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101

잠 / 김희자

잠 / 김희자 연 이틀을 잠만 잤다. 때를 잊은 채 잠에 빠졌다. 동면하던 생물들이 기지개를 켠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잠 속을 파고들었다. 평소 늘어지는 성질이 못되니 수면시간도 짧다. 하루 네댓 시간을 자며 살아왔던 내가 이불 속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앉아보았지만 가라앉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소태 같은 밥을 겨우 한 술 뜨고는 엉금엉금 기어 침대로 갔다. 창백한 낯빛이며 푹 꺼진 눈의 몰골,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정신이 흉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전신까지 놓자 모든 것이 솜처럼 풀렸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을 빼고는 검불처럼 너부러져 잠만 잤다. 휴대폰도 멀리 했더니 무슨 일이 있냐고들 아우성이었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평소와는 다른 나를 별견하며 가만..

좋은 수필 2023.07.15

마스카라/김희자

마스카라/김희자 여자의 하루는 마스카라가 연다. 둥근 우주 속의 저나 나나 자존심은 매한가지건만 K는 오늘도 속눈썹을 바짝 치켜세운다. 처진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여 쓱쓱 말아 올린다.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밋밋한 속눈썹과 마주 닿자 빳빳하게 굳어진다. 두세 번의 덧칠이 이어지니 마법을 부리듯 눈맵시가 풍성하게 살아난다. 그마저 성에 차지 않는지 그녀는 라이터로 성냥개비를 벌겋게 달군다. 달구어진 성냥개비로 속눈썹을 아찔하게 세울 때 여자는 가장 도도하다. 사람의 얼굴 생김새는 눈이 지배한다. 눈 화장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면면이 달라진다. 눈 화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단연 마스카라가 아닐까. 마스카라를 바를 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내리깐다. 다리를 꼬고 앉아 거울을 응시하는 포즈 또한 ..

좋은 수필 2023.07.15

꼭두/서소희

꼭두 서소희 나무 인형들이 웃고 있다. 한복 차림으로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어떤 이는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 있기도 하다. 재주 부리는 자, 시녀, 소고치는 자,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자랑하고 있다. 대부분 밝은 표정이지만 그 인상이 왠지 섬뜩하다. 어찌 보면 웃고 있는 얼굴이고 또 어찌 보면 저승사자 같다. 제각각의 형상으로 있지만 ‘사람’이라는 단어처럼 ‘꼭두’로 불린다. 꼭두는 어둠속에서 빛으로 안내하는 일을 한다. 육신을 떠난 혼백이 걸어가야 할 두려움의 길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래서 상여의 꼭대기에 자리하여 이승을 떠나는 자의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준다. 슬픔을 위로하며 허드렛일을 해준다고 구전되어진다. 그들은 거추장스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

좋은 수필 2023.07.14

읽지 않은 편지/장현심

읽지 않은 편지 장현심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됐다. 특수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재난 지역의 극한상황 속에서 본분을 지키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름대로 내 젊은 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당시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도 수동적이었다. 상대가, 마음의 키워드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해도 대답을 피하거나 감정을 눙치는 것이 예사였다. 나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사람들은 주인공 '유시진 대위'와 '의사 강모연'이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연애 세포를 깨운다고 아우성쳤지만 나는 조연 커플인 '서대영 상사' 와 '윤명주 중위'의 연애에 안달이 났다. '쓰리스타' 장군 아..

좋은 수필 2023.07.03

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늦가을, 밤하늘을 본다. 듬성듬성 떠있는 별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지나간다. 별은 빛났으며 언어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별은 보는 자의 몫이었고, 언어는 쓰는 자의 몫이리라. 하늘에는 은하수가 존재하고 내가 사는 지구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미미하게 살아가는 나의 내면에는 언어의 세계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존재한다. 하늘의 은하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현실의 하늘에는 견우와 직녀별을 품고 있는 은하의 강이 말라 버린 것인지 빈 공간만 널찍이 펼쳐져 있다.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함 속에 나는 은하수를 찾고자 밤마다 하늘을 우러르며 혼자 서성인다. 도회지의 회색빛 하늘에서 보이는 별이야 몇 안 되겠지만 가깝게는 북두칠성의..

