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억새/박종숙

억새 박종숙 가슴이 비어 있어 그리도 눈부신 꽃을 피우는 것일까. 욕심이 없어 은빛 너울 속에 손을 흔드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무리 속에서 수런수런 들리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떠나고 있어요.' 멀리 논둑 한자락에서, 또는 잎 진 풀숲 속에서 하얗게 손끝을 세우고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꽃! 그들은 언제나 빈 들녘에서 행인을 부른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 길 가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순결한 모습의 춤사위를 펼치는 유희의 군락이다. 억새는 가을의 늦 동산을 지키기 위해 피어난다. 먼 산에 단풍이 들고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멀쑥한 키를 앞세우고 조용한 축제를 벌이는 우아함이 억새의 참모습이다. 11월의 제주는 하얀 융단으로 치장되어 있는 섬이었..

좋은 수필 2022.12.26

시접 한 쪽/정은아

시접 한 쪽 정은아 잘렸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간에 잘려 버린 그 자리를 어떻게 메워나갈 수 있을까. 나는 살아가면서 그 자리를 순간순간 느낀다. 미리 그려놓은 옷본을 원단에 대고, 박음질할 선을 그었다. 박음질 선에서 1cm 정도 더하여 둘레를 따라가며, 솔기를 이루게 될 시접 선도 그렸다. 가위가 시접 선을 따라 경쾌하게 움직였다. 바지의 앞판을 자르고, 이어 뒤판을 자르다가 그만, 싹둑. 시접이 잘려나갔다. 어이없이 한순간에 잃었다. 잘려나간 뒤판 시접 자리만 바라볼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만들던 것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잘려나간 부분에 시침핀을 꽂고, 신경 써서 재봉틀로 박았다. 아이의 쫄쫄이 바지 하나를 완성했다. 바느질이..

좋은 수필 2022.12.26

테왁, 숨꽃/박금아

테왁, 숨꽃 박금아 다가갈수록 바다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외지인의 접근을 두려워하는 파도의 울부짖음이랄까. 바닷새의 울음까지 겹쳐 2월의 고내포구는 난장이었다. 그 속을 뚫고 끊길 듯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절절함이 걱정을 한숨으로 내뿜는 호요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죽을 고비 끝에 간신히 안착한 철새의 마지막 울음 같기도 하고, 유년의 늦가을 밤 푸른 어둠을 가르며 마당 한 구석에 떨어지던 비파음 같기도 했다. 숨비소리라고 했다. 파도소리 높고 크다 해도 속을 비워내는 도저한 소리에는 부서져버렸다. 자신의 것을 다 비워야 날 수 있다는 갈매기가 해녀의 머리 위에서 울음을 더해주었다. 속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는 세상에서 속을 비워야 한다니 가능이나 한 일일까. 사람 속이란 얼마나 깊기에 그..

좋은 수필 2022.12.26

명태/곽흥렬

명태 곽흥렬 드디어 동해 바닷가 작은 포구를 벗어났다. 차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절양장의 산허리를 휘돌고 돌아 나간다. 대관령의 험준한 고갯마루를 타고 넘어 줄곧 서西로, 서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속이 메슥거려 온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탁 트인 분지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황태 덕장, 끝 간 데를 모르게 늘어선 명태의 군상들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칼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채로 꾸덕꾸덕 몸피를 줄여 가는 중이다. 이 깊은 산중에 웬 포로수용소가 있었더란 말인가. 사뭇 절규에 가까운 그들의 고통스런 표정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뭇 백성들의 환영幻影을 본다. 한껏 벌린 입에서는 피 끓는 혁명가..

