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포장마차를 타다 /심선경

포장마차를 타다 심 선 경 분명 이름은 마차인데 포장마차엔 말馬이 없다. 그래서 이 마차는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다리가 잘려버린 말 대신, 의족처럼 둥그런 바퀴를 끼워 놓았지만, 그마저도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붕을 덮은 방수 천막은 네 귀를 잡아당겨 못질을 단단히 하고, 아예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무거운 약수통으로 눌러 꼬리를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마차에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마부는 친절히 맞이하고 또 배웅한다. 가끔은 “나 여소,” 하며 포장을 걷어 올려 승객의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마차로 유인할 때도 있다. 강철같이 두텁고 육중한 세상의 벽에 여러 번 부딪쳐 본 이들은 안다.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는 것..

좋은 수필 2024.02.05

살구 / 정은아

살구 / 정은아 검뿌연 하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온 사방에 꽂혔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겨보지만, 무작위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설익어 단단한 것들은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이 앳된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떤다. 스치듯 살짝 맞아도, 무른 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상처는 짓무르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동안 마른장마의 연속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살구에게는 축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당분을 축적하고, 농부가 퍼 올려주는 지하수를 빨아 먹고는 몸뚱이를 불려 나갔다. 풋내나는 초록빛이 차츰 줄어들고 노란빛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이 멀지 않았다. 살구의 당도는 농익은 주황빛이 띨 때가 제일 높지만, 상품성은 노란빛을 띠고, 물컹하지 않을..

좋은 수필 2024.02.04

와이셔츠 / 정은아

와이셔츠 / 정은아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옷장을 열어 아내의 옷을 쓰다듬고, 입어보는 장면. 남겨진 이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도, 괴이하게도 보였다. 왜 저렇게도 잊지 못할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 칫솔, 스킨, 로션, 면도기, 속옷, 티셔츠, 남방, 바지, 벨트, 점퍼, 정장, 코트, 양말, 운동화....... 그의 물건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갈 삶은 아직 초입인데, 나와 아이만 길 위에 남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설명해야 하나. 남편이 사라진 날 이후로, ‘아빠는 출장 중’이어야 했다. 아이가 아..

좋은 수필 2024.02.04

전등 / 정은아

전등 / 정은아 빛과 어둠. 켜짐과 꺼짐. 생과 사.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딸깍. 꺼져버린 빛이 불현듯 켜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이미 빛을 잃은 생이, 다시 빛날 수 있을까.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릴 순 없다.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걸을 수 없다며 다시 앉았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투정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아이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기가 되었다고 놀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5살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 갔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되도록 걷지 말고, 뛰지도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업었다. ‘보고 있는 거야? 애 낳고 한 달도 안 된 산모가 보이긴 해?’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실내가 순식간에..

좋은 수필 2024.02.04

해지/정은아

해지 / 정은아 핸드폰을 해지하러 대리점에 갔다. 주인 잃은 핸드폰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해지 전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전원을 켰다. 다시 생명을 얻듯 불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왔다. 잘못 누른 걸까. 재빨리 소리를 줄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음악 파일이 재생 중이었다. 꿈속에선 보이나 봐. 꿈이니까 만나나 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 봐. - ‘부활’의 노래. ‘생각이 나’ 남편의 핸드폰은 다시 살아나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눈물샘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대리점 안은 고객들로 소란스러웠고,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으로 숨었다.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노래가 하..

좋은 수필 2024.02.04

손톱 / 허효남

손톱 / 허효남 손톱은 그리움이다. 가만히 있어도 스멀히 자라나서 잘라내도 또 자라나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쇠붙이를 들고 톡탁여도 웃자란 그리움들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길 잃은 마음들이 사방천지로 흩뿌려지며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깎을수록 더 단단히 돋아나는 그리움은 기약 없는 시간을 맹세한 채 영원토록 잘라내야 할 형벌을 내린다. 그리움이 지난 것을 불러 내 앞에 붙들어 세운다. 아이의 손톱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주말에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 준 것이라 했다. 돌 위에 여린 잎을 놓고 찧으며 내 손톱을 물들이던 시간들도 있었다. 백반가루를 넣어 곱게 풀린 꽃잎들을 손끝에 올려주던 분도 내 할머니였다. 아이의 할머니도, 내 할머니도 앙증맞은 손을 잡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꽃잎처럼 단아하고 향이..

