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고추 / 강미나

고추 / 강미나 종묘상 앞이다. 모종판들이 인도를 반이나 점령했다. 원고지 칸칸에 쓰인 글자들처럼 포트 안에 서 있다. 저잣거리에 불려 나오느라 물을 흠씬 맞았는지 앳잎 끝에 방울 물이 대롱대롱하다. 나는 눈으로 고추 모종을 고른다. '안 매운 것은 저쪽이요' 순한 맛을 찾는 내게 주인아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다가섰다. 이쪽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 매운 건 없을까. 색이 짙은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 뒷줄에 연두색들이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 있다. 나는 목을 쑥 빼서 눈을 맞춰 준다. 어느 게 순할까? 한참을 망설인다. 모종은 실해야 된다고 옆에 선 아저씨가 말해 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산골 냄새 풍기는 가늘한 것에게 끌렸다. 그 가녀린 허리를 외면하지 못해 두 판을 데리고 온다. 마음..

좋은 수필 2023.06.18

망월굿 / 김애자

망월굿 / 김애자 강 가운데 생긴 섬마을이다. 태백산에서 태어난 내성천(乃城川)과 소백산에서 출발한 서천(西川)이 만나 마을을 휘돌아나가면서 물돌이동을 만들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수도리 모래사장에는 일 년 중 가장 달이 크게 보이는 정월대보름 달집이 세워진다. 달집을 태우면서 한 해를 시작하면 바라던 일들이 잘 이루어 질 것 같다. ​ 어릴 적에는 설날보다 대보름이 더 신났다. 농한기의 쉼을 얻은 어른이나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명절이라는 이유로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낮에는 연날리기와 지신밟기로, 밤이면 쥐불놀이로 마을은 온통 축제로 들떴다. ​ 절정은 달집태우기였다. 타오르는 불 앞에 소원을 걸어놓고 이루어지기를 빌고 다짐하는 것은 한 해의 농사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은 긴 막대로 기둥을 ..

좋은 수필 2023.06.18

태실(胎室) / 박시윤

태실(胎室) / 박시윤 가을볕을 받으며 태실에 오른다. 세종대왕 대군들의 태(胎)가 봉안된 곳이다. 여기는 내 마음의 시름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혼자 조용히 다녀가는 영혼의 정화구역이다. 풍수에서는 태실을 두고 새끼를 잉태한 어미의 자궁과도 같아서 사시사철 좋은 기氣가 흐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태실을 다녀간 한동안은 고른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돌배가 아들과 함께 왔다. 태초부터 태를 사이에 두고 나와 한 몸이었던 아이 아니던가. 넘어지고 울고, 기어가고 웃고 아이는 매 순간 표정과 감정을 달리하며 세상을 향해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 그늘은 아이와 나의 몸이 들어서기에 충분하다. 나직하게 드리워진 산길의 안개가 가을이 깊어 감을 말해 준다. 키 작은 구절초의..

좋은 수필 2023.06.18

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박시윤

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 박시윤 하나의 덩어리는 언젠가는 조각나기 마련인 것인가. 아니면 조각난 것들은 언젠가는 하나의 덩어리로 다시 결합될 수 있는 것인가.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은 퍼즐처럼 하나로 들어맞았고, 나는 그 속에 잊혀 진 하나의 세상이 존재했음을 예감한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으로의 빗장은, 무겁고 둔탁한 미로 속을 배회하듯 조심스럽다. 손가락 하나를 무늬에 갖다 대고 천천히 지문을 읽힌다. 암호를 대고 기밀의 문을 통과하듯 내 지문은 그들이 요구하는 비밀부호에 적합했고, 일정하게 흘러가던 빗살의 언어들이 하나, 둘 깨어나 해석을 재촉한다. 하나같이 똑같은 무늬인 듯해도 가만가만 되짚어 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언어로 까끌 거렸고, 육천년을 단숨에 건너와 깊이와, 촉감을 달리하며 나의 손끝에서..

좋은 수필 2023.06.18

부채 / 홍정식

부채 / 홍정식 고향 집 안방 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모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부친다. 날은 한여름이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에게 태극선을 살살 흔들어 바람을 피우고 혹시나 손주에게 달려들 파리나 벌레를 쫓는다. 다정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득하다. 그 마루 밖으로 아버지가 여동생을 안고 흐뭇하게 보고 계신다. 나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섬돌 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간 그리고 두 동생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흑백사진이므로 태극선은 검고 희게 나타나 있다. 사진을 찍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 탈상을 했다. 그 부채는 사라졌으나..

