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불 꺼진 방 /심선경

불 꺼진 방 심선경 퓨즈가 나간 방은 삽시간에 어두운 숲이 된다. 고사목 덩치처럼 벽 한쪽으로 길게 누운 소파에 얼른 올라앉아 고개를 조아리는 내 모습은 수풀 더미 아래로 황급히 몸을 숨긴 채 웅크린 작은 산짐승의 형상이랄까.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숲을 점령한 어둠에 항거하는 것은 푸르디푸른 잎새를 기억하는 단단한 그리움들뿐이다. 때로는 바람과 몸을 섞은 나무들 서넛, 그 흔적을 애써 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군다. 지난가을, 창밖에서 활활 불타던 단풍나무는 참다못해 그 열기를 몸 밖으로 마구 뿜어내었다. 하지만 사랑의 흔적을 아무도 죄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가을 나무들이 잎새를 빨갛게, 혹은 샛노랗게 물들이는 것은 그리움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그들만의 위장술인지도 모른다. 낡은 퓨즈가 끊어져 버린 ..

좋은 수필 2023.02.26

작은따옴표 /심인자

작은따옴표 심인자 글을 다 썼다. 그런데도 개운치가 않아 미적거린다. 완전하게 마무리를 못했기 때문이다. 글자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잘못 붙여진 문장부호를 정돈해야 한다. 글을 쓰자면 문장부호가 필요하다. 잠시 쉬라는 뜻인 반점, 문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온점, 감탄할 때 쓰는 느낌표, 의문을 나타내는 물음표, 직접 대화를 나타낼 때 쓰는 큰따옴표, 혼잣말이나 속마음을 나타낼 때 쓰는 작은따옴표, 말을 줄일 때 쓰는 줄임표 등이다. 이 부호들은 적재적소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난 한 가지 부호만을 선호하여 무작정 갖다 붙인다. 고집을 없애면 편할 일을 나 스스로 만들어 힘들게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여러 부호들이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좋은 수필 2023.02.26

뚱딴지 /신성애

뚱딴지 신성애 봄날의 수목원은 싱그러움으로 가득찼다. 창포와 부들, 갈대 잎들이 물웅덩이에서 춤을 추고, 궁궁이와 구릿대가 어깨걸이 하듯 너울댄다. 풀숲사이를 비집고 나온 바람 한줄기 조심스레 뚱딴지를 흔들고 있다. 넓은 공원 구석구석 당당히 제 이름을 단 풀과 꽃들이 수런거린다. 사금파리 같은 빛줄기에 화들짝 피어난 꽃들 너머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몰려간다. 이팝나무 둥치를 잡고 빙그르르 꼬리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허기가 지는지 돗자리를 깔고 점심상을 펼친다. 햄과 계란말이 오징어무침,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재잘거리며 먹고 있는 아이를 보니 염치도 없이 배꼽시계가 꼬르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식당을 찾아 밖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시간도 아낄겸 배달음..

좋은 수필 2023.02.26

칡/신성애

칡 신성애 내리치는 곡괭이에도 칡넝쿨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쉽사리 잘리지 않는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줄기는 남자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안으로 단단하게 갈무리한 바람과 햇살이 얼마인데 호락호락 제자리를 내 줄 수 없다는 단호한 몸짓이런가. 남자는 점퍼까지 벗어던지고 곡괭이를 휘두르건만 잔뿌리에 걸려 옴짝달싹 않는다. 아무도 봐 주지 않은 산기슭 박토라도 한번 뿌리 내리면 평생을 사는 법인데 무슨 일이냐며 물기만 배어났다. 아지매는 언덕배기 웃뜸에 혼자 살고 있었다. 훤한 인물에 성격이 서글서글해 동네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어린 내가 놀러 가면 군입정거리를 꺼내주고 옛날이야기도 해주었다. 가끔씩 삯바느질하는 손길을 멈추고 나직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늘 안개비가 내린 듯 축축히 ..

좋은 수필 2023.02.26

열(熱/이현주

열(熱) 이현주 가늘고 기다란 먼지 한 올이 뺨에 내려앉았다. 무수히 많은 먼지의 촉수들이 살아서 꼼지락 대며 내 살갗을 찌르고 성가시게 했다. 먼지가 가득 떠도는 방안에서 내 몸을 숨길 방도가 없다. 온 몸에 빈틈없이 비닐 랩을 감을 수도 없고 이불을 뒤집어쓴대도 이불이야 말로 먼지의 본거지가 아니던가. 괴롭다, 이 먼지가. 아니면 피할 수 없거나 아주 작아 일상으로 흘려야 하는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가. 눈을 감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내게 들러붙은 먼지의 길이와 굵기가 가늠되고 어쩌면 그 색깔마저도 알 수 있을 만큼 곤두선 감각이 괴롭다. 며칠간의 고열 끝에 37도를 넘는 미열이 반복되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열이 자주 나서 해열제를 끼고 살았지만 열이 고통스럽다는 건 몰랐다. 열감은 일단 몹..