좋은 수필 2022.12.25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파를 다듬으며 신안호 트럭에 쪽파가 산을 이루듯 쌓여있다. 골판지에 큼지막하게 써놓은 가격은 주부들의 시선을 끌기에 좋으리만큼 착하다. 김장김치에 멀미가 날때쯤이면 봄기운을 안고 찾아오는 쪽파다. 가을 쪽파가 알싸하게 매운 맛이 있는데 봄 쪽파는 매운맛이 덜하다. 매운맛을 싫어하는 나는 봄 쪽파로 삼삼하게 파김치 담아 먹는 걸 좋아한다. 갓 뽑아 온듯 싱싱한 쪽파와 튼실한 대파 한 단을 사들고 오는 내 걸음에 봄볕이 따라붙는다. 베란다에 앉아 파를 다듬는데 햇살이 등에 와 닿는다. 같이 다듬어 주는 건 아니지만 놀러 와 준 햇살이 고맙다. 때깔 좋은 고춧가루에 액젓으로 살짝 간을 하고 통깨를 솔쏠 뿌려 한 접시 나누어 줄까. 살짝 데쳐서 돌돌 말아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게 파강회를 해줄까. 조갯살과 ..

좋은 수필 2022.12.25

돌꽃/홍성순

돌꽃 홍성순 금강석 꽃잎 위로 포말이 부서진다. 파도가 절리를 덮을 때마다 검은 잎을 한 장씩 펼친다. 마침내 육각기둥이 부채꼴로 둥그렇게 퍼지며 커다란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만다라 같다. 절벽 아래서 피어난 바다의 야생화에서 훅 향기가 끼쳐 나온다. 벌과 나비가 찾는 꽃도 아니며 화려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교태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꽃 앞에서 탄성을 지른다. 수없는 시간의 풍랑이 빚어낸 검은 꽃 한 송이, 오늘도 주상절리 앞에 선다. 남편이 생각나면 '파도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온다. 소나무 사이로 채색되는 바다는 청람빛이었다가 푸른빛으로, 다시 초록으로 시시각각 제 모습을 바꾼다. 길 끝에 서면 벼랑이 시작되고 주름 깊은 물결은 먼 수평선에서 밀려와 해안..

좋은 수필 2022.12.25

모루 / 윤진모

모루 / 윤진모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 추석을 앞두고 선산에 벌초하러 간 이튿날 날도 새기 전 아내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8남매 가운데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아파트 16층 집에서 염하였다. 운명하기 4년 전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몸져누운 안방에 마련했다. 방 한가운데 병풍을 치고, 소렴, 대렴을 마쳤다. 형제들은 한쪽에서 염습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천주교식으로 장례하여 별다른 복장이라든지 상식 같은 건 아예 차리지 않았다. “5년이나 누워 지낸 망자가 욕창도 하나 없네.” 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거들던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쪽 엄지발..

좋은 수필 2022.12.24

옥수수 벗기기 / 이복희

옥수수 벗기기 / 이복희 어느 분이 보내준 옥수수 한 자루. 검푸른 옥수수들이 금방이라도 주머니의 망을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싱싱하다. 보기만 해도 실팍하다. 얼른 한 개를 꺼내 든다. 손에 전해 오는 느낌이 제법 푹신하다. 이미 시들어 누릿해진 한 겹 겉껍질 아래 진한 초록색 잎맥의 결은 거칠다. 마치 갑옷이라도 두른 듯 단단하다. 껍질을 벗겨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도톰한 그 질감에 끌려 벗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야무지게 여민 품이 여간해서는 속을 내주지 않을 기세다. 어디서부터 공략할까. 색다른 긴장감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내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치미를 뚝 떼고 제 몸을 맡긴 양이 천하태평이다. 어차피 내줄 요량이면서 끝내 모르쇠 ..

좋은 수필 2022.12.24

시를 읽는 시간/한복용

시를 읽는 시간/한복용 시집을 펼친다. 처음 보는 시가 아닌데 처음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본다. 빨간색 펜으로 줄을 그은 글자는 ‘시발놈들’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시는.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의뭉스럽게 씨익 웃는다. 그리고 소리 내 그럴싸하게 ‘시발놈들!’ 하고 뱉어본다. 욕을 끌어안고 태어난 사람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평소에 늘 하던 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굴린다. 귀가 놀라지 않는 것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욕이거나 하고 살았던 욕인 듯싶다. 하여튼 시에서는 이런 시원한 욕이 가능하다는 것이 매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수필이 넘지 못할 벽을 아무렇지 않게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심통도 난다. 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수필도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 ..

