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박종숙 가슴이 비어 있어 그리도 눈부신 꽃을 피우는 것일까. 욕심이 없어 은빛 너울 속에 손을 흔드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무리 속에서 수런수런 들리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떠나고 있어요.' 멀리 논둑 한자락에서, 또는 잎 진 풀숲 속에서 하얗게 손끝을 세우고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꽃! 그들은 언제나 빈 들녘에서 행인을 부른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 길 가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순결한 모습의 춤사위를 펼치는 유희의 군락이다. 억새는 가을의 늦 동산을 지키기 위해 피어난다. 먼 산에 단풍이 들고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멀쑥한 키를 앞세우고 조용한 축제를 벌이는 우아함이 억새의 참모습이다. 11월의 제주는 하얀 융단으로 치장되어 있는 섬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