좋은 수필 2023.02.26

못 뽑기 /정경아

못 뽑기 정경아 섬뜩하다. 예리한 무엇에 찔린 듯 온몸의 촉수가 살아난다. 아궁이의 재를 퍼내다 말고 나도 모르게 멈칫, 손을 멈추었다. 웬 못이 이리도 많은가. 시뻘겋게 녹이 난 것, 구부러진 것, 두 동강이 난 것, 대가리가 떨어져나간 것 등이 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궁이의 재를 퍼다 부추 밭에 뿌려 주려 했는데 이대로는 거름으로 쓸 수도 없겠다. 생각해 보니 집을 짓고 남은 폐목으로 군불을 지핀 결과이다. 못을 뽑아내는 것이 귀찮고 성가셔서 그냥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무는 타서 못이 박혔던 흔적조차 없이 재가 되었는데 타지도 못한 못만 뎅그러니 재 속에 남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못을 가려내지 않고는 재를 함부로 퍼다 버릴 수도 없겠다. 밭에 뿌릴 수는 더욱 없다. 지난여름 맨..

좋은 수필 2023.02.26

인연, 영원으로 빗물처럼/김규나

인연, 영원으로 빗물처럼 김규나 인생 끝까지 같이 못해서 미안해. 걸음을 멈추고 부재중 전화 후 남겨진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남자가 보낸 미안해,라는 단어를 아무런 감정 없이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도 나이를 먹는구나, 여자는 생각했다. 은량사 영탑靈塔공원을 둘러싼 숲에서 직박구리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지 끝에 앉아 의기양양, 사냥한 잠자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복화술을 하니? 삶과 죽음, 어느 편도 연민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너희들! 하고 여자가 잠시 바라보는 동안, 새는 입을 벌려 큰 소리로 또 한 번 전리품을 으스댔다. 그 틈을 노려 잠자리가 젖은 벚나무 우듬지로 숨어들었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새도 날개를 펼쳤다. 오랜 가뭄을 끝내고 가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

좋은 수필 2023.02.26

굴비/임만빈

굴비 임만빈 굴비는 굽는 냄새를 풍기면서 먹어야 제격이다. 연기 속에 숨어있는 생선굽는 비릿한 냄새가 애피타이져(appetizer)처럼 식욕을 돋군다. 변변한 반찬이 없던 시절, 굴비 하나를 구워 온 집안 식구들이 밥을 해치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굴비를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워도 옆집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다르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고 굴비의 참맛을 즐기기가 힘들어졌다. 아무리 환기를 잘해도 굴비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고 위층과 아래층으로 번지곤 한다. 아웃들은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린다. 특히 서양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런 냄새를 싫어한다. 굴비 구운 냄새가 몸에 배면 학교에서도 놀림 받기가 십상이다. 어머니가 도시생활에 ..

좋은 수필 2023.02.26

첫사랑/송혜영

첫사랑 송혜영 다 보름달 때문이다. 오랜 세월 홀로 간직한 환상이 첫사랑이라는 너울을 벗고 밤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은. 찬바람과 함께 거리에 붕어빵이 나타나면 그 남자애가 생각났다. 내가 그 애에게 가졌던 연민, 설렘, 막연한 그리움, 그리고 코끝을 감도는 시큼한 땀 냄새, 단단한 몸의 기억을 통틀어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첫사랑은 당연히 그 애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애티를 벗지 못한 나는 친구들에게 순진한 애 취급을 당했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생활화한 잡식성 독서로 인해 어설프게 사랑과 인생에 대해 제법 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꼼꼼하게 챙겨 읽은 반체제 신문은 사회, 정치적 의식을 한껏 고양시켰다. 어쩌다 남녀공학에 들어갔지만 남학생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린 것들이 어른 ..

좋은 수필 2023.02.26

그대 그리운 이여 /최명희

그대 그리운 이여 최명희('혼불'작가) 나는 봄의 강 강물을 보았다. 달도 없는 야청하늘의 검푸른 등허리에, 몇 점 별빛, 새로 돋는 풀잎 뿌리 여린처럼 눈 뜬 밤. 물 오른 어둠을 깊숙이 빨아들여 숙묵보다 더 깊어진 산능성이 반공에 뚜렷한 마루를 긋고 있는데, 그 산 그림자 품어 안은 밤 강물의 소리 죽여, 제 몸의 비늘을 풀며 아득히 가득히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돌아오는 강물이었다. 언제라고 강물이 한 자리에 서 있으랴만, 가을의 강물은 뒷모습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멀리 떠나는 강물이요, 겨울 강물은 쓸쓸히 남은 그 물의 살을 벗고, 오직 뼈만으로 허옇게 얼어붙어 극한 속에서 존재의 막투름을 견디는 얼음이다. 지난 여름, 무성하게 푸르러 눈부시게 젊고도 풍요로운 강물이 제 온 몸을 수천수만..

