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이삭꽃 / 허문정

이삭꽃 / 허문정 연세가 많으신 분의 등을 밀어 드렸다. 흘깃 가슴팍을 보니 돌보지 않은 무덤처럼 젖가슴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건포도 같은 젖꼭지는 생의 꼬투리인 양 맺혀 있다. 긴 여정의 마침표 같기도 하고 욕망의 마지막 징표로도 보였다. 고개 숙인 이삭 같은 모습에서 순간 꽃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게 바로‘이삭 꽃*’이구나! 잘 영근 이삭은 생의 마무리이자 눈부신 완성이다. 그 자체로 풍요이며 만족이다. 완숙한 몸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라며, 새봄에 싹을 틔울 희망의 기다림이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여인네의 젖꼭지는 완숙의 느낌을 넘어 처연함으로 다가온다. 떨어져 거름이 되기 위한 무표정한 순종, 그 비움이 쓸쓸하게 느껴져 삼천 년에 한 번씩 핀다는 우담바라처럼 고귀한 꽃의 이름을 붙여주고..

좋은 수필 2022.08.01

딸아이의 짐을 싸며 / 배종팔

딸아이 짐을 싸며 / 배종팔 새끼 부엉이가 쭈뼛쭈뼛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까스로 둥지를 빠져나왔지만 아직 밖의 어둠에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둥지 안에서 본 세상과는 달리 나뭇가지에서 보는 세상은 낯설고 두렵다. 어미 부엉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만 본다. 하지만 속은 새끼보다 더 불안하고 애가 탄다. 독립, 그것은 어미가 새끼에게 짐 지우는 삶의 첫 임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제법 커진 몸뚱이, 그런데도 새끼 부엉이는 상수리나무를 세상의 전부로 아는지 이쪽저쪽 가지 사이로 폴짝대기만 한다. 들쥐의 쫄깃한 뱃살이나 통실한 개구리 다리 살을 빈 부리 속으로 넣어 주던 일도 줄이고, 어미 부엉이는 새끼의 어설픈 독립의 몸짓을 가슴으로 지켜본다. 며칠 후, 어미 부엉이는 홀연히 떠났다. 모진 비바람과 천적의..

좋은 수필 2022.07.31

멸치/이윤경

멸치/이윤경 택배로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곱게 쌓인 보자기를 풀었다. 나무로 된 상자 속에는 얌전하게 한지를 깔고 은빛 멸치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묵직하고 반듯한 나무상자 속에서 멸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앙다물고 누워있다. 흠 없고 온전한 은빛 비늘 사이로 물을 튕기며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멸치들은 나무 상자 속에서 줄까지 가지런히 참하게 서있다.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바짝 긴장된 자세를 취한 멸치 떼가 내뿜는 은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바다에서 식탁까지 파란의 먼 길을 헤엄쳐온 놈들 치고는 지나치게 꼿꼿하고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다. 이놈들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저리 온전하게 제 몸을 건사한 걸 보면. 그물에 걸려서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서로를 옥죄고 그..

좋은 수필 2022.07.30

능소화 / 김애자

능소화 / 김애자 임금과 하룻밤을 지낸 소화라는 후궁의 기다림이 꽃이 되었다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는 귀한 꽃이지만 지금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출처도 분명치 않은 능소화 한 그루가 대문 옆에서 똬리를 틀더니 곁눈 한번 주지 않는 향나무 허리를 뱀처럼 휘감는다. 목걸이를 한 암캐의 부러움을 딛고 하늘을 감을 태세로 올라가는 줄기마다 처녀의 볼기짝 만한 꽃잎이 요염하게 웃는다. 6월이 되면 능소화와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집 안에서 얌전히 피라고 줄기를 담장 안으로 옮겨 놓으면 잽싸게 문밖으로 나가 서성거린다. 까치발로 목을 빼고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 소리 없이 떨어진다. 한 여름의 태양을 이고 의기양양하게 떨치는 능소화의 화려함은 여인네의 치마 속까지 무단횡단하며..

좋은 수필 2022.07.29

장마 / 심선경

장마 / 심선경 비 내리는 날은 낮부터 불콰하게 취하고 싶다. 어쩌면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니라 무료한 나의 나날들일 것이다. 비에 젖어 한결 선명해진 원고지 칸 같은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다. 서툴고 어설픈 보행으로 비틀거리며 잘못 써온 일상들이, 빗물을 게워내는 보도블록처럼 울컥울컥 솟구친다. 이런 날은 병원 진료 때 의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장 난 몸이 낡은 가죽 부대 속에서 삐져나와 뼛속까지 침투한 통증을 슬그머니 건네주고 간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내 좁은 시야로는 그 큰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용을 쓰다보니 온몸과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린다. 장마철 소나기는 항상 비를 피해 뛰는 내 발걸음보다 먼저 당도했다. 삽시간에 빗줄기는 시야를 가린다. 시커먼 먹구름 사..

