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쌀밥전傳 / 김용삼

쌀밥전傳 / 김용삼 ​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선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넌 혼자야’라는 판결문을 거머쥐고 법원 문을 나설 때, 사람들의 시선은 돋보기 해 모으듯 나를 향했고 간혹 수군거림까지 환청으로 귀에 박혔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은 주위에서 갖은 처방을 들이댈수록 울컥울컥 부아로 나타났다. 생채기는 이대로 두면 더 곪을 것 같았다. 만원 버스에서 갑자기 가슴을 조여 오는 증세가 병이란 것을 알았을 때 ‘도피’를 감행했다. 큰 저수지를 품에 안은, 꽤 높은 농장을 도피처로 정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세상과 완전 차단된 곳은 아니지만 애써 사람을 청하지 않으면 그나마 ‘관계’에서 오는 복잡함은 덜만 했다. 때맞춰 쌀밥도 거기로 들어왔다. 녀석은 아직 내 손이 필요한, 갓 젖 뗀 애송이였다. 맑고 ..

좋은 수필 2023.12.27

우화를 위하여 / 공순해

우화를 위하여 / 공순해 ​ ​ 아침부터 집안에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냇손자 때문이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캠핑을 겸해 갖는 슬립 오버 생일잔치에 간다. 이제 여섯 살 된 본인은 멋모르고 가겠지만 가족에겐 낯선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몇 아이를 이렇게 치렀으나 처음 보내는 그때마다 낯선 긴장감은 가시질 않는다.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 아련한 심정으로 즐거워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즐겁고 흥분된 감정 외에는 집 떠나는 서운함 또는 두려움 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른들만 대책 없이 긴장했을 뿐이다.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 선생님이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미리 안녕을 고하고 전화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음성은 갈라져 지치고 피곤하게 들렸다..

좋은 수필 2023.12.27

오징어 / 정해경

오징어 / 정해경​ ​ ​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 할머니를 따라서 시장에 갔다. 어느 가게에 들어서는데 통로 양쪽에 둥그런 멍석이 펴져 있고 각기 다른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쪽은 볶은 땅콩이었고 한쪽은 오징어 다리를 오므라지지 않도록 가느다란 나무 꼬챙이에 꿰어 말린 것이었다. ​ 처음에는 그것이 온전한 마른오징어 한 마리인 줄 알았다. 외눈이긴 하지만 눈도 하나 달려 있고 어찌 보면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위로 뻗쳐 날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있는 둥 마는 둥 보잘것없는 것이 다리는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자그마치 열 개나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예닐곱 살쯤, 1부터 10까지 쓰는 연습을 한창 하고 있었는데 오징어 다리가 열 개라는 것이 왠지 흐뭇했다. 지금 같으면 '오징어 참 수학적 ..

좋은 수필 2023.12.27

비굴한 굴비 / 공순해

비굴한 굴비 / 공순해 깊은 바닷속은 깜깜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별천지가 벌어져 있을까? 빛이 투과할 수 없으니 깜깜할 게다. 그러나 깊은 바닷속 사진을 보면, 뜻밖에도 화려한 빛깔로 일렁인다. 붉은 말미잘, 초록 꼬리에 검은 바탕 흰 줄무늬 물고기, 노랑 꼬리에 검정 바탕 청색 줄무늬 물고기, 흔들리는 연초록색 수초들... 노랗거나 주황색인 비늘을 번뜩이는 물고기에 이르면 찬탄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건 아예 파스텔화(畵)가 아닌가. 들여다보노라니 슬며시 의문이 인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심연(深淵)에 어찌 저런 세계가 존재할까? 깊은 산 골짜기, 인적 없는 모퉁이에서 홀로 피고 지는 꽃 같구나. 안타깝다. 그래, 이게 바로 생명이다. 미물조차 생명을, 존재함을 드러내려 그 깊은 심해(深海)일망정 ..