좋은 수필 2023.07.02

자반고등어 / 조현숙

자반고등어 / 조현숙 ​ 갈바람에 가랑잎들이 나무를 떠난다. 그 자리에 발덧 난 햇살이 내려앉는다. 늘비한 국수 난전에서 끓어오르는 육수 냄새가 시장통에 목을 매고 사는 삶들을 둥실한 온기로 채우고 있다. 여기쯤일까? 아들 혼사 때 입을 한복을 맞추러 나선 길에는 가을을 먹는 사람들, 가을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다. 무릎에 염증을 달고 사는 남편이 시장 어귀 가로수 아래서 숨을 고른다. 힘차게 헤엄치던 푸른 바다의 시절을 저만치 밀어 놓고 누런 잎사귀들, 후두두 떨어지는 길에 우리 같이 서 있다. 노량으로 걸었어도 이만큼 오느라 가쁜 숨을 내쉬는 발밑에서 낙엽들이 부스럭 몸을 일으킨다. 작은 새 떼들이 가랑잎 파들거리며 떠는 나뭇가지 안에서 소란스럽다. 나란히 걷던 남편이 나를 앞세운다. 와그작..

좋은 수필 2023.06.29

종자의 시간 / 조현숙

종자의 시간 / 조현숙 ​ 햇살이 하루를 깁고 있다. 분주한 도시에 너볏하게 들앉은 채종답採種畓은 묵묵히 써 내려간 붓을 거두고 빈 몸체이다. 논바닥을 훑던 까치들이 쌍쌍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떨어지고 다시 만난다. 퍼덕거리는 날개로 성급하게 봄을 부른다. 바람의 허밍에 햇살이 낮게 출렁인다. 질주하는 속도도, 번잡하게 엉키는 조음도 이곳에선 휴지와 묵언으로 스며든다. 때를 쫓아가는 것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동질의 빛과 시간 속에 있지만 같이 흐르지 않는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다. 볍씨의 시간은 더디고 질박해도 시절이 되면 기어이 제 빛깔의 문장을 보여준다. 늘 마음이 조급했다. 뭔가에 화가 나고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절박해도 열심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결과에 지쳤다. 꽉 막혀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

좋은 수필 2023.06.29

막돌탑 / 박양근

막돌탑 / 박양근 부산의 중심지에 자리한 금련산에 작달막한 봉우리들이 솟았다. 여름 뙤약볕의 열기를 받은 돌산이 구경거리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생겨난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세 번의 여름이 지나면서 투박한 돌탑이 막 손에 의하여 올려진 것이다. 어느 해 여름철이었다. 그해는 유달리 가뭄이 심했다. 덩달아 비도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산길에서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경박하리만큼 가벼운 먼지가 길 주변의 잎에 보얗게 쌓여 마치 능수버들 꽃들이 쌓인 듯했다. 그 여름은 모든 것이 유달리 가볍게 움직이는 계절이었다. 그 길에는 평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햇살을 가릴 나무도 없고 길은 울퉁불퉁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은 길이다. 비탈 밑에는 가로수가 넌출대는 산복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웬..

좋은 수필 2023.06.27

햇귀/박필우

햇귀 누구나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찬 언덕에 지푸라기 깔고 누워 하늘을 양껏 봅니다. 저 홀로 하늘을 향해 우뚝 버티고 선 미루나무가 고독합니다. 십여 년 넘게 다닌 직장을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배낭 하나, 오랫동안 비워둔 내 마음의 빚 스케치북까지 챙겨 가는 뒷길에 정류장까지 딸아이 손잡고 슬픈 눈으로 따라나서는 집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알 듯 모를 듯 웃어 준다는 게 그만 슬픈 여운만 남기고 맙니다. 어디 갈 거냐고 묻는 아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습니다. 문득 고향 마을이 떠올랐지만, 부모님은 물론 홀로 남은 형수마저 떠나버린 고향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터미널서 한참을 망설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해가 궁금합니다. 그래! ..

좋은 수필 2023.06.27

엄지발톱 / 박경혜

엄지발톱 / 박경혜 네일아트 집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화려한 손톱들이 여인의 빈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화려함에 감탄하곤 했다. 마음이 울적한 날, 호기심 반 허전한 마음 반으로 손톱에 이어 발톱까지 내밀고 앉아있다. 발톱이 예쁘시네요. 늘 밉다고 생각하던 발톱인데 인사삼아 하는 소리일지라도 싫지는 않다. 곱게 화장하는 엄지발톱을 바라보는데 문득 기억 하나가 살아난다. 내 발톱을 만지작거리던 다섯 살 아이가 엄마는 몇 살 때 발톱이 빠지냐고 묻는다. 무슨 소린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외할머니, 아빠 발톱 빠졌잖아. 외할머니는 몇 살 때 발톱 빠졌어?” 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도록 웃고 나서야 엄마는 발톱 안 빠진다고, 외할머니는 다쳐서 그렇다고 말해준다. 아휴, 다행이다 안심..