좋은 수필 2023.02.26

겨우살이 / 김은주

겨우살이 / 김은주 앞서 걷는 오빠의 손에 긴 장대가 들려져 있다. 장대 끝에는 낫이 묶여져 있고 장대를 움켜진 손등에 튀어나온 힘줄이 겨울하늘 아래 푸르다. 겨우살이를 꼭 구하고 말리라는 오빠의 의지가 힘줄 속에 숨어있는 듯하다. 쩡쩡한 겨울하늘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쩍하고 금이 갈 것 같다. 오빠는 낮은 구절초 두어개 꺾어 눕히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오르고 있다. 그 발자국에 도장이라도 찍듯 내가 따라 오르고 있다. 땅에 닿은 장대가 마른 겨울 산에 길게 홈을 판다. 생채기 같은 그 홈이 내 가슴으로 걸어 들어와 마른 먼지를 일으킨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도통 가늠이 가질 않는다. 봉화 어느 산자락인 것 같은데 가도가도 참나무 군락지는 보이지 않는다. 두꺼비 등짝처럼 이마에 땀이 돋는다. 고개를 ..

좋은 수필 2023.02.26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목포 바다에 갈치가 터졌다는 소식이다. 태풍이 한차례 바닷물을 뒤집어놓아 물고기들의 이동에 낚시꾼들은 이미 들떠 있다. 밤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야 없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끈들을 잠시나마 벗어 던지고,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에 자신을 풀어놓고 하룻밤쯤 있으면 삶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기회는 쉽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낚시 동행 광고를 내었지만 태공들은 한결같이 옆에 있으면 조황에 방해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방법은 따로 있었다. 초보도 가능한 낚싯배가 있다는 것이다. 뱃삯만 지불하면 미끼는 물론 낚싯대도 빌려준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낚싯배 신청을 하고도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생겼고 또 태풍에 미루어졌다가 겨우 나의 시간에 맞추어 출조일을 잡았다. 난생처음..

좋은 수필 2023.02.25

소리꾼 / 최병영

소리꾼 / 최병영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소리꾼이 단가短歌로 마른 목을 푼다. 목청에 촉촉이 물기가 어리자 이내 본 사설로 넘어가면서 아니리부터 내놓는다. 소리꾼이 열린 소리로 세상을 열어간다. 세월처럼 닳아버려 오히려 새로운 옛 소리를 끌어낸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물혹으로 굳어진 사연들을 올올이 풀어낸다. 질그릇처럼 투박하게 쇤 성음聲音이 거침없이 시공을 넘나든다. 갖가지 사연이 가닥마다 빗장을 풀고 새로운 소리로 태어난다. 그것은 말 못하고 가슴앓이로 살아온 민중의 고통 어린 삶의 소리다. 그것은 득음만을 위해 불나방처럼 살아온 소리꾼의 한 맺힌 절규의 신음 소리다. 소리꾼의 걸쭉한 소리가 소리판을 굴렁쇠처럼 구른다. 소리꾼이 농주처럼 탁한 성조로 질펀하게 세상을 풍자한다. 전라도 깊은 산골에 오롯이..

좋은 수필 2023.02.24

자산어보의 독백 / 김희숙

자산어보의 독백 / 김희숙 나는 나이든 책이라네.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제대로 나를 들춰가며 읽은 이는 드물 게야. 사람들은 지은이가 정약전 선생이라는 정도는 알겠는데 그저 바닷물고기나 해초류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겠거니 여기는 눈치더군. 어스름이 깔리는 파장 무렵, 눈알이 흐릿해진 어물전 생선처럼 한물간 고서 취급을 당하고 있어서 더러는 서러운 마음까지 들곤 하지. 그래서 아직은 붉은 아가미가 펄떡이는 팔팔한 현역임을 밝혀보려 한다네. ​ 내 고향 흑산 사리마을 자랑부터 좀 해야겠지. 마을에 들어서면 작은 알돌과 편편한 호박돌을 번갈아 쌓아올린 나지막한 돌담이 먼저 눈에 띈다네. 자로 잰 듯 반듯하진 않아도 어지간한 태풍에도 꿈쩍하지 않는 단단한 담이지. 높이가 어른 허리를 넘..

