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쇠물고기 / 홍윤선

쇠물고기 / 홍윤선 화장실이 부뚜막 같다. 수선사 주지 스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우소나 뒷간이 주는 절집 인상이 여기서는 무너진다. 실내화가 얌전히 놓였는데도 맨발로 들어가는 이가 적지 않다. 옆으로 길게 뻗은 화장실 창은 거치적대는 바깥경치를 잘라내 액자가 되고, 근심을 푸는 속인은 틀 안에 들어온 풍경화를 제 것인 양 누린다. 고졸한 대웅전이 살림집 안채 같고 곳곳에 놓인 돌그릇이며 고른 잔디와 소담한 연못은 한옥 마당처럼 인정스럽다. 신들의 집이 예사로워 오히려 신성하다. 그리 높지 않아도 산바람이 있어 지글거리는 도시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눈앞에 놓인 첩첩의 산을 바라보며 해를 피해 앉았는데 희미한 풍령 소리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지리산 웅석봉 자락, 변두리 작은 사찰, 거기 추..

좋은 수필 2022.11.12

파경(破鏡) / 조정은

파경(破鏡) / 조정은 토요일 오후,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에서 철학자들의 현상학에 관한 컬로퀴엄이 있었다. 이 학회의 회장인 지인의 초대로 참석은 했으나 흥미를 기대하진 않았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토론이라지만 비전문가인 나로선 이해도 쉽지 않을 테고 골치 아플 게 뻔했다.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니 뒷자리 하나 채워주다가 슬쩍 빠져나오리라는 생각이었다. 강당으로 들어서자 참석자가 몇 안 되어 일단 놀라웠고, 나 빼놓고는 모두가 전문가들이란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주제발표자는 전북대 심혜련 교수로 이란 제목이었다. 이 재미없는 제목은 또 뭔가, 하여튼 철학가들이란 은유를 몰라요, 시큰둥하게 앉아서 발표자의 목소리보다 빠르게 인쇄물을 읽어나갔다. 나는 어느새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포스트 디지털시대’라는 ..

좋은 수필 2022.11.02

봄, 수목원을 읽다/윤승원

봄, 수목원을 읽다/윤승원 봄, 수목원은 만연체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화려한 문장을 쓰느라 술렁거린다. 노랗고 빨갛고 흰색깔들이 나의 독서를 유혹한다. 나는 청명의 안개 속을 걸어 만화방창 꽃의 문장 속을 들어간다. 병아리 깃털 같은 햇살이 민들레처럼 피어나는 낮 시간도 좋고, 청자빛 하늘이 노을로 채색되는 저녁 무렵도 좋지만 나는 푸르스름한 이내가 깔린 여명의 수목원을 좋아한다. 제비꽃, 족두리풀, 목련, 명자꽃들이 새 명찰을 달고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듯 손을 흔들고 서 있다. 문고판 같은 야생화며 전집류의 나무들이 수목원도서관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이 푸른 도서관의 사서는 잠시 출타중인 모양이다. 바람이 먼저 책을 읽으려는지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나는 서둘러 달려온 마음을 옆에 ..

좋은 수필 2022.10.21

어미쭈꾸미 / 조현숙

어미쭈꾸미 / 조현숙 나는 또 수족관 앞이다. 계절 음식점‘다도해’의 주꾸미 수족관은 출근하듯 드나드는 구립도서관 길목 횡단보도에 면해 있다. 수족관 옆 플라스틱 화분에는 늙은 동백나무가 기를 쓰고 피워낸 붉은 꽃송이들이 뚝뚝 떨어지면서 봄날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오늘 수족관은 새 물로 가득 채워졌다. 새로 입수된 주꾸미들이 연갈색 물방울무늬가 수 놓인 물갈퀴를 우산처럼 활짝 펼치며 헤엄을 치고 있다. 좁은 수조 안이지만 미끈한 머리로 물을 가르면서 힘차게 발을 쭉쭉 뻗치고 하얀 빨판을 하나하나 세우면서 무희의 춤 선처럼 섬세한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중 성마른 놈 몇은 여덟 개의 발로 제 몸을 칭칭 감은 채 눌러놓은 꽃처럼 유리 벽에 따닥따닥 붙어서 머리통이 부어오르도록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낚..

