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왈바리/주인석

왈바리/주인석 사는 일은 뚜렷한 공식도 방법도 없다.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며 웃고 우는 가운데 버려지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여 쌓이는 것이다. 삶의 조각이 크다고 좋은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쓸모없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작은 조각 하나가 인생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얘는 기형이라요." 쿵 하는 소리로 기겁하는 내게 금방 해산한 사람답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끄응 힘을 주며 일어서는 남자 엉덩이 밑에 시커먼 것이 툭 떨어진다. 여자 몸의 진통 끝에 탄생은 보았어요 남자 밑으로 뭣이 쑥 빠지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정말로 머리와 몸이 한 덩어리다. 여자들의 손에서 짭짤하고 매콤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 제 구실을 못하니 남자 엉덩이를 붙잡고 있나 보다. 말 못하는 것일지라도..

좋은 수필 2023.03.18

꽃살문/윤상희

꽃살문 윤상희 화사한 벚꽃길이 길손을 맞이한다. 풍기 나들목을 빠져나와 순흥면에서 벗어나고 있는 길이다. 산골길을 굽이돌아 소백산 국망봉 자락에 다다르자 차 한 대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이 펼쳐진다. 굽잇길에 들어서자 아랫녘 매화가 향주머니 끈을 풀어놓은 듯 산속의 내음이 풍요롭다. 세속의 소리는 어느새 멀어지고 따스한 봄바람이 옷섶을 열어준다. 인적 드문 산비탈에 이르자 성혈사가 고즈넉이 나를 맞이한다. 절집은 법당 새 채에 스님이 계시는 요사와 수행승방 한 채가 전부이다. 암자라 해도 좋을 소담스런 절의 대웅전 뒤뜰로 부챗살처럼 가지를 펼친 만지송이 장관이다. 세 칸 법당에 달린 보물 832호 꽃살문 여섯 짝을 만나러 아침 먼 길을 달려온 나는 나한전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 ​ 조선 명종 8년(15..

좋은 수필 2023.03.18

밑돌, 그 이름처럼 / 허정진

밑돌, 그 이름처럼 / 허정진 돌탑이다. 돌덩이를 아슬아슬하게 하나씩 포개 쌓은 외줄 탑도 있고, 둥글게 높이 쌓아 올린 원추형 탑, 갖가지 의미나 형상을 표현한 조각 같은 탑들도 있다. 무겁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만 가지 재주를 부린 것 같다. 누군가의 노력과 끈기로 이루어진 결정체다. 왜 쌓았을까? 안녕과 복에 대한 기원이거나, 가슴속에 숨겨둔 간절한 서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접착제 하나 없이 비바람에 흔들림 없는 돌탑이 되기 위해서는 돌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겠다. 돌각담이나 성벽, 돌탑을 보면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자연석이 서로 맞물려 하나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돌끼리 견고하게 물고 물려 틈새 하나 없는 균형미와 조형미가 단연 돋보인다. 무엇보다 기초가..

좋은 수필 2023.03.17

출가/박종희

출가 박종희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절에 다녀왔다. 비구니 절이라 그런지 어느 것 하나도 제멋대로 놓여있는 것이 없었다. 화장실이며, 화단, 사방을 둘러보아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절 뜨락에 가을볕이 한 번씩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가을이 조금씩 물들어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도 설쳤다는 스님의 이마 위에 여윈 햇살이 얄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겼는데 스님이 되어 있더라는 그녀를 친구도 10여 년 만에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애써 태연한 척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합장했다. 내 친구와 친구이니 나하고도 친구가 되지만 승복을 입은 그녀한테 감히 말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가을에는 구수한 황차가 맛이 좋다면서 스님은 물을 끓여 물식힘 사발에 부었다...

좋은 수필 2023.03.16

해순 씨/이복희

해순 씨/이복희 “꼬막무침 한 번 더 해 줘야 하는데….” 해순 씨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무렴 나만큼 아쉬울까.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단순히 섭섭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와 다른 불편을 당분간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주지 못하게 된 것만 안타까워했다. 해순 씨는 내가 일하던 일터에서 청소를 맡아 하는 용역회사 직원이었다. 그럭저럭 십여 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다. 서로 소속이 달랐어도, 우린 그냥 한 식구였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고 정이 드는 것은 아닐 터. 마음이 잘 통했고 나이도 비슷하다보니 어느새 서로 많이 의지하며 지냈다. 가족도 그렇지만 하물며 남이 아닌가. 언젠가는 헤어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그녀..