좋은 수필 2023.06.14

그림자의 질량/최민자

그림자의 질량/최민자 봄부터 가을까지, 내 아침은 새들이 몰고 온다. 새들은 참 따뜻한 악기다. 깃털 속에 보드라운 바람을 품고 차고 맑은 소리를 뱃구레에서 길어 올려 산 아랫마을로 증폭시켜 흩뿌린다. 어스름 허공에 씨앗을 파종하듯 짧은 스타카토로를 점점이 뿌리거나 강약 강약이나 강약 중강약 같은 리듬으로 다채로운 빛깔의 선율을 유포한다. 새가 길어내는 레몬 빛 모음과 청량한 새벽 공기와 핸드드립으로 내린 호세 바닐라 커피만으로도 뒤숭숭한 꿈자리가 기척 없이 휘발된다. 청회색 꽁지깃을 가진 새가 행길 위에 그림자를 떨구며 공원 쪽으로 날아 들어간다. 마른 씨앗을 삼키고 뼛속을 비우고 물똥까지 싸질러내는 것도 모자라 목구멍 안쪽의 속울음까지 끼룩끼룩 긁어 내뱉어버리고야 공중의 행보를 이어 붙이는 새들. 가..

좋은 수필 2023.06.13

숨은 촉 / 김애자

숨은 촉 / 김애자 아침부터 굴착기가 들어와 다리 밑에 쌓인 흙을 퍼 올리고 있다. 70년 초에 새마을 사업으로 놓였던 다리를 헐어내고 다시 놓은 다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열 푼 짜리 굿판에 떡값이 일곱 푼 격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사라지고, 철근을 촘촘히 박아가며 새로운 공법으로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먼저 고쳐놓기 위해 벌인 공사가 시공한 지 한 달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지난여름 장마는 끔찍한 재난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리퍼붓는 물벼락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 평의 농지와 수십 채의 가옥이 토사에 묻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처럼 폐허로 변해버린 수마의 상처는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오지마을인 이곳은 몇 군데의 산사태가 난 것과, 범람하는 물살로 약간의 농지..

좋은 수필 2023.06.07

자투리 / 최장순

자투리 / 최장순 밤 열 시, 일단 눕고 본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지만 웬걸, 머릿속이 끓는다. 생각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탓일까. 그러나 냉큼 잠들지 못하는 그 짧은 시간이 고마울 때가 있다. 뒤척임이 반짝 생각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희열인 횡재인가.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운전 중에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생각처럼 말이다. 왜 이런 순간에 창조의 씨앗은 발아되는가. 하지만 순간적인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잠자리를 박찬다. 망각이 거두어가기 전에 잡아두어야 한다. 자투리 발상이 주제가 되어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질 때, 그 기분은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짙다. 강제로 짜내지 않은 오묘함, 뒷맛조차 개운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까무룩, 하루가 숙면에 들..

좋은 수필 2023.06.06

열흘의 色/마경덕

열흘의 色 ​ 마경덕 나사를 죄듯 가지에 꽃을 꽂던 장미, 꽃잎과 꽃잎을 겹겹으로 감싸고 봄부터 아름다운 풍경을 지었다. 꽃의 배경은 사람들이었다. 서로를 밀착한 조밀함이 아름다움의 근간이었다. 꽃잎을 포개 봉긋봉긋 가지에 봉오리를 짓고 마침내 한 송이 꽃이었다. 꽃과 축제로 붐비던 강변 장미정원도 이제 호젓해졌다. 빛의 뒤편이 어둠이듯이 색(色)중의 색(色), ‘빨강’은 가장 곱기에 가장 ‘슬픈 색’이다. 나아갈 길이 없고 더는 보여줄 것이 없는 절정(絕頂)은 불안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대책 없이 활짝 피어버린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초조한 기색이 보인다. 한발 더 나아가면 아득한 벼랑인데 그만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만발한 근심들, 팽팽한 긴장에도 꽃잎의 간..

좋은 수필 2023.05.29

부뚜막/ 황윤자

부뚜막/ 황윤자 반질반질한 모습에 세월이 닦여 있다. 김호 장군 고택의 부엌에서 살아온 종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습을 보니 사백년 역사가 꿈틀거린다. 14대의 대가를 이어온 기나긴 세월을 함께한 바짝 마른 부엌 바닥과 다부진 종부의 모습에서 지나온 삶을 대변 해준다. 부뚜막에서 종부의 일생이 흔적으로 나타난다. 옹기종기 앉아 부딪치며 싸우던 그릇들의 쉼터인 살강도 텅 비어 있다. 다라이나 소쿠리, 음식을 차려 먹는 판들의 보금자리 시렁도 주인 잃은 세월 속에 외로워하는 건 마찬가지다. 옛날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 깔끔한 부엌이다. 큰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부엌문은 이제 생명을 다한 모양이다. 엄마가 밥하는 모습을 보는 문이다. 그런데 물건으로 막혀 열리지 않는다. 문살 틈 사이에 쌓여있..