좋은 수필 2022.07.29

벌레 먹은 잎을 읽다/권정희

벌레 먹은 잎을 읽다 권정희 비바람 부는 날에 나무들이 몸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뭇잎들 울음을 찔러 넣은 채 바닥 위로 눕는다 묵묵히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잎 사이로 팽팽한 어둠 같은 침묵이 맴을 돈다 여리고 성한 잎들의 순서 없는 낙하행렬 바람이 지나가고 비조차 그친 후에 빈집처럼 남겨진 시리도록 맑은 하늘 그 아래 고요히 떠는 벌레 먹은 잎을 본다 남아도 그만이고 떠나도 그만인데 뜯기고 터진 몸을 얼레설레 곧추세워 햇살에 제 몸 말리며 반짝이는 저 빈생 무겁게 다가서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살아야지 버텨 보는 혈맥에 피가 돈다 구멍 난 잎사귀마다 얼비치는 어머니

좋은 수필 2022.07.25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점등인이 켜는 별 / 이정화 어스름이 마당을 기웃거린다. 길 잃은 개인지 어린 고라니인지 모를 짐승이 살금살금 뜰을 건너온다. 길고양이 한 마리 담을 넘어 골목 저쪽으로 사라진다. 맞은편 산자락이 천천히 제 능선을 지우면서 어둠이 사위에 드리운다. 딸깍, 저녁의 처마에 낡은 등불을 켠다. 부엉이 울음소리, 쓰르라미 부비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밤의 교향곡 선율을 따라 시냇물 소리도 넘실거린다. 주근깨 같은 별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밤하늘을 수놓는다. 저 별빛 중에는 수억 년을 달려온 것들도 있겠다. 시간의 장구한 길이를 가늠하자니 먼 빛이 더욱 아득해진다. 내 삶은 등 하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린 그와 나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세찬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

좋은 수필 2022.07.15

나무 이야기 / 이성복

나무 이야기 / 이성복 수주일 전 아내와 동네 뒷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내려오는 길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밑둥치에 녹슨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현수막 같은 것을 걸만큼 높은 위치도 아니었는데, 거기 왜 그렇게 많은 쇠못이 박혀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손으로 그 못들을 잡아 돌려도 꿈쩍도 않아, 길 옆 돌 부스러기를 집어 못과 못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 가운데 몇 개는 빠져 나왔다. 남은 대 여섯 개의 녹슨 못은 나중에 장도리를 가져와 뽑아 줘야지 하고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 약속이 되살아난다. 또 어느 해 가을인가는 묘사를 지내러 고향 선산에 올랐다가 녹슨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소나무 몇 그루를 보았는데, 비록 야산이기는 했지만 꽤 깊은 산중에 누가 무슨 ..

좋은 수필 2022.07.09

다듬이질/이진영

다듬이질 이진영 베란다 한 쪽켠에 다듬잇돌이 먼지를 듬뿍 안고 있다. 올려져 있던 화분마저 실내로 들여놓았으니 빈 몸으로 겨울을 난 것이다. 왠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한 물을 떠다가 닦아주었다. 증조할머니 새색시 적에 좋은 돌을 골라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특별이 맞춰온 다듬잇돌이란다. 대청 한 켠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안방마님 못지않게 당당했던 자태가 눈에 선한데, 톡톡하게 세간구실을 하던 과거의 영광은 이젠 혼방섬유나 스팀다리미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수십 년 모진 매를 맞았음에도, 이제는 화분받침대 역할에 만족해야하는 수모에도 어느 한 구석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나마 할머니의 유품이기에 아파트 베란다 한 켠에..

좋은 수필 2022.07.05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나희덕 지금도 고향, 하면 탱자의 시큼한 맛, 탱자처럼 노랗게 된 손바닥, 오래 남아 있던 탱자 냄새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뾰족한 탱자 가시에 침을 발라 손바닥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생각이 난다. 가시를 붙인 손으로 악수하자고 해서 친구를 놀려 주던 놀이가 우리들 사이에 한창인 때도 있었다. 자그마한 소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탱자 가시에 찔리곤 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한번은 가시 박힌 자리가 성이 나 손이 퉁퉁 부었던 적이 있다.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탱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찔레꽃, 장미꽃, 아카시아…… 가시를 가진 꽃이나 나무들을 차례로 꼽아 보았다. 그..