좋은 수필 2023.06.26

꽃살문 / 주인석

꽃살문 / 주인석 꽃이라고 해서 다 물만 먹고 피는 것은 아니다. 향이 특별히 좋거나 자태가 고운 꽃은 사람의 손에 보호를 받으며 물을 먹고 꽃을 피운다. 과잉보호 탓인지 그런 꽃은 곱게 피지만 길지 않은 시간에 떨어진다. 그러나 물 한 방울 먹지 않고도 천년을 하루 같이 피어 있는 꽃이 있다. 아무런 연유 없이 내가 절집을 찾을 때는 꽃살문을 보기 위함이다. 꽃의 성질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꽃이라며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것에서 나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가로 세로 대각선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태와 문틀을 벗어나지 않는 꽃살의 지조가 내 마음을 잡고도 남음이 있다. 꽃살문의 꽃은 오직 붓과 칼로만 피어난다. 얼마나 목말랐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애잔한 마음이 든다. 꽃잎에 나이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

좋은 수필 2023.06.26

팔월/서성남

팔월 서성남 팔월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여느 달보다 더 많이 모습을 바꾼다. 이른 새벽, 물꼬를 보러 들판으로 나가면 살갗에 닿는 공기가 신선하다. 새벽의 정령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른 해는 들판의 옅은 안개를 서서히 걷어낸다. 햇빛이 퍼져 가면 밤새 쉬었던 뭇 생명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지 사방은 왕성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햇볕은 점점 강렬해진다. 한낮이 되면 오만한 본색을 드러낸다. 기세등등하고 의기양양하다. 제왕처럼 행세한다. 개도, 사람도 그를 피한다. 풀은 몸을 비틀며 항복하고 나뭇잎은 생기를 잃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엎드리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않고 하루 내내 해바라기를 해야 한다. 반항은 용납..

좋은 수필 2023.06.25

8월엔 시그널 뮤직을/김애자

8월엔 시그널 뮤직을 김애자 8월엔 입추와 처서가 들어있다. 절기로 처서가 지나면 식물들은 더 이상 성장세포를 만들지 않는다.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벼가 패고 꽃이 피는가 하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계엄군처럼 천변을 점령하던 억새 포기에도 배동이 선다. 동부콩이 꼬투리 안에서 태아처럼 하얀 막을 뒤집어쓰고 영글어가는 것도 이때부터다. 8월엔 태양의 열기도 절정에 이른다. 한낮이면 얀정머리 없이 내리 꽂히는 햇볕으로 아스팔트는 불가마를 연상케 한다. 호박잎이 지열을 견디지 못해 축축 늘어지고, 연잎에 자발없이 올라앉은 청개구리는 턱밑 살가죽이 발랑거리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이런 폭염 속에서도 고속도로는 종일 붐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받은 직장인들이 연인이나 혹은 가족들과 추억을 만들..

좋은 수필 2023.06.25

식은 죽/강표성

식은 죽 강표성 그 집 앞에 멈추었다, 습관처럼. 죽집은 여전했다. 주렴을 밀치니 작은 식당 안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앞자리의 할머니 둘이 미장원의 파마 수건을 뒤집어쓴 채 식사에 열중이다. 이웃과 머리 단장하러 온 김에, 형님 아우 하며 점심을 나누는 중이다. 문 옆의 할아버지는 말없이 할머니 콧등의 땀을 닦아준다. 모처럼의 외출에 지팡이 임자는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들, 여기 겉절이 더.” 마치 자기 아들을 부르듯, 생김치를 재청하는 아주머니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챙겨주는 젊은이다. 부모는 주방에서, 아들은 식당에서 손발이 척척 맞는다. 싹싹한 청년이 나르는 단 맛에 취해 잠시 그 옛날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동지 무렵이면 신이 났다. 밖에서 뛰어놀다..

좋은 수필 2023.06.24

푸른 텐트/정영숙

푸른 텐트 정영숙 가을비다. 흩날려 쌓인 낙엽이 젖는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주말은 흐린 날이 한결 좋다. 나지막한 창 밖의 풍경이 일상의 거품을 잠재우고, 여러 날 무엇엔가 씌어 살다가 비로소 땅 위에 정착한 것 같은 날이 비 오는 날이다. 아이들조차 방에서 기척이 없으니 집안이 절간 같다. 뒤꼍 창고에서 한참을 부스럭대던 남편이 잡다한 기물들을 한아름 가져다 거실에 늘어놓는다. 에어매트에 바람을 채워보고 녹슨 버너며 텐트 막대 따위에 마른걸레질을 한다. 묵은 세간에 거품 겸 잔손질을 해둘 모양이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래 익숙한 행동반경의 한계랄까. 가령 비가 오는 이런 날, 양푼에다 밀반죽을 시작하면 아내가 멸치국물에 칼국수를 말아 주겠거니 여길 뿐 ..