좋은 수필 2023.05.24

적심/ 김원순

적심/ 김원순 오늘도 종일 아이비와 선로즈의 줄기를 잘랐다. 꺾꽂이 하기 위해서다. 한 달은 넘게 자르고 심기를 반복해야 할 것 같다. 구정舊正이 지나면 출하 될 꽃들이기에 나는, 딸을 시집 보내는 어미의 심정으로 한 분盆 한 분盆 정성껏 심는다. 심을 때마다 내 곁을 떠나간 수많은 꽃들을 떠올려 본다. 장미나 백합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는 없는 듯이 있는 꽃이다. 어느 곳에 가든지 환경에 잘 적응해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으라며 아쉽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보낸다. 그러나 시집을 가면 잘 사는 딸도 있고 못 사는 딸도 있듯이 아이비와 선로즈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친정어머니께서도 나를 떠나 보낼 때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시댁의 물맛과 장맛을 빨리 익혀야..

좋은 수필 2023.05.24

가라지/박경주

가라지 박경주 ​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 밀과 가라지는 자랄수록 구별 되지만 그 뿌리가 서로 엉켜있어 가라지를 뽑다 밀이 뽑힐 위험이 크다. 가라지를 추수할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은 성급하게 가라지를 뽑다가 행여 서로 엉킨 밀을 다칠까 저어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밀을 위한 배려지 가라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창문을 열자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었다. 하늘엔 흰 구름 흘러가고 어지러이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그래, 하늘엔 고독은 없다. 고독하려면 내게로 오라. 커피를 뽑아 들고 베란다 창문 앞에 막 섰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속 남자는 곧 내 이름을 확인했다. 누굴까? 들었던 목소린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40년 전의 제이라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아니!” 하고 소리를..

좋은 수필 2023.05.22

어느 가을 햇살 아래/남홍숙

어느 가을 햇살 아래/남홍숙 그곳 봄, 이곳 가을에 홍고추 15kg을 말리기로 했다. 코로나19가 식료품 해외배송까지 저지해서다. 우선 고추박스를 햇살 가득한 마당에 풀어 헤쳐 놓았다. 노루꼬리만치나 짧다는 가을볕이 아까워서 나도 고추랑 가을빛이랑 같이 어울리며 작업을 즐기기로 했다. 고추는 하나같이 우량아처럼 미끈하고 길쭉하게 잘 붉었다. ‘태양의 나라’라는 이국의 햇빛은 말 그대로 ‘땡볕’ 이어도 고추만 이쁘게 잘 마르면, 난 끓는 듯 뜨거운 볕을 괴의치 않으련다. 그놈들 하나, 하나씩을 행주로 닦은 후 세 등분으로 길게 가위질을 하다 보니 손에 물집이 생겼다. 코는 맵고, 눈은 가렵고, 얼굴은 화끈댔으나 아랑곳 않고, 붉은 조각으로 잘게 잘린 그놈들을 조각보 깁 듯 둥글고 파란 멍석에다 빽빽하게 눕..

좋은 수필 2023.05.21

기다리는 집/조현미

기다리는 집 조현미 한 채 집을 마주하고 있다. 더러 집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동네가 떠들썩한 한가위 저녁이거나 정초 무렵이었다. 처음엔 풍경 소린 줄 알았다. 그러나 바람이 자는 중에도 소리는 찾아왔다. 그 집이 온몸으로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살붙이를 죄 떠나보낸 늙은 주인 같았다. 집의 상심은 생각보다 중했다. 용마루는 휘었고 굴뚝은 잦바듬했다. 아궁이는 검게 입을 다물었고 부뚜막도, 불목도 온기를 잊었다. 해진 창호 너머 그 집의 속살이 적나라했다. 꼭 주인의 알몸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뼈대가 탄탄하고 옹골진 것으로 보아 한때 꽤 헌칠한 집이었다. 행랑까지 거느렸으니 살림 또한 윤택했을 것이다. 종달새와 빗소리와 살강 위 귀또리 소리가 아이들 웃음소리와 뒹굴었겠으나…. 체온이 떠난 집엔 이제 ..

