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씨간장 / 송종숙

씨간장 / 송종숙 그때까지 나는 씨간장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씨암탉, 씨감자같이 ‘씨’자를 어두에 붙인 낱말들이 많지만.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씨간장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날 방송에 특별출연한 종갓집 여인 덕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종부답게 조신한 말씨로 씨간장을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저고리의 긴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손수 가져온 장항아리 속에 성큼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웬 얼음덩어리같이 보이는 거무스름한 자색의 조각을 조심스럽게 건져냈다. 얼핏 보면 꼭 커다란 연수정원석 같아 보이는데, 자디잔 유리 부스러기가 엉겨 붙은 형상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어느 집이나 대대로 묵혀온 오래된 간장이 있다면 그것이 그 집의 씨간장이라고 했다. 또 그 간장독 바닥에 엉겨 붙은 ..

좋은 수필 2023.05.15

민들레의 무릎* / 윤남석

민들레의 무릎* / 윤남석 무릎 꿇고 앉은 그녀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흠칫, 한다.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쓸어내리며,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드물게, 늦은 시월에 들렀다. 대체로 따뜻한 계절에만 찾아왔기에 뜻밖의 방문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즘 들어 가끔 때 이르게 피는 꽃을 볼 때도 있고, 또 제철에 보여야 할 꽃이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이상기후에 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어지기에 씁쓰레할 때가 있다. 그녀가 마당 한쪽에 다소곳하게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반가움보다는 의외롭다는 생각이 먼저 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혹시 낫낫한 가을볕이 유혹한 걸까. 그 볕살의 촉감에 잠시 기대어, 나른한 몸을 내려놓았다가 그만 들켜..

좋은 수필 2023.05.15

누비옷/김영미

누비옷/김영미 ‘좋은 인연’ 모임에 가는 날 오래된 옷 한 벌을 꺼내 손질한다. 집안에 경사가 생기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날 평소에 잘 입지 않아 장롱 깊숙이 넣어둔 누비옷을 꺼내 입게 된다. 누비옷은 평생을 입어도 좋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정성이 깃든 옷이라 입을 때마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어느 해 가을, 십 년 넘게 친자매처럼 지내오던 차(茶)벗님과 소원해 오던 누비옷 한 벌씩을 장만하였다. 소재는 값비싸지 않고 질긴 광목에다 자연염색을 한 옷감으로 취향과 개성에 따라 골랐다. 형형색색의 옷감들 사이에서 견본으로 만든 쪽빛으로 깃과 옷고름을 빼어 낸 시대를 거스르는 듯 보이는 누비저고리 하나가 눈길을 붙들었다. 앞 섶 품이 길고 넓어 여유로워 보이고 욕심과 조급함을 버린 편안함이..

좋은 수필 2023.05.15

익숙함에 갇히다/장미숙

익숙함에 갇히다/장미숙 어금니를 뽑았다. 중심이 무너졌다. 걷는데 자꾸 몸이 왼쪽으로 기운다. 얼굴 한쪽이 텅 비어버린 듯 허전하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바람이 들락거린다. 혀가 긴장한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빈 곳이 커다란 동굴처럼 느껴진다. 감각에 예민한 혀가 방황하듯 주위를 맴돈다. 이를 닦다가도 흠칫 놀란다. 겉으론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자꾸 얼굴 한쪽을 유심히 보게 된다. 보름 정도가 지났다. 현상은 그대로고 단지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시나브로 변하고 있으며 바람의 세기와 강도도 바뀌었다. 일상은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상처가 아물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인식이 달라졌다. 말할 때 신경이 쓰일 뿐 입속 빈 곳이 삶을 흔들지는 않는다. 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그곳이 원래 채워져 있었다는..

좋은 수필 2023.05.12

때죽꽃처럼 / 김잠복

때죽꽃처럼 / 김잠복 태백산 줄기를 돌고 돌아 당도한 산골 마을에는 산 그림자가 길게 몸을 늘이고 있었다. 꼬박 다섯 시간이나 고른 숨을 쉬며 불평 없이 우리 부부를 싣고 달려간 승용차는 기계라기 보다 충직한 말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봇짐을 풀었다. 우애 좋은 자매처럼 산이 산을 감싸안고 있는 산중에서 모처럼 달과 별을 청한 잠자리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아직은 안개가 눈을 비비는 첫새벽이다. 창을 밀고 들어오는 풋풋한 오월의 산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켠다. 동네를 걸어나와 작은 공굴 다리를 건저나 '김삿갓 생가'를 가리키는 안내간판은 잠에서 덜 깬 채 손님을 맞는다.새벽숲이 물속처럼 고요하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풀 숲 아래고 아침 산책중이던 날다람쥐가 내 눈과 마주치자 머루알 같은 ..