좋은 수필 2022.07.02

양푼 예찬 / 이은희

양푼 예찬 / 이은희 가스 불에 찻물을 올립니다. 그의 온몸은 금세 열로 펄펄 끓어 오릅니다. 주위에서 무어라 저지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파란 불빛 하나에도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떱니다. 파편이 여기저기에 투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붉은 깃발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성난 투우 같습니다. 머지않아 파란 불 빛과 함께 싸늘히 식어갈 체온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직한 바보인가 봅니다. 그런 그의 무모한 열정이 꼭 나를 닮은 듯하여 이따금 두려워집니다. 그의 집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립니다. 차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찾아 빠르게 찾아 나섭니다. 국그릇 두 배 크기, 겉과 속은 한 가지 빛깔인 황금색입니다. 그러나 연륜은 못 속이나 봅니다. 가장 평평한 자리인 배가 얼룩덜룩 검..

좋은 수필 2022.06.16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 권남희 무는 잘 보관해야 한다. 신문지에 꼭 싸서 두어도, 비닐 랩으로 싼 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뒤 잘라 보면 바람이 들거나 물러 있다. 무는 양상추나 샐러리 등 비싼 야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때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국물이나 매운탕을 시원하게 맛낼 때나 생선 찜, 갈비찜, 설렁탕에 곁들여 먹는 큼직한 깍두기, 갈비집에서 빼놓지 않고 내놓는 무채, 초절임 무쌈, 포기김치 담글 때 켜켜이 박는 무채 등 갖가지로 변신한다. 대충 보관해 두었다가 괜찮겠거니 하며 요긴하게 쓸려고 꺼내 보면 겉모습은 틀림없는 무인데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솜방망이가 되어 있다. 꼭 무로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나는 경우에 무는 그렇게 망가져 있다. ..

좋은 수필 2022.06.16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비린比鄰구멍 / 허숙영 도시의 뒷골목을 걷는다. 누군가 마주치면 몸을 옆으로 돌려 게처럼 걸어야 할 것 같은 이 길이 낯설지 않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접든지 높이를 달리해야 비켜갈 수 있다. 퀴퀴한 하수구 냄새 진동하는 골목에는 허드렛물이 홈통을 타고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일도 예사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자유시간'이란 과자 봉지는 뜯겨 자유는 하수구를 따라 흘러가 버리고 시간이란 글자만 뎅그러니 맨홀 뚜껑에 걸려 있다. 이 골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일 테니까. 하루 종일 해도 들지 않고 낮고 음습한 지대, 부엌 하나 방 하나가 대부분인 이곳에는 질병에 익숙해진 노인들이 참으며 살아간다. 대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

좋은 수필 2022.06.16

황혼 / 설소천

황혼 / 설소천 석양이 창가에 머물러 있다. 저토록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따라 왜 이다지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내 눈에만 그럴까. 말없이 저무는 것에 대한 고통을 잠시 엿보았던 때문일까. 구순이 까까운 사람 중에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가게 오랜 단골인 이천댁과 섭이 할매는 그렇다. 내가 처음 가게를 시작한 때부터 두 분을 알고 지냈으니 수십 년 세월만큼 안면이 두텁다. 이웃에게 듣기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동네로 시집왔다고 한다. 평생을 제 자리에서 동네를 지켰으니 마을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천댁은 누가 봐도 복 많은 사람이다. 부잣집 맏며느리에 살림은 풍족했고 자식들은 건강했다. 잘 자란 자식들이 공부도 잘해 남들은 삼수, 사수해도 ..

좋은 수필 2022.06.13

신발 / 이복희

신발 / 이복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사진 한 장. 다리 난간 안쪽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에 눈이 시리다. 한강에 투신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존재했었다는 마지막 증표였을까. 아니면 삶의 미련을 내려놓듯 벗어버린 것일까. 그것을 보며 굳이 속내를 짐작해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신발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은 눈물겹고 쓸쓸하다. 그러나 또 한편, 그 광경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마치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흔연하게 벗어놓은 것처럼. 신발을 벗는 일은 그저 일상인 줄 알았다. 저렇게 삶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삶을 내던지며 남겨놓고 떠난 신발이 어떤 이에게는 생의 애착과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내 신발이 없어” 병고에 갇혀 일상을..