좋은 수필 2023.03.15

안녕하신지/이복희

안녕하신지/이복희 출근길에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가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다. 낯은 익지만 인사를 나누지는 못한다. 서양 사람들처럼 누구를 만나던 “하이!” 하고 지나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에게는 그런 정서가 없다. 오히려 서로 눈을 안 맞추려고 애써 외면한다. 시선이 마주치면 “안녕 하세요” 정도의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낯익은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초등학생인 우제를 알게 된 것도 출근길에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말을 건넸다. 키가 작아 저학년인 줄 알았는데 5학년이라며 부끄러워하던 녀석을 아침마다 만난다. 저쪽에서 오다가 나를 발견하면 녀석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다. 내 눈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지간히 가까워지면 나는 그 애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

좋은 수필 2023.03.15

겨울소리/문경희

겨울소리 문경희 사방 바람의 우범지대다. 홀로로는 결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부조리에 맞서듯 바람은 닿아지는 모든 것들을 다그쳐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를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고, 소리를 채찍 삼아 세상을 평정하려 든다. 뒷산 능선을 넘어오는 북풍 역시 을씨년스러운 소리부터 앞세운다. 수척해진 나무들의 등짝에 냉냉冷冷한 문신을 새기고 있는지, 바람의 손이 스칠 때마다 구성없는 비명이 쏟아진다. 바람의 소리인지, 소리의 바람인지, 오늘 따라 집 뒤 굴참나무 숲정이는 귀곡산장이 따로 없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헤살을 놓는 날엔 무조건 퇴각을 외쳐야 한다. 바람에 항거하는 방법이란 고작 문이란 문을 꽁꽁 닫아걸고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문도 소리의 출입까지는 막을 수 없나니. ..

좋은 수필 2023.03.15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짱짱한 여름 햇살이 마을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성안숲의 소나무는 강렬한 빛의 기운을 받아 기개에 날개를 달았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양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을 뿌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굽은 나무줄기 같다. 뿌리가 준 양분을 곁가지로 배달하는 줄기처럼 골목길은 이 집 저 집으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날랐으리라. 돌담을 이루는 돌의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쭉한 돌과 납작한 돌, 둥근 것과 모난 것, 머리보다 큰 돌과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을 붙잡고 있다. 이런저런 사람이 만나 서로 보듬고 감싸며 살아가는 한밤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좋은 수필 2023.03.14

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댓돌 위의 신발 / 석민자 안나의 집엔 특별한 신발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조그마한 남자용 흰 고무신이다. 노리개로도 모자람이 없을 작고 앙증맞은 신발이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모양새는 누구라 없이 웃음을 베어 물게 한다. 낯가림을 하는 사람도 단박에 팔을 내어 밀게 하는 친화력이다. 바깥쪽으로 얌전히 놓여진 품새는 신 임자가 집안에 있음을 일러준다. 하기는 백일 전의 아기나 신음직한 신발이니 임자가 집안에 있을 밖에 없을 일이기는 하다. 신 임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예수님이라고 답하는 수녀님 얼굴이 풀꽃이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예수님 신발을 준비해둘 생각을 하다니. 고요하기가 물밑 같다. 자식을 하느님사도로 내어주고 노후가 여의찮아진 어른들이 모셔진 곳이다. 지금껏 십자가 고상이나 성모상만 봐오던 ..

좋은 수필 2023.03.14

마루 / 임영도

마루 / 임영도 마루는 불평하지 않는다. 찍히고 밟히고 뛰어도 아파하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벽창호로 막힘을 거부한다. 방밖에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밤낮으로 바라보지만 감탄의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무표정이다.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간섭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루는 집안 생활의 동선을 이끄는 으뜸자리이다. 경남 함양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찾아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답게 고샅길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발길을 멈춰 세운다. 솟을대문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뒤틀린 서까래에서 애잔한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어난다. 단정하게 배열된 집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듯이 솟아오른 팔짝 지붕의 추녀마루마다 대학자의 기품이 ..

좋은 수필 2023.03.13

섬돌 / 박양근

섬돌 / 박양근 ​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 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

좋은 수필 2023.03.09

우산/ 김애자

우산/ 김애자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께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좋은 수필 2023.03.09

간수 / 박월수

간수 / 박월수 소금을 샀다. 포대를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서해의 태양과 바람 냄새가 났다. 향기로웠다. 포대를 다시 묶으면서 보니 겉면에 소금기가 배어나와 눅진하면서 짭짤한 기운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창고 바닥에 플라스틱 상자를 깔고 그 위에 묵직한 소금 포대를 올려 두었다. 물기가 다 빠지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부터 포대 솔기에선 쉼 없이 소금물이 흘러내렸다. 저의 태생이 바다인 걸 잊지 않으려는 듯 똑똑 소리 내며 소금기를 뱉어냈다. 포대마다 그릇을 받쳐두었지만 언제 넘쳤는지 바닥이 흥건해지곤 했다. 어느 날부터 소금 포대 주변 시멘트 바닥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내 맘은 이상하게 물 먹은 솜처럼 눅눅했다. 저를 길러 준 서해의 바람과 햇..

