을 맞춘다.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던 그가 티브이 화면을 막아선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겨 앉는다. 관계가 돈독해지면 자연스레 마음의 담장을 허문다. 격식과 거추장스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트기가 시작된다. 춤은 물..

좋은 수필 2022.02.18

댓돌/우광미

'댓돌' 우 광 미 .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 저마다 순례길 같은 일상에서 지고 온 남루들을 벗어놓는다. 하루치의 자잘한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킨 후 비로소 맨발을 방으로 들인다. 또 날이 새면 어김없이 새로운 다짐을 찍으면서 나선다. 돌은 연장이 되기도 하고 염원을 담아 얹으면 탑이 되기도 한다. 성벽의 돌처럼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높이 쌓은 것도 있고, 보일듯 말듯 나지막이 집 담장으로 둘러진 경우도 있다. 그 쓰임새가 다양하나,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인 댓돌은 유난히 살갑다. 비상하는 새들도 머무르며 쉼표를 찍듯이, 생각이 흐트러질 때엔 시골집에 와서 댓돌을 바라본다. 칼에 베인 시간처럼 빈집의 공허가 창백하다. 내 시간의 긴 침도 모 닳은 댓돌 위에 멈춰 있다. 각이 서 매사 반듯하던 젊은..

좋은 수필 2022.02.17

동백의 기별 / 허상문

동백의 기별 / 허상문 동백에 대한 기억은 비장하고 엄숙하다. 어느 겨울날 남도 땅 선운사를 방문했을 때, 절 뒤편에서 하얀 눈 위에 선혈처럼 뚝뚝 떨어진 동백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떠난 시인의 각혈이 생각났다. 평생 직업다운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오직 한 편의 좋은 시를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다 간 친구였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린 아들이 지켜보던 장례식 날, 마지막 생명의 햇살은 한 송이 붉은 동백꽃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대정벌에 귀양 와서 위리안치되었을 때, 친구였던 초의선사가 그를 방문해서 아내의 타계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때 추사적거지 오두막의 새하얀 눈밭에는 동백꽃이 아내의 붉은 눈물같이 뿌려졌다. 그 모습을..

좋은 수필 2022.02.16

부지깽이 / 정재은

부지깽이 / 정재은 어둑신한 토방 부엌 바닥 아궁이 앞에 치마 앞자락에 불빛을 발갛게 받으며 이모님과 나란히 앉았다. 갈비처럼 착착 재어 놓았던 콩풀렸다 다독였다 하시며 불길을 조정하신다. 부지깽이가 너무 짧아져서 이모님의 손등은 금시 새빨갛게 되었다. 짧아져서 못 쓰게 된 부지깽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놓고 시렁위에 두었던 부지깽이단을 내리셨다. 엄지손가락 굵기에 1미터의 길이쯤 될까. 마디가 없고 휘지 않는, 매촐하고 맞춤한 부지깽이감 여남은 개가 칡끈에 묶이어 있다. 소나무는 가벼우나 빨리 타 버리는 것이 흠이고, 참나무는 야무지나 무거워 다루기 불편한 것이 흠이어서 가볍고 단단한 싸리나무나 아카시 가지가 부지깽이감으로 귀여움을 받는다. "불 좀 보겠니? 나갔다 오마." 부지깽이를 넘겨주시고 이모님은..

좋은 수필 2022.02.14

된장/정성화

된 장 정 성 화 친정어머니는 양손에 든 보따리 때문인지 조금 휘청거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또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서 딸네 집에 오는 길이다. 어머니의 어깨에 내려앉은 세월을 느끼며 우울해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신문지에 쌓인 참기름병 하나가 부산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보따리 한 쪽으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얼른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었다. 된장과 오이소박이, 참기름, 그리고 된장에 넣어 삭힌 고추와 무장아찌가 들어있었다. 그 냄새만으로도 나는 어느새 고향 마을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젊어 한때 고생이라고 하지 않니.” 어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다. 선장인 사위가 집을 떠나 있어도 딸이..