좋은 수필 2024.02.04

군불을 지피며/정원정

군불을 지피며 정 원 정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

좋은 수필 2024.02.02

갈목비 / 전영임

갈목비 / 전영임 어두운 터널의 수렁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지나, 너울너울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살아온 인생길 가장 화려하고 호강스런 순간이었다. 동구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일곱 계단을 올라 두 평 남짓 당신의 체취가 배인 사랑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움츠려있던 방의 기운이 보무라지처럼 풀썩 일어나 소스락거렸다. 당신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녀린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너울가지가 없어 아무 말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들의 밭갈이며 힘든 일을 도와주시던 듬쑥한 분이었다. 풀에 할퀴고 밭일에 무디어진 손으로 농사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갈목비를 엮으셨다..

좋은 수필 2024.02.02

경계 / 전미경

경계 / 전미경 봉분에 달라붙은 잔디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 잔디를 입힌 탓에 둥지를 틀지 못할까 봐 가슴 졸였는데, 온전히 뿌리내려 자리 잡은 걸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인다. 군데군데 잡풀이 눈에 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뽑히는 걸 보니 잡풀은 제집이 아님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술과 포를 올리고 절을 한다. 당장이라도 헛헛한 웃음 지으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딸 왔나.' 하며 반긴다. 마른 풀이 바람에 들썩인다. 힘겹게 받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떨어뜨리기 위해 헤아린 흔적을 바람도 아는 눈치다. 자신의 시든 삶을 정리하다 살아온 결대로 남고 싶은 풀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봉분을 사이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길이 너무 멀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

좋은 수필 2024.02.02

말뚝 / 이은정

말뚝 / 이은정 ​ ​ 텃밭 반만 갈아 퇴비를 뿌려놓았다.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그물을 두를 계획이다. 목장갑을 끼고 적당한 위치를 찾아 말뚝을 박는다. 세운 말뚝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준다. 제가 놓일 자리를 찾으란 뜻이다. 흔들흔들. 점쟁이 굿하듯, 노인네 지팡이 흔들 듯, 흔들흔들 흔든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한다. 한쪽 끄트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쿵 소리 한 번에 말뚝의 키가 훌렁 줄어든다. 세 군데 말뚝을 박았다. 니은 모양으로 양쪽 끄트머리와 가운데 코너 부분이다. 튼튼하게 박힌 걸 확인한 후 초록색 그물망을 두른다. 한쪽 끝에 박은 말뚝에 그물망을 고정하고 코너를 돌아 다른 끝에 가서 고정한다. 제법 그럴싸한 그물 벽이 생겼다. 가운데..

좋은 수필 2024.01.30

등의 방정식​ / 현경미

등의 방정식​ / 현경미 ​ ​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좋은 수필 2024.01.28

막차 / 문경희

막차 / 문경희 출발 10분 전, 실내 조명등이 켜진다. 내내 굳건한 함구를 풀지 않던 슬라이딩 도어도 스르르 빗장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모든 것을 허용하겠다는 따뜻하고도 너그러운 호의에 감전되듯, 사람들은 하나둘 텅 빈 사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우람한 네 바퀴가 나를 인도해 줄지니. 한 시간 남짓, 언젠가부터 그에게 나를 맡기는 고요의 시간이 좋아졌다. 그를 무한 신뢰하며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하고, 졸다, 깨다, 혼곤하게 정신의 풀기를 눕혀도 본다. 붉은 띠가 선명한 내 집행 시외버스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동승하기 위해 나도 기다림을 추스르고 탑승구로 들어선다. 모바일 승차권을 다운받는다. 본의 아니게 최근 들어 자주 도시를 오가다 보니 내가 애호하는 일인용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스마트하..