좋은 수필 2022.06.10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허석 ​ 푸르스름한 동살이 담장을 넘어서나 보다. 아랫목 군불 열기가 아직 후끈거리는데도 창호지 너머로 벌써 마당 쓰는 소리 들려온다. “싸르륵 싸르륵” 새벽 강가에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 햇살 알갱이거나 싸락눈 굴러가는 댓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싸리 비질 소리가 곧 여명이고 천명의 시간이 된다. 희붐한 빛줄기가 들자 마당의 민낯이 보자기처럼 펼쳐진다. 그 새벽의 마당은 언제나 집안 가장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외삼촌이, 고모부가 그 자리에 동바리처럼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가, 그리고 또 그 아들이 장대비를 넘겨받았다.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있던 뒤란이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대문을 향한 앞마당은 아버지들의 ‘터’이자 ‘품’이었던 셈이다. 이른 아침에 마당을 ..

좋은 수필 2022.06.08

부엌궁둥이/강돈묵

부엌궁둥이/강돈묵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유년이 고향 집에 가 있다. 산골짜기의 눈을 끌어안고 내려온 바람이 텃논 가운데의 짚가리에서 한바탕 상모를 돌린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락가락 몰아치는 눈발. 바람의 궤적이다. 깃털을 헤집고 달려드는 바람을 밀치며, 짚뭇에 앉아 나락을 찾는 산새들이 신이 났다. 그들이 한참 놀다 간 후 차분히 볕이 내려앉는다. 해가 중천을 지났지만 바람이 역시 차다. 태어나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여러 형제 중에서 엄마의 속을 가장 썩였던 자식이었다. 자주 골을 부렸고,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한 고집했던 기억도 난다. 한편 부지런하여 가만히 쉬는 적이 없었다. 산에 올라 토끼를 잡아들이고, 장끼를 허리춤에 달고 내려왔다. 심지어 짚가리에 내려온..

좋은 수필 2022.06.05

고무장갑/송종태

고무장갑/송종태 인연이란 무엇인가. 살다가 정이 들면 인연이라 하는가. 숙명처럼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 부르는가. 덩그러니 홀로 나동그라진 세상에서 새 친구를 만났다. 때론 아내 같고, 때론 스승 같은 진솔한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은 위안이요. 감치는 행복이다. 새 친구를 통하여 마음을 도스르고 겉치레뿐이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 친구인 고무장갑을 끼고 나면 더럽다는 고정관념이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복싱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사각의 링에 선 모습처럼 당당하였고,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음식물을 토해 놓은 지저분한 상황에도, 묽은 변이 변기 밖으로 너저분하게 얼룩져 냄새를 풍겨도, 공무장갑만 끼면 만사형통이다. 두려움도, 더러움도 모두가 해결된다. 그럴 때마다, 고무장갑에게 감사의 마음이 ..

좋은 수필 2022.06.05

그을음/임병식

그을음/임병식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마루에 누운다. 집안에 배어 있는 오래된 냄새에 섞여 부드러운 촉감이 등줄기로 스며든다. 마당은 후끈 달아오른 햇살이 넘실대고 마루 위는 시원한 바람이 앉아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마루는 가슴을 열어 놓고 주말에만 오는 발길을 기다린 듯, 들에서 일하느라 늘어진 몸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천장에는 서까래가 투박한 몸짓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친정 집은 반백 년이 훨씬 지났다. 서까래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지문이 그을음 속에 묻혔다. 하얗게 칠했던 회벽도 시간의 더께가 묻어서 검게 변했다. 처마 밑, 기둥, 창호지를 바른 문살, 집안 곳곳에 그을음이 진득하게 앉아 있다..

좋은 수필 2022.06.05

갯벌/전해미

갯벌/전해미 신선한 공기가 나의 폐부 깊숙이 들어와 요동을 친다. 요양 차 고향에 내려서니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라는 작은 읍이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청정지역이라 펄 속에 사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천혜의 땅, 지명보다는 꼬막이라는 생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벌교는 포근한 안식처로 나의 유년시절의 그리움이 탱글탱글 영글어 있는 곳이다. 비릿하고 찐한 갯내음이 바닷바람에 실려 온 몸을 휘감는다. 고향 냄새이자 엄마의 포근한 품 속 냄새이다. 드넓은 펄 밭이 펼쳐지는 곳에 갯가를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난다. 펄 밭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갈대가 양 옆으로 줄지어 우거져 있다. 젖가슴과 같은 보드라운 진흙의 손맛은 갈대의 정화작용 속에 살아 숨 쉬는 바다가 된다. 조석으로 들고나는 ..

좋은 수필 2022.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