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

좋은 수필 2022.04.20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수숫대, 까치밥 / 김서령 멍석딸기.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이름이 멍석딸기지요? 멍석딸기는 넝쿨을 옆으로 떨치지 않느냐. 멍석처럼.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열매가 크지요? 잎도 크고 꽃도 크니까 그렇겠지. 어머니, 멍석딸기는 왜 맛이 신가요?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수숫대. 수숫대와 옥수숫대 밑동에는 설탕이 들어 있다. 공기뿌리가 삥 돌려난 마디의 바로 윗마디를 잘라 이로 껍질을 벗겨내고 뚝뚝 베어먹었다. 입술이며 입속을 베기 일쑤였다. 단물을 다 빼먹고 빡빡해진 섬유소를 뱉어내면 핏물 스민 것이 보이기도 했다. 까치밥. 양지꽃과 꽃다지와 지칭개와 제비꽃이 피는 봄의 논두렁과 길섶에는 까치밥이 여물었다. 신부 족두리에 꽂혀 있는 영락(瓔珞)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까치밥을 한 움..

좋은 수필 2022.04.15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때 가장 값진 글감이 진실이란 것을 알았고 뼛속까지 정직하고 싶던 때라 더 울림이 컸다. 그러나 실현에 옮기는 일은 얼얼한 감동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그 후로도 좋은 책을 만나면 출렁거렸고, 그리고 40년 동안 은근하고 은밀하게 나를 중독시킨 안방마님 ‘신문’은 그 세계와의 소통에 다리가 되어주었다. 조간신문, 변화무쌍한 나를 매일 붙잡고 있는 절대불변의 공간, 한동안 아이들 뒷바라지로 분주한 풍경 뒤에서도, 이제 각자 무대로 진출해 호젓한 풍경 뒤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는 친구. 그 잉크 냄새가 커피 향과 섞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쾌감으로 뻑뻑했다. 이내 목을 타고 내리는 커피 ..

좋은 수필 2022.04.14

채독/이순혜

채독/이순혜 자금산 기슭에 내려앉은 덕동마을은 어머니의 품같이 편안하다. 오래된 나무와 고택이 어우러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동마을은 농재 이언괄 선생이 양동에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택 사이를 거닐다 덕연관 앞에 섰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 생활 용구, 농기구 등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이다. 문화마을로 지정되면서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유물을 주민들이 기꺼이 내놓아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시관 입구에 부끄러운 듯 돌아앉은 채독이 눈길을 끈다. 채독은 나무 항아리다. 싸리나무의 낭창한 성질을 이용하여 큰 장독처럼 모양을 빚어 안쪽과 바깥쪽에 창호지를 바른다. 채독은 통풍이 잘되어 주로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거나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내 기억..

좋은 수필 2022.04.06

독도, 닻을 내리다 /김만년

독도, 닻을 내리다 김 만 년 섬은 일월풍진에 깎여 온 흔적이 역력하다. 두 개의 암청색 바위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있다. 먼 바다를 응시하는 풍모가 초병의 눈빛처럼 의연하다. 끼룩끼룩! 괭이갈매기들이 옥타브를 높이며 머리 위를 선회한다. 섬기린초 괭이밥 날개하늘나리......,여리고도 강인한 생명들이 가파른 바위에 매달려 반가운 손짓을 한다. 모두가 친숙한 모국어들이다. 만리 밖 초동樵童을 만난 것처럼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애틋한 시선이 머문다. 아! 여기서는 갈매기도 아리랑곡조로 울고 파도도 휘모리장단으로 철썩이는구나. 나는 독도가 백두대간의 핏줄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암벽에 손을 얹으니 잔잔한 파동이 느껴진다. 지구가 소용돌이치던 어느 신생의 아침에 백두대간의 지층을 뚫고 불쑥 솟아올랐으리라. 창..

좋은 수필 2022.04.05

노루발/김지희

노루발 김지희 자운영 붉게 핀 옷감 위를 노루발이 겅중겅중 뛰어간다. 두 귀 쫑긋 지나간 자국마다 박음질된 실들이 오솔길처럼 펼쳐진다. 촘촘한 길 가로 새소리며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챠르르! 챠르르! 할머니가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눈부신 천들이 지어져 나온다. 노루발은 재봉틀의 부속품이다. 박음질 할 때 옷감이 밀리지 않도록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 지그시 누르는 힘이 없다면 실이 끊어지거나 선이 비뚤어져 낭패를 보기 일쑤이다. 중간이 갈라져 끝이 살짝 들린 생김새가 노루의 발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불렀는지 언제 들어도 정답고 살갑다. 몇 번씩이나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엄마는 신주단지처럼 재봉틀을 모셨다. 혹여 생채기라도 날까봐 이불로 고이 싸매고 난 후에야 다른 짐을 챙겼다..