좋은 수필 2023.12.27

바람의 목소리/마경덕

바람의 목소리 마경덕 작업실 이층 추녀 끝에서 풍경이 운다. 잠잠하던 풍경 하나가 입을 열고 있다. 바람의 크기에 따라 풍경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은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건너오다가 이내 흩어져버린다. 바람이 센 날은 요란해서 별로 감흥이 없다. 자발맞게 몸을 흔드는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한다. 그저 곁을 스치듯 슬쩍슬쩍 등을 미는 정도가 좋다. 고요가 몸을 여는 소리, 침묵이 아람처럼 벌어지는 소리, 허공의 징검돌을 밟고 조심조심 건너오는 소리는 귓맛이 있어 깊이 스민다. 무언가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그 애련하고 가녀린 소리는 길가 냉이꽃의 목을 흔들던 한 줄기 바람이거나 풀잎을 어루만지던 바람일 것이다. 아마도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을 것이다. 허공의 오솔길을 걸어 내게로 올 ..

좋은 수필 2023.12.22

마루의 품 / 허정진

마루의 품 / 허정진 대청마루에 누워본다. 어느 시골 한옥마을의 여름 한낮이다. 한달살이하는 친구가 텃밭에 푸성귀를 따러 간 사이 사지를 뻗고 마루에 몸을 맡겼다. 삽상한 바람이 출렁이고 갓 맑은 푸름이 치렁하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시계 침 소리도 느려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도 쩍, 허공에 금이 갈 것 같은 고요다. 담장 너머로 덩두렷한 산 능선이 정물화처럼 걸려있고 땡볕의 마당에는 먼 산 뻐꾹새 울음이 휑뎅그렁 뒹군다. 마루가 시원하면서도 따뜻하다. 청정(淸淨)이고 정숙(靜淑)이다. 마룻바닥에 세 들어 사는 바람이 술래잡기하듯 처마와 들창을 들랑거린다. 시공을 초월해 시절 좋은 사극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어렴성 없는 강아지 한 마리 마루 밑에서 턱을 고인 채..

좋은 수필 2023.12.19

김장 버티기 / 은유

김장 버티기 / 은유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 소리 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

좋은 수필 2023.12.17

겨의 노래/김선주

겨의 노래/김선주 등겨를 본 지가 오래다. 어린 날, 부모님은 식구가 먹을 양식만큼만 마을 앞 들녘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 추수를 마친 대청마루에 쌓인 것이 나락과 싸라기, 등겨였는데 이제 정미된 쌀 이외는 구경하기 어렵다. 지난 추석 무렵이다.“어무이예, 명절 잘 쇠시이소오." 농사짓는 오빠의 선배로부터 찹쌀 한 포대를 선물 받았다. 포대를 풀어 헤치고 한 줌 쥐었다. 마트에 포장된 찹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맑은 우유 빛깔에 곁들인 촉촉함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야들한 속살의 맵시를 자랑하는 사이로 여느 것과는 다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폈다. ‘뉘' 였다. 정미된 찹쌀 포대 속의 외돌토리다.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많은 과정을 거치며 내게로 오기..

좋은 수필 2023.12.17

무서운 년/김점선

무서운 년/김점선 마흔을 훌쩍 넘겼던 어느 해의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 집에 왔다. 구석방에서 남편을 앉혀놓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도 없었다. 부모님이 가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학교에서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 중 한 놈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놈들이다. 그러니 ..

좋은 수필 2023.12.17

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제

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제 ​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늘 중년이다. 아버지는 환갑의 나이에 돌아가셨는데도 지금도 나의 아버지, 하면 반사적으로 중년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중년을 나이로 환산하면 서른 살에서 쉰 살 정도일까. 연부역강. 사나이로서는 알맞은 경륜에 자신감 있는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황금기다. 그렇지만 내가 아버지를 중년으로만 기억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 열세 살이 되기 직전의 겨울, 나는 전형적인 사춘기적 증상과 맞부딪쳤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주제 파악 불량에서 기인하는 자존망대형 조발성 천재 증후군’이라 하겠는데. 그 증상은 먼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일단 그 증상에 관해 아버지의 아들인 이상, 아버지도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했..

