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남두육성 / 조미정

남두육성 / 조미정 산방에 올라 별의 일주운동을 찍는다. 카메라 조리개를 활짝 열어 놓고 연달아 자동 셔터를 눌러댄다. 하늘 전체가 둥글게 펼쳐진 우산 속 같다. 지구 자전축이 회전하면 주변의 천체들도 덩달아 뱅그르르 동심원을 그린다. 북극성 가까이 머문 별들은 황소걸음으로 걷고, 멀리 떨어진 별들은 앙가발이 걸음으로 달려간다. 그 중에서 별자리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끈다. 남두육성은 은하수 남쪽 끝에 국자 모양으로 엎어져 있다. 북두칠성과는 모습이 비슷한 듯 사뭇 다르다. 별의 개수가 하나 모자란 여섯이고 국자 부분도 찌그러졌다. 크기가 작으며 더 어둡다. 짝퉁 별자리라서 구석으로 내몰렸을까? 행색이 남루하여 무대에 오를 만한 자신감이 부족했을까? 사시사철 하늘 높이 붙박인 북두칠성과 달리 남두육성은 ..

좋은 수필 2023.08.19

헛기침 /김 만 년

헛기침 /김 만 년 밤이 이슥해지자 상을 차리고 제향을 사른다. 아버지 생전에 하신대로 열을 맞추어 음식을 진설하고 정성을 들여 잔을 올린다. 늘 아버지 옆 자리에서 지켜만 보다가 오늘은 내가 제주祭主가 되어 처음으로 아버지를 뵙는 것이다. 종헌終獻이 끝나고 긴 부복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 생전의 나날들이 아리게 스쳐간다. 묵배 끝에 일어설 무렵 아이들이 뒤에서 '킥킥' 웃는다. 이유인즉 내가 할아버지 헛기침 흉내를 내더라는 것이다. 어색하다며 아내도 아이들을 거든다. 그런가 싶기도 해 뒷머리를 긁적인다. 지금은 멀어져간 풍습이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집안에 대제大祭라는 것이 있었다. 조부님과 아랫대 24종반 제종당숙들, 그리고 조카항렬까지 한자리에 모이면 종갓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돼지를 잡..

좋은 수필 2023.08.19

단풍깻잎 / 유점남

단풍깻잎 / 유점남 시장 한 귀퉁이에서 '노지 깻잎'이라고 쓴 쪽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뜻밖에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 것 같아 덥석 집어 들었다. 가을 일을 끝낸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거칠거칠한 감촉에서 진한 깻잎 향이 났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싸한 향기가 나를 부른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 이맘때면 어머니는 노르스름하게 단풍 든 깻잎을 소쿠리에 가득 따오셨다. 더는 내어줄 영양분이 없는 이파리를 서둘러 거두어도 이제 남은 것들은 스스로 알맹이가 되어 영글어 갈 것이었다. 윤기가 빠져나간 얼룩진 이파리는 하나같이 멍들고 찢어져 상처 난 것들뿐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에 맞서던 이파리엔 깨알 같은 점들이 모여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엔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꺾이지 않은 꼿..

좋은 수필 2023.08.10

술병/유강희

술병 / 유강희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아버지의 술심부름으로 나는 대두병을 들고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 점방으로 술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술을 사러 간다고 하지 않고 받으러 간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항상 술 앞에서 옷섶을 여미게 한다. 나는 한여름 시내를 건너고 들을 지나 대병이라고도 부르는 이 대두병에 막걸리를 받아서 훅훅 내리쬐는 땡볕 아래 어질어질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건너기 전 팽나무 밑에서 나는 그만 커다란 불경(?)을 저지르고 만다. 누가 볼세라 나무를 등지고 얼른 한 모금, 또 한 모금 숨죽여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병의 눈금을 조마조마 보아가면서 말이다. 땀은 찔찔 흐르고 목이 탄데다 호기심까지 칭칭 날 옥죄어 끝내 아버지 술을 탐하게 한 것이다...

좋은 수필 2023.08.10

보리 / 한흑구(韓黑鷗)

보리 / 한흑구(韓黑鷗) ​ ​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걷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은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리 속에 간직하..