좋은 수필 2022.04.03

먹감나무/신정애

먹감나무/신정애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시간이 응축된 결 사이로 먹빛 농담들이 그윽하게 번져 있다. 백년의 세월 속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간 일필휘지 굽이쳐 흘렀다. 마을회관을 지으려고 빈 집을 허물면서 베어진 감나무였다. 차탁으로 귀히 쓰인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찾아간 자리였다. 반으로 자른 단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니 아릿한 기억들이 묻어나온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시골마을이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담장을 넘어온 가지마다 홍시가 탐스럽게 익었다. 초가집 일색인 마을에서 단 하나 뿐인 기와집이 할머니의 집이다. 고샅길 막다른 곳에 이르면 솟을대문이 어린 나를 압도했다.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아래채에 기거했고 본채의 큰 방이 할머니..

좋은 수필 2022.04.02

거룩한/김정화

거룩한/김정화 누구나 마음에 담아두는 말 한두 마디 정도는 있을 게다. 주변인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제각각이다. ‘흙둔지’라는 말에는 향수를 느낀다는 친구. ‘보고 싶다’라는 글자만 보아도 심장의 무게가 내려앉는다는 사람. ‘카르페디엠’을 외치면 엔도르핀이 솟는다는 지인도 있다. 반면, 삶이 순탄치 않은 K시인은 통곡하기 알맞은 장소를 찾아 몇 년째 ‘호곡장好哭場’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기도 하고, ‘눌인訥人’이라는 단어가 어눌한 자신을 칭하는 것 같다며 아예 아호로 정해버린 스승도 있다. 그들처럼 나도 요사이 관심을 두게 된 말이 하나 생겼다. 바로 ‘거룩한’이라는 다소 무거운 형용사이다. 이 말을 좋아하게 된 연유는 오로지 H 선생님 덕분이다. H 선생님과는 수년간 같은 지역의 문학단체 회원으로 ..

좋은 수필 2022.04.01

오척단구 / 이희승

오척단구 / 이희승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아마 대인과 소인으로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또 대인이든지 소인이든지 이것을 각각 두 가지로 다시 나눈다면, 인간개체에 육체와 심령이 있고, 인생 생활에 물심양면(物心兩面)이 있으며, 대우주 자체에 물질면과 정신면이 있듯이, 대인에도 정신적인 대인이 있을 것이요, 소인에도 또한 마찬가질 것이다. ​ 그런데, 소인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육체적인 것에 대하여는 별로 주석이 없으며, 오직 정신적인 소인에 대하여서만, (1)세민(細民) (2)불초(不肖)한 사람 (3)스스로 겸손하는 말(自謙之詞) 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세민이라 함은 빈천한 사람을 의미하고, 불초한 사람이라 함은 학덕(學德)이 없고 성질이 사악한 사람을 가리..

좋은 수필 2022.03.31

돌담 / 윤남석

돌담 / 윤남석 볼쏙, 돌담 위로 볼쏙 고개 내민 야나한 호박순이 산들바람에 살랑인다. 호박순이 앙증스런 손마디를 나풀대며 맨 위에 얹힌 돌, 움켜쥘 기회를 엿본다. 똬리 튼 호박순의 곰질대는 폼이 능청맞다. ​ 저러다가 ​ 절호의 기회다, 싶으면 확실한 확보에 나서겠지. 그렇게 안정된 확보가 이루어지면, 뒤따라 넝쿨이 휘감으며 올라서고, 그다음에 호박잎이 담을 아늑하게 감싸겠지. 넝쿨과 잎줄기 사이에 돋아난 노란 꽃잎은 벌을 끌어들여 가루받이하고, 작달막한 열매 맺게 하겠지. 보송한 솜털 돋은 열매는 이슬방울로 목을 축이고 풀벌레와 소곤거리겠지. 그렇게 바깥세상에 눈뜰라치면 제법 보로통해지겠지. 얄따란 옷 속으로 비치는 속살처럼 관능미를 넌지시 흘리면, 이내 손을 타겠지. 하지만 널따란 잎사귀 속에 숨..