좋은 수필 2022.12.16

빨래 / 정은아

빨래 / 정은아 ​ ​ 젖은 빨래는 묵직하다. 머금은 물이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눈물처럼 흐른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범람 했던 자리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기가 마른다. 내 눈물도 그랬을까. ​ ​ 산후조리 중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9시에 출근이라, 아침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줬다. 아이가 일찍 깨면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고, 쌀을 씻어 안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바빠 보였다. 나는 5살 첫째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둘째의 사이에 누워 뒤척였다. 남편은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텀벙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 ​ “자기야, 뭐해?” ​ ​ 내 물음에 그는 바로 응답했다. ..

좋은 수필 2022.12.11

아버지를 읽는 시간 / 문경희

아버지를 읽는 시간 / 문경희 모니터가 연신 빽빽거린다. 그래프의 파동도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의료진을 호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구경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라는 참담한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기기의 타전을 당신의 고별사인 듯 참담하게 받드는 것뿐이다. ​ 아버지는 수식어를 즐기지 않는 분이셨다. 다정다감한 어록을 자랑하는 달변가는 더더욱 아니셨다. 당신 안에서 거르고 걸러진 언어들만 간결체의 어투로 나지막이 발설되곤 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입에서 때와 장소에 위배되는 헛문장이나 비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말줄임표가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수사법은 쉬 해독될 수 없었다. 나는 징검돌처럼 띄엄띄엄 도달하는 몇 마디만으로 미꾸라지 밸 따듯..

좋은 수필 2022.12.07

닮은 듯 닮지 않은 / 조일희

닮은 듯 닮지 않은 / 조일희 엄마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지 여러 달째다. 내가 밤마다 병간호한 지도 그만큼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던 날, 엄마가 나를 붙들었다. 하는 일을 잠시 쉬고 당신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단다. 엄마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먼저 나서지 못한 나의 용렬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받기만 했는데 효도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주사 줄이 주렁주렁 달린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사실 지근거리에 있는 두 오빠 대신 멀리 사는 나를 콕 집어 당신 곁에 앉힌 엄마가 내심 고마웠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 아니겠나 싶어서였다. 한껏 우쭐해진 나는 앞뒤 상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엄마 곁에 남기로 단박에 결정했다. ‘부족했던 효도를 이번 참에 모두 하리라’ 넘치는 의욕이 깨춤을 ..

좋은 수필 2022.12.06

그림이 말을 걸다 / 조일희

그림이 말을 걸다 / 조일희 신문을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오른쪽 귀퉁이에 실린 작은 그림 한 장이 눈에 띄어서였다. 아이 손바닥만 한 그림 사진 옆에 전직 대통령의 은닉재산 중 하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림 값이 억대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쓴 기사는 실감할 수도 없는 금액이거니와 의미 또한 없었다. '가을 정류장'*이란 그림만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때때로 감성의 결너비가 맞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진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감미로운 선율은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가락은 깊은 울림으로 온몸을 전율케 한다. 또 글은 어떠한가. 따스한 시구 한 줄은 강말랐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고, 서늘한 글귀 한 줄은 나태했던 정신을 곧추세워주지 않던가. 하지만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

좋은 수필 2022.12.06

활자나무- 이승애

활자나무- 이승애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좋은 수필 2022.11.23

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문간방에 먼지가 세 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집 앞 큰 길에는 정류장이 없어도 버스가 멈춰 섰다. 해질녘에 버스가 지나가면 그 길 위에는 흙먼지와 아버지가 남겨졌다. 좀 있으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숟가락 놓는 소리도 따라 들어갔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마루 위로 쏟아지는 네 남매의 목소리는 온 동네를 채웠다. 석류나무가 새순을 올리던 어느 봄날, 저물도록 버스가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 가족은 짐을 꾸려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손수 짜 주신 소나무 책시렁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 이사 간 집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아랫목에 묻어 두던 아버지의 밥그릇도 사라졌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잠에 취해 살..