좋은 수필 2022.10.19

책들의 납골당 / 권현옥

책들의 납골당 / 권현옥 책들은 햇살을 어떻게 쐬는가. 사람의 눈빛과 콧김으로 쐰다. 고요히 숨어있다가도 입김을 가진 자들이 다가와 반짝이는 눈빛과 차분하거나 격정적인 콧숨을 쉬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의 체온을 따라 길을 열리고, 활자들은 영혼을 입어 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산다. 그렇게 오래토록 햇살을 쐰다. 무덤은 산과 들에서 가장 좋은 햇살을 쐬려고 명당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것도 몇 십 년. 납골당의 항아리는 햇살도 포기하고 눈비를 피하고 바람을 피해서 안전한 곳에 숨어들었지만 특별한 눈빛과 마주치기만을 기다리고는 몇 십 년일까. 숨결이 뜸한 세상을 억지로 기다리는 모습이 차다. 그렇게 사람이 남긴 것들은 존재하다 사라진다. 도서관은 화려한 전시장이고 필자의 납골당이고 책의 납골당이다. 세상은 ..

좋은 수필 2022.10.18

중고책 / 박영란

중고책 / 박영란 ​ ​ 주문한 책이 왔다. 반가웠다. 포장을 풀고 책장을 넘기니 뭔가 훅 덮쳐왔다. 담배 냄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장 갈피마다에서 일어나는 냄새는 들숨과 함께 코로 흡입되었다. 니코틴에 젖어 있는 책은 매번 머리통을 자극했다. 후각은 시각보다 강했다. 절판된 책을 애써 중고로 구입했지만, 냄새를 거두어 내지 않고는 내용에 접근할 수 없었다. 밀쳐두었다가 다시 손이 갔다가 냄새에 놀라 다시 밀쳐두기를 반복하면서. 이 불량한 책을 보낸 사람은 남자일 거라는 단정을 내렸다. '남자'라는 단정은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거풍시키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엉뚱한 한 남자의 이미지가 삽화처럼 끼어들었다. 남자는 골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무람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애연가다..

좋은 수필 2022.10.11

밀개/윤승원

밀개 윤 승 원 밀개가 딱이다. 치맛자락으로 입을 막고 고래 깊은 곳의 재를 죽죽 긁어내어 삼태기에 담았다. 식은 아궁이 재는 채마밭 거름으로 제격이었다. 밀개로 골고루 재를 분산시키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민들레 홀씨 같은 재가 폴폴 사방으로 날렸다. 봄바람에 살래살래 허리를 비트는 채마밭 정구지들이 오늘 따라 더욱 푸르다. 밀개는 고무래의 사투리다. 주로 밭에서 흙을 덮을 때나 곡식을 펴 말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농기구다. 친정에 가면 오래된 밀개가 있다. 여든이 다 된 엄마는 허리 수술 후 힘이 부치는지 내가 올 때를 기다렸다는 듯 밀개를 주며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 낡은 밀개를 잡으면 왠지 따뜻함이 밀려온다. 오동나무로 만든 울퉁불퉁한 손잡이는 세월의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

좋은 수필 2022.10.09

쟁기 / 임병식

쟁기 / 임병식 ​ ​ 등산길에서 옛날처럼 소를 몰아 쟁기질하는 광경을 보았다. 아침 일찍 시작했는지 이른 시간인데도 마른 논 두 이랑을 갈아엎고 세 번째 이랑에 접어들고 있었다. 곁에 서서 바라보니 쌓인 두둑이 정연한데, 물기가 축축하다. "이랴, 이랴" 부리는 소가 힘이 넘치는데도 농부는 연이어 다그친다. 그러니까 부리망을 쓴 소는 목을 길게 빼고 눈을 크게 한번 희번덕거리더니'이래도 내가 더딘 거야' 하는 듯 잰걸음을 옮긴다. 그러니까 몸에 매달린 쟁기의 속도도 빨라지며 상쾌한 마찰음을 내고, 보습 날에 떠 담긴 흙이 볏을 통해 위로 치솟으면서 고꾸라져 뒤집힌다. 그런 쟁깃밥이 아주 볼만하다. 이 정도의 솜씨라면 소도 농부도 상머슴이지 싶다. 옛 사람들은 머슴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쟁기질과 이엉 ..