좋은 수필 2022.03.30

돌 자리를 앉히며 / 김선화

돌 자리를 앉히며 / 김선화 8년 전, 도시생활에 권태를 느낀 나는 산마을 이곳저곳을 돌며 구옥을 구경했다. 빈 집을 꼼꼼히 돌아보며 세월의 흔적을 이고 서 있는 돌담에 매료되곤 했다. 섬세하지 않아 더러는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지만 그러한 곳은 고쳐 쌓으면 될 일이라 여겨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친정어머니는 줄곧, 산마을보다는 평지의 친정집을 수리해 살라고 이 딸을 꾀어냈다. 뒤꼍은 산에 닿았고 대문 밖은 소로인데 길 아래로는 무논이 이어져 벼 익는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초입이다. 대식구가 살다 나와 비어있는 구옥 토방엔 고라니·노루 등이 칩거하여 흙벽이 아예 굴이 되어가고, 어쩌다 대문을 열면 인기척에 놀란 놈들이 미끄러지며 허겁지겁 뒷산으로 올랐다. 그런 곳을 기어코 딸의 떠돌..

좋은 수필 2022.03.30

봉노 / 안희옥

봉노 / 안희옥 마당엔 어느새 눈발이 성글고 있었다. 뒤란 대숲엔 멧새떼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윙윙 감나무가 울었다. 일찍 저녁밥상을 물린 우리 자매는 쉬 잠이 오지 않아 살금살금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당신을 찾아온 손녀들을 함박웃음으로 반겼다. 봉노엔 벌써 밤과 고구마가 맛깔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광에서 가져 온 홍시도 녹아서 말랑말랑한 채 오지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인 화로의 옛말이 봉노다. 할머니는 화로라는 말 대신 봉노라는 말을 썼다. 추운 겨울 날, 화력이 오래 간다는 참나무 장작을 태워서 남은 숯불을 봉노에 담았다. 그 위에 재로 덮어 오랫동안 불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했다. 재와 재 사이로 빼꼼하게 보이는 불꽃들이 눈을 덮어쓴 산수유 열매처럼..

좋은 수필 2022.03.30

뚝배기/오귀옥

뚝배기/오귀옥 맵시는 부족해도 푸근한 오지그릇이다. 아가리가 넓고 속이 깊은 건 제 안에 담긴 음식을 한껏 품어내기 위해서다. 그 안에서 노랗게 봉싯 부풀어오른 계란찜은 더없이 맛깔스럽다. 바글바글 끓는 청국장은 헛헛한 몸의 기운을 돋군다. 무게감 없는 양은냄비는 왠지 경박해 보이지만, 투박하니 묵직한 뚝배기에는 이름 그대로 뚝심이 배어 있다.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맛을 담아내는 데에는 뚝배기만한 그릇도 없다. 뚝배기는 완전한 것보다 조금은 허점이 있어야 더 친숙하다. 한두 군데 이가 빠진 아가리 둘레로 와글와글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국물이 끓어넘쳐야 제 맛이다. 자르고 찌르는 서양음식에 비해 입술을 쑥 내밀고 숟가락을 후후 불어가며 뚝배기에서 떠먹는 우리 음식에는 여유로운 정이 흐른다. 뚝배기의 질감은..

좋은 수필 2022.03.30

대문 / 서명순

대문 / 서명순 노모가 홀로 계시는 친정집 대문을 고치느라 난리가 났다. 적당히, 녹이나 걷어내고 기름이나 먹이면 되리라 쉬이 여겼던 작업은 장정 4명이 달라붙어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망치, 펀치, 절단기에, 전동 드릴기, 이장 집에서 빌려온 CO2 용접기까지. 왱왱거리는 기계소리가 고즈넉한 골목을 흔들며 온 동네 관심사가 되었다. 무릎이 시원찮은 팔순 노모가 우여곡절 끝에 차(車)를 구입했다. 토끼와 거북이로 속도를 조절하는 전동차는 대문 턱 앞에서 정지하고 말았다. 4m 남짓 되는 대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빗장을 풀기도 어렵고 닫기도 곤란했다. 빗장이 두 문짝을 쉬이 갈고리해야 하는데 앙살 맞은 소리만 낼뿐 여간해서 빗장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식이란 자가 민망한 것은, 마당에 대 놓았던 제 차가 빠져..

좋은 수필 2022.03.30

노란 서점 / 김인선

노란 서점 / 김인선 늙으면 햇살 잘 드는 공터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로 서점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판매를 하진 않을 테니 정식 서점은 아니겠고, 굳이 용도를 말하라면 책 읽는 어른들의 문화공간이라 할까. 다 늙어서 웬 책이냐고 물어오면, 세상 이야기 두루두루 나누면 그게 다 책 얘기지, 라고 말할까 한다. ​ 일생이 소박했으니 집이 클 필요는 없겠고, 꽃들과 다감했으니 유일한 사치는 그런 것에나 부릴까 한다. 이왕이면 오솔길을 내어 책을 읽으러 오는 길이 산책길이면 좋겠고, 노란 물감으로 멋을 부린 집 주위로는 키 낮은 해바라기를 심어 아예 ‘노란 집'이라 불리면 더욱 좋겠다.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도 이만큼 노랬을까 생각하면서 먼 나라 화가 흉내로 짜릿한 기쁨도 맛보겠지. ​ 이름도..