좋은 수필 2022.11.20

어탁/ 제은숙

어탁(語拓) / 제은숙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 ​ 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

좋은 수필 2022.11.18

사랑의 거리 1.435미터 / 김만년

사랑의 거리 1.435미터 / 김만년 철길은 차가운 대지에 붙박인 채 육중한 기관차를 떠받치고 있다. 두 가닥 은빛 선을 잇대어 세상 어디든지 간다. 상처 같은 세월을 나란히 베고 누워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사람 사는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정거장마다 숱한 물상과 인정人情들을 집결시키고 분산시킨다. 한순간 용융점으로 끓어올랐던 기억 때문일까. 겉보기엔 딱딱한 쇠붙이지만 속은 따뜻하다. 그래서 철길을 두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혈맥이라고 불러왔다. 기관차가 한때 우리 민족의 여명기를 견인했던 심장이었다면 철길은 그 심장을 뛰게 한핏줄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철길의 외형은 단순하다. 그냥 강철로 이어진 두 줄기 철선이다. 그러나 저 단순성이 기차를 무탈하게 안착시키는 힘의 근원이다. 철길은 직각으로 꺾..

좋은 수필 2022.11.18

갯벌의 오후 / 고경서(경숙)

갯벌의 오후 / 고경서(경숙) 바다가 옷을 벗는다. 썰물이 지나가자 갯벌이 덜퍽진 속살을 꺼내 보인다. 모래밭, 자갈밭에 이어 드러난 개펄은 뼈와 살과 근육으로 된 여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맨바닥에 나신(裸身)으로 누워 촉촉한 물기를 햇볕에 말리는 중이다. 인기척에 놀란 방게들이 바다의 모공 속으로 잽싸게 파고든다. 피돌기가 왕성한 맨살을 긁는 것 같다. 은신처로 이만한 곳도 없을 성싶다. 억세고 치열하게 살아가기로는 인간이나 미물이나 다를 바 없다. 갯벌은 이 모든 생명을 그러안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견딜 뿐이다. 여기선 사람이 불청객이요, 이방인이다. 이곳은 서해바다. 해풍에 그을린 민낯의 제부도다. 만조 때는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섬. 물때를 모르고 떠난 게 불찰이었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뵈는 창가..

좋은 수필 2022.11.16

화두話頭, 혹등고래가 풀다/ 김원순

화두話頭, 혹등고래가 풀다/ 김원순 해류와 조류, 고래는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바다에도 엄연히, 면면하게 존재한다. 그날의 마음자리와 결에 따라 사그라지거나 분진처럼 풀썩이는 희.노.애.락이 고래의 초음파신호음을 보내며 조수처럼 들락거리고, 삶의 방향과 무게 질량은 암초 마냥 암묵한다. 삶을 맘대로 요리하고 지휘하는 마음의 심지心志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조율하는 대로 삶이 펼쳐진다며, 천형 같은 화두를 삶의 심해에 풍덩, 던진다. 섬찟하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먹이를 탐색하고, 장애물과 해저의 지형을 파악해서 무리에게 소리를 전달하는 혹등고래 노랫소리가 뱃고동처럼 구슬프다. 구가한 사랑이 홀연 떠나버린 것일까. 내 맘속에도 뱃고동이 울린다. 울컥해진다. 700만 년 전 태어난 인간이 70..

좋은 수필 2022.11.16

절구와 공이 / 박성희

절구와 공이 / 박성희 절구가 깨졌다. 작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새댁이 되면서 들여온 것이니 긴 풍상의 세월 앞에 견딜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굽도 뭉툭하게 닳은 절구지만 도자기 재질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의 소리가 마음을 끌었다. 그런 연유로 신형 분쇄기보다 더 자주 눈길이 가던 절구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묵은 정이 좋은 법이라 깨진 절구를 보니 마음이 휑해지는 것은 어쩔 수 가 없었다. 하기야 그 긴 세월 동안 툭하면 공이로 매질을 당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벌써 명줄을 놓았을 것을 오래 버티어온 셈이다. 깨진 절구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이웃 부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몇 년 전에 퇴직한 박 선생은 매사가 자기 위주로 흘러가야 직성이 풀..

좋은 수필 202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