좋은 수필 2023.12.17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나의 아버지는 한시라도 재미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다. 피란지에서 보낸 대학시절에는 늦둥이 막내아들답게 부모를 속여 타낸 돈으로 친구들과 바닷가를 쏘다녔고, ‘증산 수출 건설’의 시대에는 뇌물과 접대로 굴러가는 노가다 판의 젊은 건설업자로서 재미있을 만한 일은 모두 다 해봤다. 심지어는 일흔 되던 해 암이 재발해서 의사들이 손도 못 대보고 환부를 덮어버린 지 한 달 만에 골프장에 나갔던 분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배짱과 낙천성뿐이었던 아버지는 그리 행운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지략과 언변으로 돌파해 나가려고 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아버지의 밑천이 있다면 그것은 농담이다. 아버지는 늘 농담을 해서 주변 사람을 웃게도, 또 기가 차게도 만들었다. 부도가 나서 현장 십장..

좋은 수필 2023.12.17

현장 / 장미숙

현장 / 장미숙 늦잠에 빠진 도시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버스가 지나간다. 눈 밝은 버스는 꼬부라진 길을 잘도 달려와 정류장에서 긴 하품을 쏟아낸다. 눈곱도 떼지 않은 가로등은 골목의 어둠을 쫓느라 긴 손을 휘젓는다.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 하나, 밤새 쌓인 소음을 쓰느라 분주하다. 아침 일곱 시, 밤을 새운 사람들은 어둠을 끌어들이고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은 빛을 불러들이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주차장에서 자가용을 빼내느라 애를 쓰고, 어떤 이는 묵직한 오토바이에 묵직한 몸을 얹는다. 날렵한 자전거 한 대 그들 옆을 가뿐하게 스쳐간다. 사계절, 불 꺼진 적 없는 상가의 간판이 피로에 찌들어 파르르 떤다. 낡은 수레 하나가 뒤척이는 아침을 힘겹게 끌고 온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손잡이에 매달린 채 그네를 ..

좋은 수필 2023.12.16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겨울산은 묵묵하고 담담하다. 골격을 드러낸 채 참선에 든 수묵담채화 속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뜨거운 숨을 내쉬다보면 마음도 시나브로 담백해진다. 산은 철마다 매력이 있지만, 삶의 장식을 하나씩 털어내는 인생의 가을이라서 그런지 이제는 겨울에 마음이 더 끌린다.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절, 산골에서는 산이 친구였다. 마음이 나만한 다람쥐와 도롱뇽에게 장난을 걸고, 진달래, 산딸기를 따먹고, 머루랑 다래랑 놀다보면 어느새 키가 한 뼘쯤 자랐다. 때가 묻지 않은 연둣빛 소년에게 나무는 두 가지 심상을 주었다. 햇살바람에 이파리를 팔랑이는 활엽수는 친근감이 들었고 하늘도 찌를 듯 뾰족한 침엽수는 경외감이 들었다. 산에서 꿈을 키운 소년은 청년이 되자 산골을 떠났다. 법관이 되기 ..

좋은 수필 2023.12.15

텃밭 / 김선녀

텃밭 / 김선녀 비가 내린다. 테라스 바닥에 빗방울이 피우는 찰나의 꽃들을 본다. 피는 순간 져버리는 꽃이 촘촘하다. 고요한 새벽에 소리로 내리는 꽃을 보며 울컥한다. 비 오는 새벽은 맑은 공기 같으면서도 어둠에 갇힌 숨 같다. 창가에 놓인 전동침대 위 엄마 숨소리 같기도 하다. 하도 조용해서 내 몸도 새벽이 된 것 같은.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공책에 소리를 담고 꽃을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그런 새벽과 마주하고 있다. 테라스 앞 작은 텃밭은 엄마의 삶이었다.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 풍경화를 그렸다. 겨울 끝으로 추위가 몸을 털기 시작하면 흙을 토닥여 땅을 깨우고 봄 향기를 입혔다. 깊이를 더듬고 뒤집은 땅에 햇살이 고루 들면 심심한 밭에 거름을 부렸다. 고향의 냄새인 듯 아닌 듯 썩..