좋은 수필 2023.07.31

머플러/문정희

춥고 고독한 사람이 어깨에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옷의 기원은 오늘날 우리가 머플러 또는 스카프라고 부르는 이 헝겊을 두르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였던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한 사각의 천을 두른 것이지만 그것 하나로 체온은 따스하게 유지되고 존재는 더욱 돋보이는 것이 머플러이다. 내가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나의 뚱뚱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한 20대 후반, 당황하다 못해 내린 처방이 강열한 무늬의 면 혹은 실크 스카프를 목에다 둘러줌으로서 시선을 위로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머플러는 패션을 넘어서, 내 이미지의 한 부분이 되었다. 최근에 뉴욕현대미술관(MoMA) 샵에서 산 목걸이처럼 가느다란 것에서부터 담..

좋은 수필 2023.07.30

을야乙夜 / 송귀연

을야乙夜 / 송귀연 타그락 타그라 터얼컥! 가마니 짜는 소리에 잠을 깬다. 걸대엔 세로 방향으로 새끼줄이 촘촘히 끼워져 있다. 어머니가 바늘대에 짚 두매를 맞장구치자 아버지가 바디를 힘껏 내리친다. 씨줄을 교차하며 짚 넣기를 반복하니 가마니가 뚝딱 완성된다. 머리맡의 등잔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마구간에선 누렁이가 콧김 내뿜는 기척이 난다. 옛날 어른들은 종일 고단한 일을 하면서 밤엔 시간을 쪼개어 가내부업을 했다. 할머니는 물레를 저어 실을 잣고 베를 짰으며, 아버지,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았다. 방안엔 늘 먼지와 지푸라기가 풀풀 날렸다. 어린 우리는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한잠 푹 자고 나면 대체로 열시정도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그제야 부스럭거리며 하던 일을 접고 자리에 들었다. 아버..

좋은 수필 2023.07.29

비설거지/송귀연

비설거지/송귀연 고빗사위다. 아침부터 매지구름이 덮인다 싶더니 흘레바람이 흙내를 들추며 문지방을 덮친다. 부리나케 장독으로 달려가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거둔다. 호박말랭이, 시래기타래도 정신없이 안고 뛴다. 열어젖혀둔 창문 틈이 생각나 후다닥 몸을 다시 일으킨다. 다행히 비는 틈새로 미처 발을 디밀진 않았다. 처마 밑에서 가만히 비를 긋고 바라보는데 아뿔싸! 마당 귀퉁이에 널어둔 버섯소쿠리가 눈에 띈다. 흥건히 젖어버린 버섯은 이미 축 늘어져 물먹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비가 오거나 오려고 할 때, 비를 맞혀서는 안 될 물건을 거둬들이거나 덮는 일이 비설거지다. 내가 사는 산골엔 자주 예기치 않은 비가 내려 당황하는 일이 많다. 비설거지처럼 농촌에서는 절기나 철마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

좋은 수필 2023.07.23

글꼬를 트다 / 문경희

글꼬를 트다 / 문경희 빗줄기가 시원스럽다. 오랜 가뭄 끝에 대지를 두드리는 단비다. 파피루스 위를 기는 상형문자처럼 난해한 균열을 제 가슴팍에 새겨 놓고 끊임없이 물을 호소하던 땅이 아닌가. 버석해진 갈급의 시간을 목젖 아래로 눌러 삼키며 땅은 고요히 해원의 의식에 들고 있다. 타닥타닥. 종회무진 자판을 누비며 문장을 만들어 내는 손가락처럼, 비는 대지의 혈점을 짚어 순환의 물꼬를 이어간다. 하늘은 나날이 청명했으나 태양은 나날이 뜨거웠음으로, 땅은 호미날조차 허락지 않는, 단단한 불모의 현장이 되어가던 차다. 그들이 일구어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달플지는 생각도 못한 채, 그 메마른 젖줄에 여린 모종을 꽂으며 신바람을 냈던 내 손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흙에 두 발을 맡인 목숨들은 속수무책으로 새들거렸다..

좋은 수필 2023.07.22

겨울 강 / 설성제

겨울 강 / 설성제 꽁꽁 언 강 위에 그림자 하나없다. 겨울강이 냉기만 품는데도 강으로 나가는 것은 답답한 내 속을 풀어보고 싶어서다. 강이든 사람이든 자주 만난다고 그 속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앞마당처럼 강변을 거닐지만 강의 폭이나 깊이를 가늠할 뿐이다. 강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어찌 속을 다 알 수 있으랴. 맵찬 날이 거듭될수록 겨울강은 빗장을 걸 뿐이다. 겨울강이 쓸쓸해 보인다. 곁에 있는 풀조차 물기를 거두었다. 발을 담그던 새도 떠났으니 스스로 견뎌낼 방법을 생각하느라 침묵 중인가 보다. 구름도 하늘도 산자락도 감히 강의 품에 머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쩌면 강은 이미 외로움을 넘어서 버린지도 모르겠다. 그 무엇도 개의치 않은 채 한 계절을 보낸다. 나는 그것을 타성에 젖은..