좋은 수필 2022.10.07

멱둥구미/박모니카

멱둥구미 박 모니카 시골의 겨울밤은 길기도 하다. 먼데 개 짖는 소리 잦아들고 간혹 눈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 멀어지면 공간이 비어버린 듯 아득해진다. 그 공간을 달빛이 서성인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둥지에, 흙벽 옆에 그을릴 대로 그을린 굴뚝 위에도 달빛은 그림자를 남겨둔다. 그렇게 겨울밤은 깊어만 간다. 잠자라고 재촉하듯 건넌방에서 아버지는 헛기침을 해대지만 못 들은 척 살그머니 할머니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밤참이 생각나서다.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오지 않아 화로에 잉걸불을 뒤적이시던 할머니는 할머니를 찾아 준 손녀가 살가워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손녀를 쓰다듬어 주신다. 할머니에게는 항상 태우다만 지푸라기 냄새가 났다. 동백기름 냄새에 섞인 할머니만의 특유한 냄새였다. 조르지 않아도 할머니..

좋은 수필 2022.10.07

물미장/ 류 현 서

물미장/ 류 현 서 객주 문학관에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식솔이 먹고 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었기에 논바닥이라야 함지박만 했다..

좋은 수필 2022.10.06

틈이 말하다/김윤선

틈이 말하다/김윤선 오른손 장갑의 엄지손가락이 찐득하다. 아무래도 물이 새는 것 같다. 엊그제 샀는데 웬 일이람.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장갑을 뒤집었다. 양손으로 장갑 주둥이의 양끝을 잡고 공중에서 서너 바퀴 휙 휙 돌리자 이내 공기가 차오른다. 그런데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장갑의 한 귀퉁이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피비빅, 씨익, 작지만 강한 소리, 영락없는 바람 빠지는 소리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늘귀만한 구멍이 있다. 언제 그랬지? 아차, 어제 생선을 다듬었던 기억이 났다. 고놈, 그 새 흔적을 남겨 놓았구나. 굽기 편하게 장만하느라 생선 대가리와 지느러미를 자르는 새 허방을 찔렸다. 난감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나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삶에서 불현듯 끼어드는 틈이 이 뿐일..

좋은 수필 2022.10.06

인생소묘/이정순

인생소묘/이정순 손끝에 느껴져 오는 매끈한 촉감이 살갑다. 아득한 욕망의 해바라기로 칙칙해진 영혼을 벗겨내듯 안간힘을 주며 나무 표면을 문지른다. 여러 차례의 사포질에 떨어져 내리는 지저깨비들이 고운 채에 받힌 밀가루마냥 흩날린다. 한나절에 걸쳐 두껍게 덧칠된 껍질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나니 정맥 같은 나뭇결을 내보인 투명한 속살이 정오의 햇살에 눈부시다. 나에게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한 실핏줄이 드러나 보이던,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시절이 있었다. 오래 부려먹어 낡은 식탁을 버릴까 고민하다가 리폼해서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재료가 괜찮은 원목에다가 내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벗이기도 하다. 어쭙잖은 글을 긁적거릴 땐 책상도 되어주고, 이것저것 다양한 공예 작업을 할 때는 작업대로도 ..

좋은 수필 2022.10.06

외줄/권혜민

외줄/권혜민 줄을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줄이 무엇에 걸린 듯 크게 한번 출렁한다. 허공에 발을 헛디딘 것처럼 현기증이 인다. 무슨 변고일까. 잡은 줄을 놓고 내려다볼 수도, 소리를 질러볼 수도 없어 나는 무릎이 꺽여 푹 쓰러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를 다시 매야겠어." 얼굴이 빨개진 남편이 등 뒤에 서 있다. 줄이 흔들리며 느슨해져서 아래로 추락한 게 아닐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내 앞에 선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한다. 휘청대는 줄을 타고 어떻게 올라왔는지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여기는 오층 건물 옥상이다. 남편은 삼층 창에 매달려 간판수리 공사를 한다. 옥상 기둥에 묶여 있는 줄을 지켜보는 게 내 임무지만 고가 잘못되거나 줄이 끊어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좋은 수필 2022.10.06

신발 / 최장순

신발 / 최장순 우사牛舍를 연다. 갇혔던 냄새가 일제히 코끝으로 달려든다. 제 익숙한 길로 달려가고 싶은 것들. 오랫동안 매어 있던 탓일까, 일어서던 관절이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느 초원을 누비던 우공牛公인가. 제 살과 장기를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수많은 길을 이끌고 내게 찾아온 것들. 그들을 코뚜레에 꿰어 야전으로, 도시의 아스탈트로 끌고 다녔다. 우렁우렁 깊은 눈, 슬픔도 잠시 말뚝에 매어두고 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려간 것들. 반항은 금물, 복종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주인에게, 아니, 주인의 또 다른 상전에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이제 노쇠했다는 이유로, 주인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컴컴한 신발장에 몰아넣은 것들. 한때는 건강한 그것들이 세상의 돌부리에 채이지는 않을까. ..

