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카오스적 생존기 / 문경희

카오스적 생존기 / 문경희 각다분한 오늘을 언어의 춘추전국시대라 일컬어보랴. 자판기를 굴러나오는 캔음료처럼, 각양각색각미의 신어가 뚝딱뚝딱 창조된다. 귀로, 눈으로 채집되는 그것들은 막 잡아올린 생선처럼 내 안을 퍼덕거린다. 입보다는 SNS라는 소통의 창구에서 주로 애용되는 그들의 말맛은 새콤달콤쌉사레. 그것은 한때 청춘이었던 기성세대를 낡고 닳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규정지어버리는, 돌도 거뜬하게 소화시킬 MZ세대들의 입맛에서 비롯되었을지니. ​나는 아주 가끔 그것들을 씹고 뜯고 맛보지만 피와 살로 체화하지는 못한다. 그들과 나 사이의 아뜩한 불능의 거리는 야릇한 자괴감으로 채워지기도 하나니.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그들, 불편유발자를 겨냥하여 유치하게 꿰맞춘 '아무말대잔치'라 구어박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3.01.29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가족에게 마음 전하고 싶은 날에는 생선을 굽고 싶어진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사과하기 쑥스러울 때, 미안한 줄 알면서도 그냥 덮어버리고 싶을 때, 유난히 사랑스러워 더욱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생선가게로 간다. 이런 날은 가시가 많은 생선을 고른다. 주로 갈치, 꽁치, 조기, 가자미다. 간이 알맞게 밴 생선이 속까지 잘 익도록 노릇노릇하게 구워 식탁에 올린다. 식구들이 수저질을 하는 동안 가시를 발라낸다. 생선의 참맛은 대가리에 있다고 했던가. 일단 대가리를 떼서 살을 살살 긁어낸다. 등뼈를 통째로 발라내며 갈비뼈도 걷어낸다. 지느러미 부분에 달린 참빗 같은 가시들도 순끝을 따라 쏙쏙 빠져나온다. 생선 가시를 발라내는 데는 이력이 났다. 살점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것은 ..

좋은 수필 2023.01.28

막사발 / 류영택

막사발 / 류영택 봉긋한 모양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건조대에 엎어놓은 막사발이 여인의 젖가슴 같아 보인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는 그릇이 담겨 있었다. 이게 웬 건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누가 빼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엣말로 선물 받은 것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럴 때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면 좀 좋을까. 그릇을 살피다말고,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며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지 환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졸지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버렸다. 쪽 째진 눈으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빛을 피하느라 얼른 그릇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고급스럽다거나 품..

좋은 수필 2023.01.27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은..

좋은 수필 2023.01.27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 /허정진

마당, 그 평화롭던 날들 /허정진 푸르스름한 동살이 담장을 넘어서나 보다. 아랫목 군불 열기가 아직 후끈거리는데도 창호지 너머로 벌써 마당 쓰는 소리 들려온다. “싸르륵 싸르륵” 새벽 강가에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 햇살 알갱이거나 싸락눈 굴러가는 댓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싸리 비질 소리가 곧 여명이고 천명의 시간이 된다. 희붐한 빛줄기가 들자 마당의 민낯이 보자기처럼 펼쳐진다. ​ 그 새벽의 마당은 언제나 집안 가장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외삼촌이, 고모부가 그 자리에 동바리처럼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가, 그리고 또 그 아들이 장대비를 넘겨받았다.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있던 뒤란이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대문을 향한 앞마당은 아버지들의 ‘터’이자 ‘품’이었던 셈이다. ​ 이른 아침에 ..