좋은 수필 2022.03.28

입, 주름을 말하다 / 김인선

입, 주름을 말하다 / 김인선 내 얼굴에는 생각하는 괄호 하나가 산다. 말하는 입의 가장자리에 앉아 말하지 않는 침묵의 힘을 담고 있다. 입술이라는 것이 말하는 날개라면 이는 입가에 어른거리는 민무늬 날갯짓이다. 팔랑팔랑 말의 언저리를 따라 다니지만 수많은 갈래의 인생을 일획으로 담은 웅숭깊은 무늬다. 언제부터 이 괄호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세하게 찾아왔을 시작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기슭이 편하다는 걸 알아가던 즈음이지 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변방을 좋아해서 수척한 테를 일찍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감미롭게 좋아한 반가사유상처럼 턱을 자주 괴었던 내 지난날들이 거기에 담겼으리라. 햇살과 바람에도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무모함에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

좋은 수필 2022.03.28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행복은 값이 없다 / 김서령 사무실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엔 당연히 컴퓨터가 놓였다. 책상에 앉는다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는 의미다. 컴퓨터를 밀쳐놓고 새삼 종이책을 펼치거나 펜글씨를 쓸 수는 없다. 종일 모니터 안에서 내가 읽어 치우는 활자가 도대체 얼마만한가. 그러나 정작 머리에 입력되는 정보는 많지 않다.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더욱이 드물다. 연초에 서로들 푸짐하게 복을 빌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은 미쁘고 고맙지만 남발되면 의미가 증발해 버린다. 복이 과연 뭔가? 돈인가? 건강인가? 잘난 자식인가? 편한 친구인가? 기분 좋은 마음인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뭉친 것이라면 좋기야 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런 항목의 속성이 한결같을 수야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가졌다 하더..

좋은 수필 2022.03.26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파도를 앞세우고 몰아오던 바닷바람이 절벽을 돌면서 순해져 섬마을로 마실 오듯 넘나드는 곳쯤에 내가 서 있다. 일행 중 앞서 가던 이가 깎아지른 절벽 중턱쯤 깊숙이 파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너럭바위가 기氣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당자리라 한다. 그곳에 오르려면 물 빠질 때를 맞춰 와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대지 위 삼라만상에 광활한 우주의 기운이 스미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 앞에 서면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그 광대무변함 때문만이 아니다. 바다는 세상의 온갖 오물을 달게 삼키는 대신 끊임없이 새 생명을 만들고 생기를 뿜어내준다. 그 넉넉함으로 선순환의 질서를 베풀어 주기에 어머니의 품 같은 바다 앞에 서면 겸손해지고 생..

좋은 수필 2022.03.25

포대기 / 이혜경

포대기 / 이혜경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큰엄마는 기어이 봉투를 밀어 넣었다. “애 낳을 때 못 와서 미안하다. 이걸로 포대기라도 하나 사라.” 물기 오른 눈빛 앞에서 힘껏 뿌리치던 손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다녔으면 각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을까. 빈 봉투를 채우기까지 성치 않은 다리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걸레질했을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뜨거워졌다. 사람 좋기로는 동네에서 큰엄마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때마다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니 사람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부처라고 믿을 사람’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이웃들에게 선뜻 밥솥을 열었고, 마을 경조사에 내 일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이지만 찔레꽃을 닮은 미소에서는 은은한..

좋은 수필 2022.03.24

그림자를 따라서/최지안

그림자를 따라서 최지안 아직 해가 산을 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선다. 어떻게 알고 따라붙은 것인지, 바닥으로 길게 누워 앞장선다. 빛도 못보고 자란 식물처럼 가늘다. 그림자도 주인을 닮는가. 연하고 긴 목을 바닥에 누이고 가는 팔을 휘두른다. 가는 다리로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누가 밀면 금방이라도 저만치 나가 엎어질 것 같다. 발꿈치 끝을 물고 허물처럼 붙은 나의 동반자.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눈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는 그의 감정은 차가울지 뜨거울지 알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쳤을까. 제 맘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나를 따라다닌 지 꽤 되었다. 휘청거리며 걸음마를 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얇은 발목으로 디딘 지상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을..

좋은 수필 202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