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흙꽃이 핀다. 손가락을 슬쩍 비트니 오므린 몽우리가 보시시 벌어진다. 흙 한 줌에서 생명력이 살아난다. 허공을 메울 잔가지나 바람에 하늘거릴 이파리 하나 돋지 못한 줄기지만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앞으로도 꽃송이 서너 개쯤은 거뜬히 피워낼 수 있으리라.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와 눈길을 사로잡는 빛깔은 없어도 투박한 질감이 마음을 당긴다. 그릇은 오롯이 인간의 도구다. 사발에 김 오른 밥을 담고 종지의 짠기를 더해 밥심을 돋운다. 너나없는 콘크리트 삶 속에 작은 토분이나마 식물을 심어 자연을 벗한다. 연잎 화반에 꽃불을 켜 주위를 밝히고 달항아리를 들여 희로애락을 품는다. 때때로 사람은 스스로를 그릇에 담는다. 제멋대로 크기까지 정하여 정신을 가두는 오류도 범한다. 땅에서 생명이 ..

좋은 수필 2024.01.10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윤미영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주초에 압착되어 간다. 균형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짓누르는 무게에 굴복하고 마는 두리기둥. 사지의 힘줄은 이미 터져버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한 치 오차 없이 결구해야 한다. 어긋나면 천 년이 위태하다. 보경사寶鏡寺 대웅전이 푸른 하늘아래 시대의 미감을 드러낸다.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인 사찰은 대덕 지명법사가 팔면경을 묻고 금당을 건립한 천년고찰이다. 팔작지붕의 기와와 외부 하중을 직접 받는 선자연의 날렵한 끝선이 받침목인 갈모산방(散防)에서 멎는다. 작도와 치목이 까다로워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는 선자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대웅전 네 칸 기둥의 밑동이 세월의 격랑에 결이 갈라..

좋은 수필 2024.01.10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허창옥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 허창옥 친구는 지금 한 시간째 이야기를 하는데 끊어지는가 하면 이어진다.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나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단아하지만 좀 지쳐 보인다. 그는 갈색 주름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소매 니트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다. 검소하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범어로터리의 횡단보도는 길다. 따라서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길다. 인도의 횡단보도 사이에는 그래서인지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백 년 수령, 수피는 거의 다 벗겨졌고 세월만큼 옹이도 깊게 패였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싱싱한 초록이다. 돌에 새겨진 나무의..

좋은 수필 2024.01.09

마늘 까던 남자/민혜

마늘 까던 남자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 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 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을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4.01.09

유화 한 점/김윤재

유화 한 점/김윤재 꼭 그 모습이다. 사십 년 전 그때처럼 집안으로 선듯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신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어린 시절 당신이 뛰놀던 앞마당이 나오고 오른편엔 외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배어 있는 사랑채가 있는데, 대문 앞에서 지루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나는 차 안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어서 들어가요 엄마. 괜찮아요. 어서." 그러나 어머니는 꼭 그때처럼 끝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셨다. 작고 마른 그림자가 주인을 따라 나섰다. 동네 어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무심하고도 나른한 노인의 모습이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는 각질이 벗겨졌고 몸통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다. 한쪽으로 기운 가지엔 벌레 먹은 나..

좋은 수필 2024.01.09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나는 지금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워 몸이 뒤틀린다. 몸속을 달리는 혈관들의 반란도 잠재우기 힘들다. 주인은 나의 존재를 잊은 건지 밀폐된 박스에 나를 쳐 박은 채 몇 달째 방치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흙과 풀냄새를 맡고 싶다. 아니, 자갈밭에라도 맨발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흔들리고 싶다. 어느 집 창고인지 부엌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이 너무나 답답하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이기고 땅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내 신체의 일부를 '감자 싹'이라고 부른다.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리는 것이 사람인가. 여름의 초입부터 삶아먹고 지져먹고 볶아서 입맛..