좋은 수필 2023.01.19

시련 2 / 김영관

시련 2 / 김영관 마침 일요일이었다. 강릉에서 새벽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보름 동안 비워둔 집은 엉망이었다. 종일 청소에 매달렸다. 아이도 쌕쌕거리며 잠을 자고 오랜만에 집사람이 해주는 하얀 쌀밥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젠 살 것 같았다. 이것이 사는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집사람은 저녁밥을 몇 술 뜨지 못했다. 난 머릿속이 복잡했다. 보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마음고생이 심해서일까, 아니면 어디가 큰 탈이라도 났단 말인가? “소화제 사 올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겨울 동 잠바를 걸치고 면 소재지로 뛰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겨울 강원도 산간 밤바람은 상상 그 이상으로 차가웠다. 약방에서 활명수 한 병과 소화제 몇 알을 사서 문을 나서다 옆 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좋은 수필 2023.01.16

시련 1 / 김영관

시련 1 / 김영관 1975년 시월이었다. 나는 근무지를 울산시 언양면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산골이라 쉽게 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일을 갓 넘긴 아이와 산후조리가 부실한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향했다. 어렵사리 농가의 문간방 하나를 구했다. 시월 하순인데도 대관령 산골의 밤은 남쪽에서 듣고 온 것보다 훨씬 추웠다. 낮 기온은 15도까지 올라갔지만, 밤 기온은 영하 3도까지 내려갔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 보온이 부실한 농가 문간방은 어른도 견디기가 버거웠다. 아이가 이틀째부터 기침을 시작했다. 진부면에는 병원이 없었다. 약방에서 약을 사 먹였지만, 기침은 점점 심해갔다. 코일형의 전기난로를 샀다. 밤낮없이 아이의 곁에 난롯불이 켜져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아..

좋은 수필 2023.01.16

망부전상서 / 김용삼

망부전상서 / 김용삼 “나를 매장하지 마라…….” 또 시작하신다. 몹쓸 병으로 자리보전하신 것도 아닌데, 유언이라며 습관처럼 입에 올리시는 말씀이다. 늘 한쪽 귀로 흘려듣는 내가 못 미더운지, 오늘은 종이에 펜까지 내밀며 받아쓰라신다. 난감하다. “유언장은 본인이 직접 써야 효력이 있는 거래요.”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그제야 ‘아차!’ 싶다. 당신께서 한글에 서툰 처지임을 깜빡한 것이다. 어머니는 떠듬떠듬 읽고 쓰기는 하지만 받침 있는 글자는 아직도 극복을 못하신다. 상황을 모면한다는 것이 당신의 아픈 곳을 건드려버린 셈이었다. “너거 아부지 전쟁 나갔을 때도 위문편지 한 통 못썼는데, 내 손으로 유언장을 써라 하노?” 버럭 내지르는 말씀에 역정이 묻어난다. 기어이 내 손에서 펜을 낚아..

좋은 수필 2023.01.15

우시장의 오후/곽흥렬

우시장의 오후/곽흥렬 아버지의 몸에서는 언제나 쇠똥 냄새가 배어났다. 그 냄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장철 소와 함께 방방곡곡으로 떠돌아야 하셨던 아버지의 고단한 세상살이의 체취였다. 그때 나는 그림자처럼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그 말로는 풀어내기 힘든 야릇한 냄새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너희 아버지 소 장사 한다며?” 마을의 어른들이, 어린 내가 사랑스러워 건넸을지도 모를 이 말에 쥐구멍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그래서 제법 철이 나서까지도 어딜 가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한사코 숨긴 채 살아야만 했다. 그 쇠똥 냄새가 우리 가족의 생계를 걸머메고 있던 끈이었음이,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한참이나 지나온 지금에서야 비로소 헤아려진다. 이렇듯 삶에의 깨달음에 있어 나는 늘 지각생인가 보다. 시골장의 정취..

좋은 수필 2023.01.14

명태에 관한 추억/목성균

명태에 관한 추억 목성균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 초가 부엌 기둥에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 정물화였다.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 하며 건네주는 걸 본 적 있다. 남용이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 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이강들을 건너서, 은고개를 넘어, 하골 산모퉁이 돌..