좋은 수필 2023.07.20

존재의 테이블 / 나희덕

존재의 테이블 / 나희덕 나에게는 "존재의 테이블"이라고 남몰래 부름직한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다. 노트 한권을 올려놓으면 꽉차버리는 아주 작고 둥근 탁자인데, 나는 그걸 마루 한구석에 놓아두고 그 앞에 가 앉고는 한다. 모처럼 혼자 오롯하게 있는 날, 나는 무슨 의식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처럼 실내의 전등을 다 끄고 볕이 가장 잘 들어오는 창문 쪽을 향해 그 테이블을 가져다놓는다. 그러고는 두 손을 깨끗이 씻고 차 한잔을 그 옆에 내려놓고 앉는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니면 그저 얼하게 앉아 있노라면 마음의 사나운 기운도 어느 정도 수그러드는 것이다. 어쩌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그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들을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살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테이블을 ..

좋은 수필 2023.07.20

착지 / 설성제

착지 / 설성제 ​ ​ 그것은 추락, 비둘기 한 마리가 카페 건물 테라스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주먹만 한 회색 돌덩이 같은 것이 빙그르르 공중회전을 하며 내 눈앞을 스치는 순간, 나는 친구가 얼마 전 개업한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막 자리에 앉는 순간이었다. 비둘기 날개에 힘이 다했는지, 테라스 화단에 핀 꽃향기에 취했는지, 아니면 비를 피하다 처마 밑으로 들어와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일이지만 추락 중인 비둘기 앞에서 내 심장 또한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친구는 땡전 한 푼 없이 가게를 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제 마지막 젖 먹던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카페 사업에 도전을 했다. 인테리어와 소품 구입에 수십 일 동안 잠을 설쳐가며 발품을 팔아 정성 어린 카페를 마련했다. ..

좋은 수필 2023.07.20

아버지의 강/목성균

아버지의 강 목성균 아버지의 오른쪽 어깻죽지에 손바닥만한 검붉은 반점(斑點)이 있다. 그 반점은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운 아버지의 완강한 힘과 권위(權威)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점은 선천적인 것이지, 병리적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나이 팔십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셨고, 지금은 비록 중풍 든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시고도 병객인 체를 않고 지내시는데, 나는 그 반점이 원자로의 핵처럼 당신을 지탱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버지의 그 반점을 처음 본 것은 이 나던 해 여름, 낙동강 상류의 어느 나루터에서다. 아버지와 나는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그때, 열네 살인 나는 산모퉁이를 돌아서 엄청난 용적(容積)으로 개활지(開豁地)를 열며 흐르는 흐린 강을 아버지의 등뒤에 움츠리고 서서..

좋은 수필 2023.07.17

요강 / 김정화

요강 / 김정화 ​ 궁둥이를 빼고 앉았다. 앞다리를 세운 새끼 호랑이가 한쪽으로 얼굴을 비틀고 빤히 쳐다본다. 등짝에 손잡이까지 달고서 커다란 입을 벌린 채 하품이라도 뿜는 시늉이다. 익살스럽지만 경박하지 않다. 소박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도 않다. 왕궁터에 몸을 묻었으니 분명 귀하신 분을 모셨으리라. 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스스로 바지춤을 내리게 하는 귀물이다. 백제 남성용 소변단지 호자虎子를 만났다. 요강에는 삶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제는 주로 골동품점에 자리하고 있지만 가끔 유적지 껴묻거리 속이나 박물관 유리벽에서 옛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보리 찻잔을 닮은 백제 여성용 요강은 정박한 조각배처럼 여유롭고, 조선 여인의 부장품인 명기 요강은 간장 종지마냥 앙증맞다. 한국 ..

좋은 수필 2023.07.16

손빨래/정둘시

손빨래 정둘시 아침 밥상을 다 차렸는데도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출근을 서둘러야 할 사람이 왜 이리 태평이냐고 혼잣말을 하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린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당혹스럽게도 남편이 뒤 베란다 세탁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손빨래까지 할 생각을 하다니. 늦복이 터진건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발꿈치를 높이고 살며시 들여다보니, 와이셔츠 한 장을 비벼 빨고는 맑은 물이 나오도록 헹구는 중이다. 집 가까운 거래처에 출장 온 아들이 어제저녁에 벗어둔 옷이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빨래하는 그의 뒷모습은 정성스럽다 못해 숙연해 보인다. 바쁜 시간에 무슨 청승이냐고 재촉하려다 입을 다물고 만다. 오늘..