좋은 수필 2024.01.25

복숭아씨/박혜자

복숭아씨/박혜자 과일가게 주인이 맛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 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 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 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 ..

좋은 수필 2024.01.21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결미는 나라마다 다르게 각색된단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개미가 과로사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시스템에 익숙한 쿠바의 경우, 베짱이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은 아름다운 노래로 귀를 즐겁게 해 주었노라고, 그러자 개미는 일밖에 몰랐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는 호의로 쾌히 식량을 나누었다나. 미국편은 좀 더 다이내믹하다. 자신의 밥은 자신이 버는 법이라며, 개미는 베짱이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낙심한 베짱이가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음반기획자가 이를 듣게 된다.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베짱이..

좋은 수필 2024.01.14

두루미 /안병태

두루미 /안병태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좋아한다. 묵직하고 도톰하여 돈다운 맛도 맛이려니와, 그보다는 동전의 뒷면에 나를 닮은 두루미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숲 노송 위에 한 다리를 접고 서서 사색에 잠긴 두루미,그 고고한 자태에다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의 가냘픈 육신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외모만큼은 내가 그를 닮았거나 그가 나를 닮았거나 둘 중 하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가끔 저울에 올라가 본다. 바늘이 반 바퀴를 겨우 돌아가 멈춘다. 구십 근인가? 옷, 구두까지 몽땅 합쳐도 백 근이 못되는 체중이다. 사반세기 전 인사기록카드에 기록했던 몸무게가 지금껏 변함이 없다. 허리띠를 새로 사면 삼분의 일쯤 잘라낸다. 그냥 두르면 두 바퀴나 돌아가..

좋은 수필 2024.01.14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높은 산길에 올랐습니다. 857번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길이었지요. 안녕! 나는 길의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초면례를 합니다. 길은 금세 내 인사에 대꾸를 해옵니다. 토끼풀꽃들이지천으로 피어 있고 산괴불주머니와 씀바귀 꽃, 현호색들이 어지럽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싸리나무 꽃들이 옅은 보라색의 구름들을 산기슭에 드리우고 있군요. 꽃향기들이 고즈넉한 시간들 사이로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길 위에 핀 꽃들을 길의 신이 내게 건네주는 꽃다발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꽃다발을 넙죽 받아든 나는 한없이 행복해져서 죽은 다음 세상에는 길귀신이나 되어 쓸쓸한 날 길의 신의 말동무나 되리라 생각했지요. 길의 신이라 해서 왜..

좋은 수필 2024.01.14

묵언의 바다/곽재구

묵언의 바다/곽재구 저문 시간이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실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꺽여 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 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를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바람은 순례자의 옷깃을 흔들고 , 일찍 도착한 철새 몇 마리가 순례자의 이마를 선회한다. 시베리아로부터의 비행을 거친 그들의 날갯 짓은 은빛으로 빛난다. 조류학자들이 먹이를 위해 혹은 번식을 위해 새들은 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쩌면 더 형이상학..

좋은 수필 2024.01.14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황동규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황동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애착의 도(度)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착각의 도도 높아진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애정을 쏟았으나 상대방이 몰라주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우정이든 성정(性情)이든 진정한 애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우리가 조..

좋은 수필 2024.01.13

윤영 수필 모음

안개에 깃들다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 어디든 사람 들어 묵고 있을 아파트 불빛들. 먼 바다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으로 너울거린다. 얼금얼금한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발걸음. 식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종소리. 사물의 형체는 묻고서 걸음과 종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저녁. 칼날이란 날은 죄다 뭉텅뭉텅 잘라먹고 이도 저도 아닌 흐물거림만 둥둥 떠다니는 섬들 지천이다. 문득 가슴이 ..

좋은 수필 2024.01.12

다듬이 소리/최윤정

다듬이 소리 최윤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 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 당긴다. 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

좋은 수필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