좋은 수필 2023.05.21

울음을 풀다/임이송

울음을 풀다/임이송 나에게 울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나를 묶는 것이고 또 하나는 푸는 것이다. 오늘 도심 한복판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도시에 살면서부터 점점 불감증 환자가 되어가는 나에게 뻐꾸기 울음소리는 두 이야기를 불러냈다. 5년 전, 시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입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인과 가족들 4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젊은 내 아버지가 죽었을 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것과 달리, 통곡했다. 울음이 터진 곳은 엉뚱한 지점에서였다.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사랑하는 큰며느리를 두고…’라는 부분에서였다. ‘사랑하는 큰며느리!’ 그 단어가 메아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시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

좋은 수필 2023.05.21

모닥불 속의 개미들/솔제니친

모닥불 속의 개미들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썩은 통나무 한 개비를 집어넣었다. 통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타오르자 나무통에서 개미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한 무리가 통나무 뒤쪽으로 달리다가 불길에 휩싸여 타죽어 갔다. 나는 황급히 불붙은 통나무를 모닥불 속에서 끌어내었다. 생명을 건진 개미들의 일부가 모래 위로 달려가고, 더러는 소나무 가지 뒤로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부분의 개미들은 좀처럼 불길을 피해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불길을 피해 나갔던 개미들도 방향을 바꾸어 다시 통나무 둘레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그 어떤 힘이 그들을 내버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일까. 많은 개미들은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 뒤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통나무에 붙어서 그대로 타 죽..

좋은 수필 2023.05.21

치매/박종희

치매/박종희 이우는 꽃잎처럼 야윈 봄날이 저문다. 습관대로 핸들에 이끌려 도착한 병원 뒤뜰에는 꽃이 지고 여기저기 흩날리는 꽃잎이 하얀 꽃길을 내고 있다. 아직 어머니의 온기가 남아있을 휠체어와 도시락을 먹던 평상이 그대로다. 그저 어머니만 안 계실 뿐, 병원은 한 달 전처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어머니가 떠나시는 것을 예감했을까. 어머니가 가시던 날, 매화나무에는 붉은 꽃망울이 눈물방울처럼 매달려있었다. 터질 듯한 꽃망울로 어머니를 배웅하던 매화나무에 연녹색의 잎사귀가 무성한 것을 보니 생을 이끄는 것은 시간인 것 같다. 온 김에 어머니가 계시던 병실을 들여다보는데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라 가족 같던 병원 직원이 아는 체를 한다. 어머니는 11년 동안 노인병원에 계셨다. 믿기 어렵지만, 어머니는..

좋은 수필 2023.05.20

끝과 시작-풀지 못하는 자물쇠 / 정은아

끝과 시작-풀지 못하는 자물쇠 / 정은아 무의식이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수많은 흰색 운동화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무작위로 마구 던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나는 신발 한 짝을 신은 채로, 나머지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내 운동화는 흰 끈으로 매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끈 없이 밋밋했다. 한쪽 다리로 휘청대며 끈이 있는 신발을 찾으려고 애썼다.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대는데,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신발 중 한 짝을 신었다. 긴 바지 아래 감춰진 짝짝이 운동화. 똑같은 흰색이라 얼핏 보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탔어도 얼떨결에 신고 온 신발 한 짝과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 신경 쓰였다. 꿈이었다. 꿈을 맹신하진 않지만, ..

좋은 수필 2023.05.20

이판사판(理判事判) /홍혜랑

이판사판(理判事判) 홍혜랑 산사(山寺)의 겨울밤을 어찌 어둡다 하리.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선명하면 할수록 더 멀리 느껴지는 건 색다른 체험이었다. 멀리 있을수록 그리움이 더한 것이 어찌 별뿐일까. 고개를 하늘로 젖히니 걷잡을 수 없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방어할 길이 없다. 별이 나를 마구 잡아당긴다. ​ ​살갗에 닿는 청량한 대기 또한 어둠을 씻을 만큼 상쾌하다. 이 무명(無明)의 영혼에게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이번 문화유적 답사팀이 숙소를 호텔이나 콘도 대신 절간의 선방(禪房)으로 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 --> 별들과의 만남도 소중했지만 잠시 방문한 과객(過客)들에게 법문을 허락한 주지 스님과의 인연이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듯하다. 일행 ..

좋은 수필 2023.05.16

풍경소리 / 김이랑

풍경소리 / 김이랑 땡그랑 댕 댕 맑은 소리가 절간의 고요를 깨운다. 동그란 소리가 물수제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데, 저 파장에 공명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면의 지평이 시끄러운 탓이다. 닭 울음 소리가 아침을 깨워 지게를 지고 나서는 보행의 나날, 게으르지 말라고 밭이 있고 목마르지 말라고 샘이 있어 삶이 척박하지는 않다. 알몸 가릴 무명 몇 필 얻을 수 있기에 춥지도 않다. 외롭지 말라고 이웃이 있어 내 하늘에게 버림받지 않았음도 안다. 하지만, 가끔 하늘을 보면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요란하다. 마찰음, 파열음, 충돌음, 문명의 소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상을 흔들어댄다. 빠앙 참을성 없는 소리에 귀가 멍하고 끼이익 놀래는 소리에 오금이 저린다. 쿵쾅쿵쾅 묵직한 소리에..

좋은 수필 2023.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