좋은 수필 2023.12.10

단나/박순태

단나/박순태 육면체의 근원은 점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을 채워주는 물체가 된다. 입체의 출발은 미미한 점이었으나 결과는 삼차원 예술품이 되었다. 작은 것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후에는 당초 예상할 수 없었던 큰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 삶의 삼차원 예술인 단나도 초배기라는 옛날 도시락이 근원이다. 단나는 남을 사랑하여 나눈다는 뜻이다. 이 일은 이순을 코앞에 둔 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초배기를 만난 것은 포항의 '덕동마을 민속 박물관' 이다. 그곳에는 항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옛날 물건이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정감이 가는 물건에서부터 아주 생소한 물건까지 진열 되어 있다. 그때 내 눈을 잡은 것은 옛날 도시락, 초배기다. 유리관을 통과한 내 마음이 허기..

좋은 수필 2023.12.03

빗/조문자

빗/조문자 머리를 빗질하는 시간은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빗은 여인의 모습을 더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머리를 빗질하면서 삶의 궤적과 사랑의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은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을 빗어내는 조그만 현악기처럼 보인다. 빗을 샀다. 화장대 한쪽에 딱히 이유도 없이 사들인 빗들이 풀꽃처럼 빽빽이 통에 꽂혀 있다. 빗살이 논의 벼 포기처럼 촘촘히 붙어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빗은 각 시대 생활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다. 최근에 와서 인체 공학과 재료 공학의 발달은 빗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피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넓적한 쿠션 빗을 비롯하여 생머리 구부리는 드라이용, 긴 머리 다듬는 일자형 빗, 짧은 머리에 꼬리 빗, 웨이브를 살려주는 도끼 빗까지 색상..

좋은 수필 2023.12.03

사마귀/조미정

사마귀/조미정 눅진한 이불솜을 널어놓은 창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비집고 들이치던 오후이다. 열어놓은 창으로 사마귀 한 마리가 들어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지레 겁을 먹고 긴 막대로 허공을 툭툭 쳐 조용하던 일상을 흔들어 놓은 건 아마도 내가 먼저였을 것이다. 못마땅한 듯 사마귀가 지그시 나를 노려본다. 배가 납작한 수컷이다. 언젠가 다큐에서 사마귀의 교미 장면을 보았다. 열 시간이나 계속되는 짝짓기 동안 배고픔을 참지 못한 암컷이 수사마귀의 머리를 뜯어 먹고 있었다. 몸의 절반이 사라졌는데도 짝짓기의 행위를 멈추지 않을 정도로 수사마귀는 집요했다. 자기의 영역 안에서 평생 혼자 살아가는 사마귀는 교미를 할 때만 페로몬을 방출하여 수컷을 유인한다. 그 유혹은 치명적이지만 수사마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숙..

좋은 수필 2023.12.03

머리카락/정성희

머리카락 / 정성희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 다음에는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지는 컴컴한 심연 속..

좋은 수필 2023.12.03

못 / 배단영

못 / 배단영 못을 뺀다. 낡은 벽장을 수리하기 위해 못 머리에 장도리를 끼우고 낑낑거리며 못을 뽑았다. 못은 야무진 벽을 뚫고 들어가 긴 세월 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제 크기의 수십 배, 수백 배도 더 되는 무게를 견디느라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무엇을 얹거나 걸면 못은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억지로 끌려나온 못이 허리 굽은 아버지를 닮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는 해가 뉘엿할 때 들판으로 논물을 보러가셨다. 아침저녁으로 들판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벼들의 성장이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버지의 다리가 허방을 짚는듯하더니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좁은 논둑은 아버지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흙을 밀어내며 내려앉았고 그 바람에 논바닥으로..

좋은 수필 2023.12.01

나무 한 그루 / 정문숙

나무 한 그루 / 정문숙 동 트기 전, 희붐한 거리의 풍경은 운치를 더하고 수시로 정체되는 도심의 길에 익숙하던 네 바퀴도 간만에 신바람으로 속도를 높인다. 근래에 남편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지 싶다. 집을 나서며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으로 충만해진다. 한때 우리는 달랑 지도만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한 숲을 찾아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는 말이 없어도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유난을 떠는 잉꼬부부라고 지인들의 눈총 아닌 눈총도 꽤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그럴 여유를 잃어버렸다. 부부 사이도 건조해져 아이들이 매개체가 되는 대화만 오고갔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떠난 후 둘만 남겨진 우리는 부부라는 오래된 이름으로도 ..

좋은 수필 20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