좋은 수필 2023.05.12

돌쩌귀/이윤경

돌쩌귀 이윤경 친정집 위채에는 양쪽으로 여는 여닫이문이 달려있다. 격자무늬 나뭇살 위에 한지가 착 감겨있다. 나는 그 문을 좋아했다.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동그란 문고리도 정겹다. 그 문고리에는 오랜 세월 동안 잡고 당겼을 가족들의 손자국이 얼마나 많이 묻어있을까? 어머니가 늦은 밤이면 문고리를 안으로 걸고 구멍 속에다 숟가락을 꽂아 두고 뚫려진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는 했었다. 구멍으로 들려오는 작은 바람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던 유년의 기억이 그 문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문고리를 잡고 당겨보았다. 문이 뻑뻑하니 쉽게 열려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억지로 잡아 당겼다. 문은 괴로운 듯 끼익 소리를 내며 조금씩 열렸다.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디가 문제인지를 살폈다. 내 예리한 눈에 그것이 걸려들었다..

좋은 수필 2023.05.05

꿈꾸는 입/강수니

꿈꾸는 입 강수니 봄이 오는 함평 나비 축제장. 색색의 나비춤이 현란하다. 저 나비들은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번데기 집을 빠져나온 나의 춤사위인가. ‘동백 아가씨’ 테이프가 반복되며 끝도 없이 돌아간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종합병원 이비인후과 입원실. 중년인 그녀는 설암 말기로 이미 혀를 잘라낸 자리에 대장 한 부분을 이식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여러 장기에 암이 전이된 중증 환자였다. 여자 2인 병실, 간병하는 그녀의 남편과 한 공간에서 24시간 함께 있었다. 투병생활로 예민해진 나는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목에 호스를 꽂고 유동식을 넘기는 그녀는 수시로 구강을 청소해야했다. 가래 뽑아내는 기계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대는 ‘동백아가씨’ 노래는 고문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남편의 투박..

좋은 수필 2023.05.05

선을 긋다 / 우광미

선을 긋다 / 우광미 선 긋기는 다양하다. 연필심의 굵기나 강도에 의해 선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선의 방향에 따라 무게감도 달라진다. 소묘를 할 때는 화지 위에 전체 크기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비율을 관찰하고 중심점을 확실히 잡는다. 처음엔 연필을 눕혀서 묵직하게 선을 깔아준다. 그 위에 계속 얽히고설키게 선들을 쌓아 밑그림을 만든다. 이렇게 성실히 메우고 다듬어 나가면서 수시로 뒤로 물어나 자신의 그림을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 한 곳만 크게 보이던 것도, 거리를 두고 보면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전체의 톤을 염두에 둔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면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도 가질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림들은 모두 그런 사람을 닮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일 ..

좋은 수필 2023.04.30

문패 / 김광규

문패 / 김광규 뚫어진 창호지 틈으로 햇살이 삐죽이 고개를 들이민다. 주인집 아저씨는 대청마루에 앉아 오늘도, 고운 천으로 문패를 닦고 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눈이 부시다. 아버지는 말없이 마당에 서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신다. 하루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묽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아버지는 차가운 골목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말없이 대문 앞을 서성이신다. 문패에서 시선을 사뭇 떼지 못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한없이 작아 보였다. 나는 인기척도 내지 못하고 한참 동안 담장 뒤에 숨어 발길을 묶어두어야 했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처럼 우리 가족도 추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둥지를 옮겨야 하는 생활이 잦았다. 부모님은 밥을 먹는 것보다 집을 구하러 다니는 횟수가 더 많았다. 해질 ..

좋은 수필 2023.04.26

오래된 마을에서 / 허창옥

오래된 마을에서 / 허창옥 네 손가락을 펴서 돌담을 만진다. 그런 채로 천천히 고샅을 걷는다. 손이 두툴두툴한 돌담을 죽 훑으며 내 느린 발걸음을 따라온다. 손끝에 아주 낯익은 감촉이 와 닿는다. 이 촉감, 꼬맹이 적 우리 동네 안 골목 그 돌담들 이후 얼마만인가.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린다. 싸리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하오의 그늘이 마당을 반쯤 가리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다. 낮은 처마 밑에 느슨하게 묶인 빨랫줄에 낡은 타월이 걸려 있고 고무 함지막이 화단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화단에는 맨드라미 봉숭아 분꽃들이 원래 제자리가 없었던 듯 자연스럽게 뒤섞여서 피어 있다. 부엌 앞 귀퉁이에는 장독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옆 개집에는 할 일을 잊어버린 개가 멍청하게 앉아 있..