좋은 수필 2023.07.16

호야등을 켜며 / 박금아

호야등을 켜며 / 박금아 지금 막 새벽 어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심지를 내리고 걸어둔 듯, 손을 대면 온기가 전해질 것 같았다. 유년의 고향 집 마루 기둥에 걸려 있던 호야등이 생각났다. 희부연 등피 속으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가물가물해진 시간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사흘이 멀다고 호야등을 손질했다. 등피를 닦고 석유를 채우고 심지를 갈아 끼우는 일 모두,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심스레 떼어낸 등피가 멍석에 놓이면 우리 어린것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등피를 닦을 때의 아버지는 제사장 같았다. 문지르고 씻고 닦기를 여러 번, 맑은 물로 헹군 등피를 바람이 잘 통하는 안방 마루 위 나무 시렁에 올려두고 말릴 때면 삽시정저(揷匙正箸)* 후의 ..

좋은 수필 2023.07.15

잠 / 김희자

잠 / 김희자 연 이틀을 잠만 잤다. 때를 잊은 채 잠에 빠졌다. 동면하던 생물들이 기지개를 켠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잠 속을 파고들었다. 평소 늘어지는 성질이 못되니 수면시간도 짧다. 하루 네댓 시간을 자며 살아왔던 내가 이불 속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앉아보았지만 가라앉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소태 같은 밥을 겨우 한 술 뜨고는 엉금엉금 기어 침대로 갔다. 창백한 낯빛이며 푹 꺼진 눈의 몰골,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정신이 흉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전신까지 놓자 모든 것이 솜처럼 풀렸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을 빼고는 검불처럼 너부러져 잠만 잤다. 휴대폰도 멀리 했더니 무슨 일이 있냐고들 아우성이었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평소와는 다른 나를 별견하며 가만..

좋은 수필 2023.07.15

마스카라/김희자

마스카라/김희자 여자의 하루는 마스카라가 연다. 둥근 우주 속의 저나 나나 자존심은 매한가지건만 K는 오늘도 속눈썹을 바짝 치켜세운다. 처진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여 쓱쓱 말아 올린다.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밋밋한 속눈썹과 마주 닿자 빳빳하게 굳어진다. 두세 번의 덧칠이 이어지니 마법을 부리듯 눈맵시가 풍성하게 살아난다. 그마저 성에 차지 않는지 그녀는 라이터로 성냥개비를 벌겋게 달군다. 달구어진 성냥개비로 속눈썹을 아찔하게 세울 때 여자는 가장 도도하다. 사람의 얼굴 생김새는 눈이 지배한다. 눈 화장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면면이 달라진다. 눈 화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단연 마스카라가 아닐까. 마스카라를 바를 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내리깐다. 다리를 꼬고 앉아 거울을 응시하는 포즈 또한 ..

좋은 수필 2023.07.15

꼭두/서소희

꼭두 서소희 나무 인형들이 웃고 있다. 한복 차림으로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어떤 이는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 있기도 하다. 재주 부리는 자, 시녀, 소고치는 자, 모두들 자신의 역할을 자랑하고 있다. 대부분 밝은 표정이지만 그 인상이 왠지 섬뜩하다. 어찌 보면 웃고 있는 얼굴이고 또 어찌 보면 저승사자 같다. 제각각의 형상으로 있지만 ‘사람’이라는 단어처럼 ‘꼭두’로 불린다. 꼭두는 어둠속에서 빛으로 안내하는 일을 한다. 육신을 떠난 혼백이 걸어가야 할 두려움의 길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래서 상여의 꼭대기에 자리하여 이승을 떠나는 자의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준다. 슬픔을 위로하며 허드렛일을 해준다고 구전되어진다. 그들은 거추장스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

좋은 수필 2023.07.14

읽지 않은 편지/장현심

읽지 않은 편지 장현심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됐다. 특수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재난 지역의 극한상황 속에서 본분을 지키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름대로 내 젊은 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당시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도 수동적이었다. 상대가, 마음의 키워드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해도 대답을 피하거나 감정을 눙치는 것이 예사였다. 나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사람들은 주인공 '유시진 대위'와 '의사 강모연'이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연애 세포를 깨운다고 아우성쳤지만 나는 조연 커플인 '서대영 상사' 와 '윤명주 중위'의 연애에 안달이 났다. '쓰리스타' 장군 아..

좋은 수필 2023.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