좋은 수필 2022.10.06

청어의 꿈

청어의 꿈/정문숙 검은 실루엣을 벗어내며 희붐하게 다가앉는 새벽 바다다. 정박한 어선의 불빛에 반사되어 비늘 같은 물결이 반짝인다. 파도가 달려오다 일순간 사라지고 또 떼 지어 몰려오다 발아래에서 잦아든다. 파도의 여음을 들으며 해안선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과메기 덕장이 나온다. 바다에 발목 잡히고 눈이 꿰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있는 과메기들이 줄지어 있다. 마른 밥을 삼킨 듯 목이 메거나 힘에 부치는 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에는 과메기 덕장을 찾곤 한다. 그들에게도 넓은 바다를 꿈꾸며 수심 깊은 곳으로 나아가던 때가 있었을 게다. 그들에게서 박제된 나의 꿈을 읽는다. 눈빛마저 푸르던 한 마리 청어의 꿈이 아련하다. 문득 심청색의 유선형 몸체를 흔들며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던 청어처럼 바다에 ..

좋은 수필 2022.10.05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

좋은 수필 2022.10.05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꿈을 닮은 과일 복숭아/ 허은규 복스럽다고 항간에서 지칭하는 것들은 다 복숭아를 닮았다. 복스럽게 살이 올라 꼬리를 연방 좌우로 흔드는 백구 강아지, 크림빵을 한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볼이 빵빵한 꼬마아이, 남편에게 내조 잘하고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손끝이 야무진, 밥 붙은 통통한 얼굴을 한 며늘아기 등 탐스럽고 토실토실한 것들은 죄다 복숭아를 닮았다. 다른 과일보다도 유독 복숭아와 이들이 비견되는 건 복숭아의 유순한 맛, 복숭아의 몰캉한 질감, 복숭아의 묵직한 크기, 복숭아의 완만한 맵시, 복숭아의 보드란 피부 때문일 것이다. 복숭아의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과실의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길게 세로로 그어진 금이다. 일설에는 이 길게 그어진 금을 국부에 빗대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그것은 시야..

좋은 수필 2022.10.05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2.10.05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들판 끝에서 메뚜기 떼 같은 것들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아까부터 서쪽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이 한바탕 쏟아 붙는다. 소낙비다. 직립의 화살촉들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꽂힌다. 나는 호미를 내팽개치고 농막으로 냅다 뛴다. 소낙비는 마치 적의 진지를 포격하듯이 토란과 깨꽃들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팔월염천에 축 늘어졌던 깨꽃들이 임을 만난 듯 비를 반긴다. 생글생글 깨춤을 춘다. 춤이 과한 몇 잎은 통꽃으로 떨어진다. 나는 비에 갇힌 채 오도카니 앉아 비바라기를 하고 있다. 소낙비는 쇠로 만든 무기인가. 저 순연한 빗방울이 만물의 젖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세상을 쓸어가기도 하고 종내는 내 심장까지 직격하니 말이다. 불가근불가원,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존재지..

좋은 수필 2022.10.03

구절초 향기/박영희

구절초 향기/박영희 가을향기 머금은 구절초 꽃이 풀 섶에 살랑거린다. 꽃 이름을 불러 달라는 듯 구월의 느린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는체한다. 어느새 가을, 해마다 이맘때 펼쳐지는 들녘의 고적한 풍경이 내 산문에 가을의 첫 줄을 쓴다. 흰 구름과 바람과 누렇게 바래진 들풀들, 둔덕에 오롯이 피어있는 가을 들꽃이 나는 좋다. 아마도 어릴 적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부모님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작은 행복 때문인가보다. 구월이 오면 검게 탄 얼굴로 신작로를 달리던 동무들 생각이 나고 깊은 산속으로 구절초를 뜯으러 다니시던 초췌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헛간과 빈 외양간의 여물통 그리고 그늘진 뒤란에 촘촘히 펼쳐있던 우리 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집 안 구석구석 널어놓은 떫은 약초 냄새가 아직..

좋은 수필 2022.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