좋은 수필 2022.02.12

콩 / 김산옥

콩 / 김산옥 나는 순덕이 아줌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양구 대암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두타연 일급수를 먹고, 부지런한 농부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키가 큰다. 때때로 찾아와 보듬어주는 넉넉한 순덕이 아줌마 사랑을 먹으면 한여름 불볕더위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대암산이 붉게 물들 즈음, 순덕이 아줌마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내 작은 몸은 땅의 온기와, 햇빛과 달빛, 산소와 비, 바람과 농부의 땀으로 완성된다. 온 우주가 담겨진다. 대암산 아래 넓은 벌판에 희끗희끗 서리꽃이 피면, 나는 순덕이 아줌마 곡간에 둥지를 튼다. 봄, 여름, 가을이 총총히 내 곁을 지나가는 동안, 나도 분주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제때 열매 맺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고단함을 내려..

좋은 수필 2022.02.12

돌확의 노래/이정인

돌확의 노래 이정인 정중동(靜中動)이다. 빗물 고인 돌확에 하늘빛 젖어드는 사이 흰 구름 살포시 제 몸을 적신다. 잠시 타는 목을 축이던 서산의 해는 긴 밤을 흘리고 사라져간다. 어둠에 빠져버린 웅덩이에서 달은 또 한 번 떠오른다.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돌확의 풍경에는 허허로운 운치의 노래가 흐른다. 돌확은 살아있는 추억의 화석이다. 나보다 먼저 고향집에 생겨나 지금까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머물러 있다. 시골농가 개조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헐고 고쳐도 돌확은 처음 있던 그대로다. 정들 틈도 없이 빨리 변해가는 시대에 그대로인 모습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돌확을 볼 때마다 잊힌 날들을 재회하는 기분이 든다. 이미 돌확은 무정한 한 물건이 아니다. 고향집에나 내 마음에나 정겨운 한 존재다. 긴 세월 ..

좋은 수필 2022.02.11

나무도마/방만실

나무도마/방만실 시댁 둿길을 산책할 때 개골창에 박혀있는 나무토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꼿꼿하게 박혀 서 있는 것이 꽤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렀으리라 짐작되었다. 가운데 언저리를 이끼가 졸라매듯 옥죄고 있었고 보기에 반쯤은 거무튀튀하게 삭아들고 있었다. 뽑아 드니 숭숭 뚫린 작은 구멍이 여러 개였고 그곳에서 벌레들이 슬슬 기어 나왔다. 그나마 웟부분엔 물이 닿질 않아 나무토막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크고 둥근 옹이가 박혀 있다. 그 옹이는 시커면 몰골에도 눈동자마냥 말똥말똥하게 날 바라보는 듯했다. 그대로 썩히기엔 아깝단 생각에 들고 와 말갛게 씻은 다음 그늘에서 말렸다. 도마라기엔 꽤 두텁고 커 보여 안반인가 싶었으나 가운데에 칼자국이 보이는 걸로 용도는 도마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한창 때..

좋은 수필 2022.02.11

항아리 /방만실

항아리 /방만실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끝을 담고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여주고 있다. 열 서너 살까지 그랬듯이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실컷 꾸정거리다 물을 가라앉혀 웃물에 물수제비뜨듯 발에 묻은 모래알을 씻어내고 싶다. 그냥 스쳐가기가 망설여진다. 들여다볼수록 우묵하니 폭 파인 모양이 항아리 속 같다. 그 즈음 우리 집에는 하릴없이 입을 벌리고 빗물이나 받아마시던 큰 독이 있었다. 웅덩이 같은 독이었다. 주둥이에 금이 간 그 큰 항아리를 자주 들여다 보았었다. 항아리를 들여다 볼 때도 내 배경으로 구름이 흘렀었다. 나를 보다가 내 배경을 바라보다가 그도 시시해지면 손으로 휘휘저어 항아리 안이 소용돌이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면 더 이상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배경이고 뭐고 얼굴까지 일그러..

좋은 수필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