좋은 수필 2023.03.09

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소금꽃 뒤에 맺힌 열매들 / 박시윤 땡볕의 날들이 흘렀다. 서늘한 바람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숨어들어 천지의 고단함을 탈곡한다. 알맹이가 된 것들은 자신의 무게만큼 지상에 남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날아가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지상에 남은 무게에 충실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출 뿐이다. 지천으로 추수의 낱알들이 남겨졌다. 거둠의 시간을 기다리는 열매는 고요하나, 오늘을 기다리며 지난 계절 온 몸을 대지에 내맡긴 농부의 마음은 긴장감으로 일렁인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지는 빈속으로 낫을 갈았다. 무겁고 둔탁한 조선낫만을 억척스럽게 고집했던 아버지였다. "왜 낫 열 댓 개가 조선낫 한 자루..

좋은 수필 2023.03.09

배추를 여니 나비 외/김일곤

배추를 여니 나비 외 김일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

좋은 수필 2023.03.09

오지요강 / 김애자

오지요강 / 김애자 턱 걸터앉는다. 엉덩이로 전해오는 느낌이 듬직하다. 불편하던 속을 시원하게 비우고 남은 한 방울까지 마무리할 때 떨리는 쾌감을 무엇에 비하랴. 세상 부러울 게 없이 편안하다. 해거름이 되면 장독대 구석에 엎드려 있던 요강단지들을 일으킨다. 깨끗이 단장시킨 놋요강은 조부모님 방으로 들인다. 번쩍거리는 황금빛의 기품과 우아함은 있으나 요강단지 들기도 힘겨운 노인들에겐 가벼워서 좋다. 부모님 방에는 순백의 바탕에 활짝 핀 모란당초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호랑이가 그려진 사기요강이 들어간다. 호랑이의 강한 힘을 얻으려는 아버지의 바람과 도공의 혼이 더해져 포효하는 맹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운치를 더한 모란꽃이 함박웃음을 짓는 그림은 넓은 치마폭에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부적 같..

좋은 수필 2023.03.08

불면과 화해하다 /이원예

불면과 화해하다 / 이원예 ​ 석양은 붉은 산호의 광채로 지상에 잠시 머물다 쫓기듯 사라졌다. 누워서 키를 키우던 그림자 위로 어둠이 두터운 갯벌처럼 내려앉는다. 밤의 기류가 슬슬 채비를 할 무렵에서야 추적자를 의식한다. 나 몰래 나를 훔치려는 스토커, 그의 정체는 불면이다. 은신처의 컴컴한 실내다. 추적을 피해 전등을 소등하고 빛을 차단해 스스로 자취를 흐렸다. 지친 육신의 무게를 감당해 주는 침대와 나의 체온에 익숙한 이부자리에 동지애를 강요하며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려 웅크리고 있다. 째깍째깍, 벽 시계가 밀고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결국 따돌리지 못해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수면과 불면이 의식을 마구 흔들어댄다. 소요보다 심한 혼돈의 시작이다. 무언가 허물어진다. 아무래도 생각의 덩어리가 문제다. 이..

좋은 수필 2023.03.02

불안에 대한 보고서/장미숙

불안에 대한 보고서 장미숙 그들은 푸른색 두꺼운 천으로 그녀를 덮어버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어둠 속에 갇혔다. 죽음 같은 고요가 흘렀다. 두려움을 거느린 외로움이 엄습했다. 외로움은 삽시간에 온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외로움은 두려움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마음속에 소름이 돋아났다.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온하게 일상을 즐기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들에 속하지 못한 그녀는 비참했다. 눈을 감아도 영상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머릿속 액정화면 정지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메뉴를 골랐다.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 삶의 고뇌에 맞선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그녀는 그 속에 자신을 끼워 넣었다. 화면은 우울한 푸른빛이 되었다. 무거운 푸른빛이 그녀 주위를..

좋은 수필 2023.02.26

비 /장석주

비 장석주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 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좋은 수필 2023.02.26

고독해서 외롭지 않다 /곽흥렬

고독해서 외롭지 않다 곽흥렬 산골의 겨울 해는 유난히 짧다. 동지 어름에는 오후 다섯 시만 되면 벌써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장막을 둘러치듯 정적이 사방을 휘감는다. 가뭄에 콩 나듯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통행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끊기고 나면 다음 날 늦은 아침까지 긴 적요寂寥가 이어진다. 서둘러 저녁을 끝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갈무리한다. 모과차 한 잔을 받쳐 들고 거실 가장자리의 벽난로 앞에 앉는다.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사기잔의 따사한 감촉이 오달지다. 너울너울 타오르는 장작의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상념의 타래가 가닥가닥 풀려난다. 지나간 시간의 영상들이 일렁이는 불길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보랏빛 그리움이 물안개 번지듯 피어오른다. ..

좋은 수필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