좋은 수필 2023.04.26

참빗/강숙련

참빗/강숙련 경주의 어느 콘도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체크 인 시간이 두어시간 남았기에 몇 군데 민속 공예점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물건을 만났다. 그것은 살이 아주 가늘고 고운 진소眞梳였다. 얼레빗月梳와는 달리 대나무 살이 실낱같이 섬세한 빗이다. 빗살이 촘촘하고 가지런하며 사방 모서리가 꽉 여문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야무지기가 한량없다. 그래서 참빗이라 하였을까. 양쪽 귀퉁이에 질긴 실이나 끈을 탱탱하게 매어서 빗살의 간격을 더욱 죄게 해서 쓰던 참빗. 하마터면 이름조차 잊을 뻔한 추억의 귀물貴物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긴요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민속 공예품이라는 고상한 차림새로 진열장 속에 들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소꿉동무가 귀부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기분이다. 손가락 끝으로 가늘고 뾰족한..

좋은 수필 2023.04.26

까마귀/정성희

까마귀 정성희 까악까악, 저놈이 또 울어댄다. 오늘 하루도 신수 사납겠구나 싶어 웬수 같은 저 울음소리가 소름끼치도록 까맣게 들려온다. 먼 옛날에는 까마귀가 예언하는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하여 신령스러운 영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새를 숭상해온 우리민족문화에서 이러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까마귀가 임금을 암살위기에서 구했다는 설화에 근거하여 정월 대보름이면 약밥을 지어 제를 올렸으며,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더라도 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 달린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또한 씨름총에는 단군신화에 등장한 신단수 나무 위에 까마귀가 앉아 노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에게 그놈은 광명을 가져다주는 해신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까마귀 비록 검다지만, 우리민족은 백색과 아울러 흑색도 즐..

좋은 수필 2023.04.26

청에 젖다 / 안희옥

청에 젖다 / 안희옥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 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 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뽑아내어 만든다. 청은 대금의..

좋은 수필 2023.04.25

둥그런 바람 / 최명희

둥그런 바람 / 최명희 달님이야 계절을 가리리오. 청옥같이 차고 맑은 얼굴이 반공에 둥두렷이 떠오르면, 우러러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푸른 물빛이 스미어든다. 꽃기운 자욱하여 애달픈 봄밤의 달이나, 가슴 속 핏줄의 골짜기까지도 시리게 비추는 가을의 상월(霜月), 얼음보다 투명하여 그 명징이 오히려 두려운 빙천(氷川)의 달, 그리고 은하수 너울을 두르고 냇가의 달맞이꽃과 희롱하며 검푸른 밤바다를 건너가는 여름의 달, 이 달을 따 손에 들면, 한낮의 폭염 복판에서도 서늘한 바람이 인다. 둥글부채 단선(團扇). 살대에 갑사(甲紗)나 비단, 종이 등을 곱게 발라서 만든 둥그런 이 부채는 모양도 다채롭고 이름도 갖가지다. 태극무늬 선명한 태극선(太極扇)은 그 여염(麗艶)한 자태의 곡선과 단순하면서도 휘황한 빛깔로 ..

좋은 수필 2023.04.24

“게엔찬타!” / 박금아

“게엔찬타!” / 박금아 ​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세 시면 일어나는 어머니가 날이 새기를 기다려 한 전화였다. “오늘, 니가 댕긴다는 곳에 나를 좀 데리고 가 주라.” 엉겁결에 그러시라 해놓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도착했다. 친지 결혼식에 왔다가 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자양동에서 신림동까지를 금세 달려온 걸 보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했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그즈음 나는,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후원단체에서 봉사자로 있으면서 일에 파묻혀 지내다시피 했다. 휴일도 없이 가족 모임에도 빠지기 일쑤여서 모두가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걱정하던 차에 급기야 어머니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 온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내 등 뒤..