좋은 수필 2024.01.09

어린 날의 초상/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 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

좋은 수필 2024.01.06

지난 11월에는... / 김훈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좋은 수필 2024.01.06

으짜꺼시냐 / 정지민

으짜꺼시냐 / 정지민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

좋은 수필 2024.01.06

잉아/이상수

잉아/이상수 날실을 걸자 베틀 위로 흰 강물이 흐른다. 수백 겹 가닥이 물결이 되어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잉앗대가 위로 들려지고 그 사이로 씨실을 넣고 바디를 조여 베를 짜기 시작한다. 덜그럭 탁, 덜그럭 탁, 어머니는 한 척의 돛단배처럼 밤늦도록 강물 위를 덜컹거리며 떠다닌다. 잉아는 베틀의 부품이다.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고정해 놓은 굵은 줄을 말한다. 실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실을 촘촘하게 매어놓은 모양이 마치 국숫발을 장대에 널어놓은 것 같다. 스물하나에 어머니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학생이던 시동생 둘을 맡기고 입대해버렸다. 오롯이 가장이 된 당신은 병환으로 앓아누워 있던 시모를 비롯한 세 식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남..

좋은 수필 2024.01.05

몽당연필 / 최선자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

좋은 수필 2024.01.05

이유 / 송혜영

이유 / 송혜영 어찌 저리도 크고 원만하게, 온화한 빛으로 잘 늙었을까. 황혼의 호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호박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종묘상 앞이나 장터 난전에 모종이 나타난다. 땅이 일 년 농사를 허한다는 신호다. 어서 밭에 가자고 성화를 하는 모종 중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호박이다. 일단 울 밑에 심을 호박부터 챙겨놓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속을 보태는 건 호박이 밭작물 중에서 으뜸이어서이다. 호박 모종은 잎이 세 장 정도 나와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갓 젖 떨어진 정도의 어린잎이지만 스스로 생존하기에 모자람이 없이 오롯하다. 용수철 같은 넝쿨은 당장 내 손끝이라도 잡고 올라올 기세다. 어린 저것이 뿌리를 내리고, 땅심을 받아 잎이 무성해지고,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호..

좋은 수필 2024.01.05

누빈다는 것​/조미정

누빈다는 것​/조미정 ​ ​ ​ 한지함 속에서 누비 한복 한 벌을 꺼낸다. 쪽빛 삼회장저고리와 감색 두 폭 치마가 펄럭거리며 강물처럼 펼쳐진다.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과 기도가 박여서일까. 비단 천을 만지작거리자 안팎으로 가지런하게 누벼진 바늘땀이 가슴으로 굽이친다. 누비는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홈질하여 짓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해서 해거름까지 붙잡고 있어도 한 평 남짓 누빌까. 조급증이 일렁이지만 급한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누비는 낱장인 천들을 한 장으로 만드는 화합의 침선이다. 누비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몸의 치수대로 마름질한 후 품이 조금 더 넉넉하게 재단한다. 촘촘히 박은 땀이 주변의 천을 물고 들어..

좋은 수필 2024.01.05

도둑질/김현숙

도둑질 김현숙   저는 매일 도둑질을 합니다. 말 그대로 남의 것을 탐낸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 줄도 알고 그러면 안 되는 줄도 압니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욕심내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회성 말들입니다. 쓸 만한 게 많아서 주섬주섬 가져오다보니, 제 머릿속과 책상 위는 늘 포화상태입니다. 정리하지 않고 며칠 그대로 쌓아두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때로는 그 일회성이라는 것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동네마트에 갔더니, 신선코너 담당인 박주임이 마이크를 잡고 이러는 겁니다. ‘자 세상살이 우리만큼 아는 애호박이요. 오늘은 특가로 나와 앉았네요’ 말씀 참 맛깔나게 하시지요. 애호박이 세상사는 맛을 안다는 얘기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박주임..