좋은 수필 2023.01.12

좌고우면/박순태

좌고우면 ​ 학생의 눈길에 미묘한 전류가 흐른다. 좌측에 시선을 보내다 살짝 머리를 숙이더니 우측으로 살며시 눈길을 돌린다. 이내 땀을 닦는 척 얼굴에 손을 올리더니 온탕에 들어오는 사람을 슬쩍슬쩍 훔쳐본다. 관찰자를 관찰한다는 심정이 되어 그의 시선 따라 생각이 몰린다. 신체 부위 하나가 감상대상이다. 해바라기 형은 기본이고, 곡선이 선명한 가락지형, 도깨비방망이형, 이빨 빠진 톱니바퀴형, 수탉 볏형 등으로 디자인되어 다듬어졌다. 조물주가 같은 사용도로 내린 선물일진데, 가지각색이다. 난이도 조정이 따라야 하는 실물 감상이다. 고정화된 예술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는 평면적 느낌 정리라면, 지금 눈앞의 실물은 즐기면서 이해하는 입체적 평가이다. 소지자는 물론 그 애용자의 심중에까지 다가가야 한다...

좋은 수필 2023.01.07

변비 체험기/정호경

변비 체험기 정호경 30년 전이라면 아득한 옛날이다. 그때 뜻하지 않은 위암을 만나 위장을 송두리째 들어내 버렸다. 밥을 두어 숟갈 떠 넣고 나면 물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대신한다더니 역시 위장이 없으니 대장(大腸)이 대역을 하여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내 체중은 50킬로가 커트라인이었으니 몸이 가벼워서 구두창이 닳지 않아 가정경제에 다소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 고통과 불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여자였다면 그런 다행이 없었겠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날씬함보다 목숨이 걸려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음식물을 소화 시킬 위장이 없고 보니 걸핏하면 설사를 만나 활동이 조심스로웠다. 나는 '양띠'라서 원래 물을 경계했지만, 밥이 많이 들어가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수필 2023.01.07

돈꽃 / 문경희

돈꽃 / 문경희 누군가의 위험천만을 목적지로 찍고 왔다. 타인의 불행을 내 행복의 척도로 삼겠다는 심사는 고약하지만, 오늘을 보기 위해 며칠을 손꼽았다. 그가 연출하는 백척간두의 순간을 함께 출렁이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삶의 들메를 다잡아보고 싶었다. 공터는 이미 삼현육각의 신명으로 들썩이고 있다. 켜고, 불고, 두드리고, 인간과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로 주추를 놓고 지붕을 올린 소리의 성채 하나가 장대하게 일어선다. 내 안에서 나달거리던 소리들이 화답을 하는 건지, 두서없이 심장이 쿵쾅거리며 걸음이 빨라진다. 한껏 데시벨을 높인 소리의 휘장을 열어젖히고 공터의 왁자함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소리가 예열해놓은 분위기를 밟고 자그마한 체구의 줄꾼이 등장한다. 이마를 질끈 동여맨 무명천 위로 가볍게 얹힌 패..

좋은 수필 2023.01.07

이끼, 꽃으로 피어나다 / 허정진

이끼, 꽃으로 피어나다 / 허정진 오래된 시골집이다. 처마 밑에 제비집처럼 한때는 올망졸망한 식구들 들썩거리며 살았던 곳이다. 새벽을 알리는 장닭 울음소리, 아래채 가마솥에는 소 여물죽이 끓고, 매캐한 연기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정지문 사이로 쿰쿰한 청국장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뒤란 대숲을 출렁이며 바람이 지나가면 수다스러운 참새 떼 마당으로 몰려왔다가 한꺼번에 지붕 위로 날아오르곤 했다. 아침마다 싸리 빗질 자국 선명했던 그 마당에 이제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로 무성하다. 먼 산 울음 같던 쇠마구간도 주인 없는 어둑한 동굴처럼 휑뎅그렁 남겨져 지나간 세월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사람 냄새 물씬하던 온기는 사라지고 기름기 빠진 빈집은 여름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초라하기만 하다. 눈길이 머무는 구석진 자..