좋은 수필 2023.04.22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죽조개 맛이 깊어지면, 서쪽 바닷가 동백마을에 가리라. 마을 앞 고두섬 주변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에 숨구멍이 보이고 그곳을 호미로 깊숙이 파내 보리다. 부지런히 뻘 속을 뒤지면 봄볕 품은 동죽이 물총을 쏘아대며 손에 잡힐 것이다. 혹여 귀한 백합조개라도 찾는다면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소리쳐보리라. 심봤다! 걸어가도 좋으리라. 느직한 걸음걸이에 맞춰가는 길이니 지나치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넣기에 좋으리라. 드문드문 다니는 군내버스 시간과 바다의 물때가 다른 날에는 천천히 걸어서 동백마을로 들어가리라. 배낭에 기다란 물장화는 개켜 챙기고 김 올린 모시송편을 찬합에 넣고 보온병에 팔팔 끓인 커피물을 내려 등에 짊어져야지. 자동차 길은 산허리를 휘돌아가니 가로지..

좋은 수필 2023.04.22

계절풍 / 김경순

계절풍 / 김경순 남편은 또 배낭을 꾸린다. 몇 달 째 내가 보아오는 토요일 밤의 풍경이다. 익숙하고도 절도 있는 손놀림이 일련의 경건한 의식 같다. 여벌의 옷가지와 아직 끊지 못한 담뱃갑이며 지갑, 손수건 등을 챙기며 내일 아침 잊어버린 물건 없이 떠나려는 꼼꼼함을 발휘한다. 준비가 완벽하다 싶은지 서둘러 자러 들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도망자의 그것처럼 궁색하다. 그는 애초부터 변변한 취미 하나 없이 오로지 생업에만 충실했다. 성실 하나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네모난 틀 속에 갇혀 사는 남자는 곧 매력을 상실했고, 아내로부터 심심찮은 타박을 들어야했다. 남들 다 누리고 사는 잔잔한 재미마저 외면하는 무미건조한 인생이 답답하기도 했거니와 정반대의 성격이 나에게는 족쇄와 다름없었다. 무언가..

좋은 수필 2023.04.22

기차 / 박시윤

기차 / 박시윤 기차는 언제나 앞만 향해 달렸다. 어디서 떠나와 어디로 향하는지, 어린 나에게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차가 떠난 철로 위로 허공을 검게 휘젓던 검은 탄가루가 보드랍게 내릴 뿐이다. 탄가루가 돈가루였던 문경의 산기슭을 돌아 기차는 쉼 없이 오고 갔다. 기차가 떠난 철로를 따라 온종일 놀다보면 저녁보다 까만 탄가루들이 코 아래까지 따라 들어와 있곤 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그러했다. 얼레리꼴레리를 연거푸 토해내며 까르르 넘어가던 웃음들이 삼십년이 흐른 지금 붉디붉은 녹을 뒤집어 쓴 채 고스란히 서려있다. 싣고 들어온 사람의 수보다 실어 나른 탄가루의 양이 더 많았던 문경선의 기차들은 늘 환희에 찬 기적을 울려대곤 했다. 저녁 무렵 탄광의 일과를 끝내고 삽짝을 들어서는 아비들의..

좋은 수필 2023.04.21

정오의 결투/송혜영

정오의 결투/송혜영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한낮의 정적을 깬다. 정수리를 녹여버릴 듯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 두 남자가 마주 서 있다. 부감으로 잡힌 마른 남자와 퉁퉁한 남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어깨 없는 러닝셔츠 바람의 퉁퉁한 남자는 가겟집 주인이다.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바짝 마른 남자는 물건을 사러온 사람인 듯하다. 가는 금태 안경을 낀 손님 쪽이 좀 더 흥분 상태다. 깡마른 볼을 씰룩거리면서 대뜸 부적절한 성행위를 할 의사를 드러낸다. 어디다 욕질이냐고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높인다. 네가 먼저 욕하지 않았느냐고 손님이 대든다. 내가 언제 욕했느냐고 따진다. 네가 반말 하지 않았느냐고 째진 눈을 치뜬다. 반말한 게 욕이냐고 굵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라린다. 네가 뭔데 나한..

좋은 수필 2023.04.21

장니(障泥) / 류현서

장니(障泥) / 류현서 넓은 평지에 능들이 즐비하게 둘러앉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둥그런 산봉우리를 담아와 옹기종기 엎어놓은 듯하다. 널찍한 대릉원을 돌아보며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천마총 앞에 섰다. ​ 시간의 저편을 고요히 더듬어 본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서원과 왕릉이 있다. 서원은 유교의 뜻을 따라 옛 성현을 받드는 장소다.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서원이다. 그렇다면 고분은 무엇인가. 능을 거닐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고분은 나에게 답을 주기는커녕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 모든 사람은 생사를 거친다. 죽음은 누구나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진실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덤에..

좋은 수필 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