좋은 수필 2023.02.14

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황당한 일이었다. 절망이 곤두박질쳤다. 속상함도 사치였다.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채 멍해졌다. 내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기다니? 불난 뒤의 매연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오염시키는 노년의 비애.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 불을 켰다. 물이 물방울을 뿜어 올리며 끓기 시작했다. 준비한 나물을 넣었다. 오줌이 마려운 신호가 살짝 왔다. 나물을 다 삶아 건져놓고 화장실을 가도 될 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리 급한 요의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심한 재채기가 났다. 소변이 찔끔 고개를 내밀었다. 곧 숨어들겠지 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통까지 불쑥 밀고 나왔다. 못된 것은 내 의지의 한계를 넘어 나를 비웃듯 폭포로 쏟아졌다. ‘아! 이게 뭔가?’ 그 자리에 서서 망연자실했..

좋은 수필 2023.02.09

쉼표 / 고미영

쉼표 / 고미영 난 글을 쓸 때 쉼표를 거의 안 쓴다. 지루해지지 않는 문장을 낳으려고 노력하다보니 만들어진 습관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인정미가 없어 보인다. 기계처럼 글을 조작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밀고 당기는 탄력성이 있는 글이 되기를 원하는데 고집스럽게도 내 글쓰기는 일방적이다. 알면서도 안 되는 논리에 붙잡혀서 헤어 오지 못한다. 이런 내가 싫어서 탈피해보고자 시도를 하는 날은 한 줄도 완성하지 못한다. 그만큼 무서운 게 습관이란 것을 손과 눈으로 확인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내 글쓰기가 퍽퍽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과도할 정도로 쉼표를 사용했다. 능숙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몰라서 헤매다 결국은 남발했다. 무조건 쉬고 보자는 의미에서이다. 쓰는 내가 힘이 드니 ..

좋은 수필 2023.02.08

생짜배기/박종희

생짜배기/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파여 있었..

좋은 수필 2023.02.05

잔 소 리/안병태

잔 소 리 안병태 아내가 야간에 외출을 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구태여 마당으로 쫓겨나 담배를 피울 필요도 없고, 뉴스냐 연속극이냐 따위로 가위 바위 보를 할 일도 없고, 아무 곳에서나 머리를 빗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가끔 외박을 한다는 것은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다.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새벽에 들어간들 잔소리하는 이가 없어 좋다. 대보름이나 백중 같은 날 갓바위부처 앞에서의 철야기도는 왜 하룻밤만 하고 치우는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소원을 빌러 간 걸음, 여러 밤을 지새우면 부처님께서도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특별히 눈여겨봐 주실 것을…. 다행히 막내 입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는 몇 번 더 외박을 할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철야불공, 그 애의 입시가 끝나더라도 꾸준히..

좋은 수필 2023.02.04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압곡사에 닿으러 가는 길. 이 길은 길과 잇닿아 자리한 절집을 닮았다. 널찍하기보다 조붓하고 웅장하기보다 아담하며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거친 시멘트로 바퀴가 지나갈 만큼만 바닥을 다졌다. 산이 주는 그대로 나무를 비끼고 구불 거리며 오르막내리막으로 닫는 길은 딱 압곡사를 위하여 닦아놓은 산속의 마침맞은 트임이다. 간혹 마주 오는 차를 만 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 갇히고 마는 길. 설혹 마주치게 된다면 여유가 되는 길목 그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올 라간다. 압곡사는 나무오리가 날아가 앉은 곳에 지었다는 설이 내려온다. 의상대사는 나무오리 드론을 띄워 산세를 살피고 풍광 좋은 자리에 아담한 절을 앉혔다. 절집 마당에서 봉우리와 능선이 물결치는 멈춤을 바라다보면 누구나 그곳..

좋은 수필 2023.02.04

문병 유감 /안병태

문병 유감 안병태 성의는 고맙지만 문병 좀 오지 마라. 문병을 왔으니 응당 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사연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없는 시간 할애하여 문병해주는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성의껏 대답해야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 말이지, 발병 원인으로부터 작금의 와병용태까지를 매번 브리핑하기에도 이젠 지쳤다. 오죽하면 녹음기를 이용할까 조차 생각했으랴. 했던 방송 또 하고 했던 방송 또 하다 보니 숫제 병상일지를 줄줄 외우겠다. 훈장들 강의가 괜히 유창한 게 아닌 모양이다. 나중에 문병 아니 왔다고 절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제발 문병 좀 오지 마라. 방금 한 팀 보내고 들어와 겨우 눈 좀 붙이려는데 또 들이닥치면 어쩌란 말이냐. 떼로 몰려와 병실이 비좁도록 북적거리니 이웃 병상 환우들 보기에 민망스럽다...

좋은 수필 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