좋은 수필 2023.01.06

골죽 / 지영미

골죽 / 지영미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

좋은 수필 2023.01.03

줄지 않는 간장 독/진경자

엊그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물러가고 어영부영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성큼 문턱을 넘어왔다.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 오니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온이 살갗에 와 닿는다. 요 며칠 비까지 내리더니 으스스 등에 한기가 돈다.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서 부엌에 들어가서 휘휘 둘러보았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나간 후로 나 혼자이고 보니 부엌에서 음식을 끓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오래간만에 열어 본 냉동 서랍 속에는 마른 장작개비 같이 뻣뻣한 고등어가 들어 있고 돌덩어리처럼 언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느끼하거나 비린 것 말고 좀 삼빡하고 개운한 국물을 시원하게 먹고 싶어 냉동서랍을 도로 닫고 옆에 있는 찬장을 열어보았다. 메탈로 된 다용도용 찬장 속에는 스파게티 노란 계란국수와 무명실처럼 가느다란 하얀 소면..

좋은 수필 2023.01.01

자서전/이미영

자서전/이미영 맨몸뚱이는 말 없는 자서전이다. 화려한 수사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구차한 변명도 발붙일 곳이 없다. 외면하고 싶은 상처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솔한 기록장이요 여과 없는 유리알 공책이다. 흠집하나 없는 아기의 맨 몸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기어이 만지고 안아보게 만든다. 혈관마저도 펄떡이며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젊은 나신에서는 세상을 움직여 보리라는 기운이 뻗친다. 무조건반사로 가슴이 뛴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살갗과 그 아래로 드러나는 골격이 안쓰러운 노년의 몸에서는 구절양장의 이야기를 읽는다. 애잔함에 눈앞이 흐려진다. 나는 선뜻 목욕탕에 가지 못한다. 샤워 할 때에도 금방 해치우는 버릇이 배었다. 오래된 교통사고의 흔적이 아직도 ..

좋은 수필 2022.12.31

시렁 그네 / 이남희

시렁 그네 / 이남희 누군가를 청산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전등사를 짓던 대목장大木匠은 사하촌의 주모와 사랑에 빠진다. 멋진 집을 지어 아롱다롱 살자 하던 주모는 그러나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 야반도주해 버린다. 사랑의 배신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대목장은 쪼그려 앉은 나부상裸婦像을 조각하여 평생토록 대웅전 처마를 떠받치게 한다. 대목장의 비껴간 사랑은 그렇게 아픈 전설이 되어 참회의 정물로 전등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여주에 가면 목아木芽 박물관이 있다. 오백 나한과 부처를 조각한 도편수의 피멍 든 손을 그곳에서도 보았다. 나부상을 조각하여 성불시킨 대목수처럼 고묘한 손이었다. 대작들을 보면서 나무와 신적 교감이 이룬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편수와 목신木神의 운명적 결합이었다. 처자식을 떠나..

좋은 수필 2022.12.31

달팽이/손광성

달팽이/손광성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개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이다. 여리디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

좋은 수필 2022.12.31

푸새하던 날/김현성

푸새하던 날 김현성 쌀로 풀을 만든다. 풀풀 끓어 넘치는 바람에 냄비뚜껑을 열어젖혔다. 하얀 김 한바탕 쏟아내더니 거품이 폴싹 주저앉은 사이로 쌀 알갱이가 그대로 보인다. 모양새가 또렷한 것으로 보아 좀 더 시간을 두어야 푹 퍼져 뭉그러진 풀이 될 성싶다. 올여름 처음 푸새하는 날. 해마다 여름이 되면 손수 푸새할 것을 고집하는 게 있다. 직접 내 손으로 옷에 풀물을 먹이는 것은 떨어내지 못한 마음속의 그리움 때문이리. 푸새하는 풀물 속에는 어릴 적의 정갈하게 쪽진 어머니의 모습이 있고 성미가 까탈스러운 할아버지가 계시다. 고향 집의 너른 대청마루에 다소곳이 앉아 푸새한 것을 손질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입에 가득 물을 물었다가 ‘푸’하고 내뿜은 물안개로 버석거리는 이불 홑..

좋은 수필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