좋은 수필 2023.06.24

섬/김희자

섬 김희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섬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실재하는 지구 또한 외딴 섬이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혼자인 섬이다. 우리 삶도 섬이 되는 날이 있다. 어부의 통통배를 얻어 타고 앵강만을 건너 노도에 섰다. 노도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티끌처럼 떠 있는 섬이다. 실타래 같은 인연으로부터 탈출의 욕구에 시달릴 때는 차라리 세상만사와 아득히 먼 섬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 속에서 중심을 잡아보지만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섬에 오고 싶었다. 그리움도 병인 양 부딪혀서 환상을 깰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낫다. 비우고 털어 낸 자리에 또 다른 것이 채워지듯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구운몽의 배경이 되었던 앵강만은 전..

좋은 수필 2023.06.24

빈 깡통/구자호

빈 깡통 구자호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허름한 입성으로 살을 에는 손돌이 추위를 견디는 일은 배고픔만큼이나 처절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가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찬 일이었다. 두 팔을 뻗어 깡통을 내민다. 아낙네가 주는 밥은 깡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곱아 어눌해진 손이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숟가락으로 떠준 밥 한 덩이를 놓치고 만 것이다. "주는 밥도 못 받노! 가거라!" 밥 대신 아낙네가 던진 매몰찬 말 한마디가 어린 가슴에 푸른 멍이 들게 했다. 내 인생은 너무 일찍 빈 깡통이 되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깡통을 들고 거리를 배회해야 했다. 채워지기보다 비어 있던 적이 훨씬​ 많았던 깡통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좋은 수필 2023.06.24

시어머니의 초상肖像 /박경주

시어머니의 초상肖像 박경주 ​​​ 북극에 있는 버드나무는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얼음과 바람을 피해 바닥끝까지 다리를 뻗어 생명을 이어가지. 일 년 내내 비가 내려 봐야 겨우 콜라병 하나 정도 온다는 척박한 사막에 사는 소나무도 비를 좀 더 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대신 최소한으로 먹고 마시게끔 자기 몸 구조를 되도록 단순화시킨대. 곰도 눈 쌓인 겨울동안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미리 잔뜩 먹어두고 잠을 청하며 조용히 봄날을 기다리지. 목마른 나무가 가늘디가는 뿌리로 땅속 깊은 곳을 핥으며 물을 찾고 또 찾아서 겨우 목을 축이듯이 말이야. ​ 기쁘고 뿌듯했다네. 서운하고 아쉬웠다네. 그렇게 며느리를 맞이했다네. 홀시어머니라서 더 조심스러웠고. 평판이 잘못 날까 두려웠다네. 조심조심. 내 일찍이 그렇..

좋은 수필 2023.06.24

너테 /조이섭

너테 조이섭 자형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잡은 손이 파르르 떨고 있다. 나를 지그시 건너다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처남, 인제 아파하지 않아도 되려나?” 김 노인은 먼저 간 큰아들의 딸아이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회색 잉크를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흐린 하늘이 을씨년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옆 강둑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다. 아들 대신 손녀를 신랑에게 넘겨주었다. 예식장 가운뎃길을 걸어가는 내내 오히려 신부가 팔짱을 끼고 곁부축하는 모양새였으나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실없이 밝은 조명 때문에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을 뿐이었다. 김 노인은 손녀의 결혼식이 덤덤하기만 했다. 작은 기쁨이 큰 불행의 척후병처럼 다가올까 두려웠다. 혼주석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호둣속 같았다.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좋은 수필 2023.06.24

수피/이명길

수피 이명길 공원 산책길, 갈바람이 선선하여 팔랑대는 이파리 사이로 드러난 하늘이 드높다. 단풍나무가 밀집한 곳에 오자 뒤쪽에는 초록색인데 앞쪽에는 선홍색이다. 태생에 따라 물이 드는 시기가 서로 다른 단풍나무들이 어울려 가을을 풍성하게 한다. 앞쪽에 심겨진 나무가 홍단풍 나무이다. 키가 작아 가지에 손이 닿는다. 손을 펼친 모양의 잎은 가을을 노래하듯 발갛게 물들어 마음마저 달뜨게 한다. 여기서는 이국 종의 거둠 역할을 하는지 야윈 줄기 끝에 잎이 몇 개 말랐다. 뒤쪽으로 심겨진 나무는 중국 단풍나무이다. 태생을 알리는 듯 이름표가 걸렸다. 삐죽한 키에 잔가지를 잔뜩 내고 잎이 오리발 모양새인데 볼 때마다 줄기의 거친 껍질을 벗는다. 한 겹만 벗으면 좋으련만 사철 내내 허물 벗는 듯하다. 몇 년 이 길..

좋은 수필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