좋은 수필 2023.12.28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일주일에 한 번 엄마가 오시는 날이다. 처음엔 한 달에 두 번만 오겠다 하셨지만 요즘은 수요 장날에 맞춰 꼬박꼬박 다녀가신다. 시장 구경도 하시고, 반찬거리도 장만하시고, 딸내미한테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엄마 말씀대로 안 올 이유가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 지난 4월 처음 오셨을 때를 돌아보면, 우선 문 열고 들어오시며 '숙아' 하고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선생님이라 불러주시지도 않는다. 또 의자 안쪽까지 등허리를 깊게 묻을 만치 자리도 편하게 잡으셨다. 하지만 쪽파며, 연근이 당신 공부할 동안 골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시다. 잠시라도 냉장고에 넣어두자하면 꼭 이러신다. '이게 뭐라고 전기 써가며 공을 들이냐'고. 당신 발아래다 모셔놓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

좋은 수필 2023.12.28

내외담/황미연

내외담 황미연 사랑채는 고요하다. 오수에 빠진 햇살이 다리를 죽 뻗고 누워있을 뿐 찾아드는 손님은 없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범절 있는 사대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未)시가 한참 지난 후였다. 사랑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읽고 있던 규방가사를 덮어두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내외담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였다. 손님상을 차리려고 과객인지 벗인지 종친인지 살펴보았으나 손님은 이미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올라서고 있다. 옥색 도포를 입은 뒷모습이 마치 지난번에도 며칠 묵고 간 적이 있는 그 사람 같다. 외출하려고 막 대문을 나서다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와 부딪쳤다. 깜짝 놀라 손을 놓치는 바람에 장옷이 벗겨져..

좋은 수필 2023.12.27

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

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 ​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 가난처럼 쓸쓸한 눈매를 하고서는 사과 몇 알씩을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과를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흡입했다. 온돌을 데워 가난을 눕히고 싶었다. 짙은 향기가 방안을 장식했다. 해가 저물고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면 푸른 달빛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발을 묶은 어둠은 방문 앞까지 와서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남자를 닮아 선량한 눈매며 도톰한 입술을 가진 아이 하나 낳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많은데 간절히 바라는 그녀..

좋은 수필 2023.12.27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 ​ 다 말할 수가 없다. 사실은 할 말이 많아서 그렇다. 아름다워도 '말할 수 없이'라고 하고 가슴 아파도 '말할 수 없는'이란 수식을 붙이지만 나는 그런 뉘앙스와는 비껴나 있다. '말을 다해봐야 뭐가 좋다고…'라는 뜻에 가깝다. 햇살이 기분 좋을 만큼 따스하고 창밖엔 가을 풍경이 가득하여 장의차 안에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잠시 잊고 있었다. 차창 밖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분이 두 손을 배 앞에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두 번인가를 한다. '아, 우리 차를 보고 그러는구나. 옛날 예의 법도인가 보다.' 망자와 천붕지통을 앓는 가족을 향한 절인가 보다. 모르는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인 그분의 숙연함이 따뜻하게 전해왔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 ..

좋은 수필 2023.12.27

엄마의 외출 / 이복희

엄마의 외출 / 이복희 그렇게 좋아하는 짜장면을 반도 못 먹은 채 애꿎은 젓가락 장난만 하고 있었다. “왜 안 먹어?” “그냥, 배가 아파서...” 하지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은 모처럼 엄마가 학교엘 오셨던 날이었다. 다른 엄마들과 달라 거의 학교에 온 일이 없던 엄마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적어도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형무소 아래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그 남자는 엄마의 고향 사람이며 바로 그 형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수인사만 나누고 그냥 헤어질 법도 한데 중국집까지 들어간 것을 보면 아마 친분이 꽤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짜장면을 시켜 주었는데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엄..

좋은 수필 2023.12.27

2월 / 서성남

2월 / 서성남 새벽 새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달이 2월이다. 어느 달보다 많이 지저귄다. 그 소리는 영하의 날씨를 뚫고 맑기도 하다. 집수리 중인 까치들은 둥지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상대를 부른다, 높지 않고 부드럽다. 여럿이 토론하듯 날카롭게 짖는 것과는 달리 온화하다. 다른 새들도 서로 부르는 소리에 교태가 있다. 숲의 악사인 청딱따구리 수컷의 연주를 자주 듣는 달도 2월이다. 속 빈 나무를 부리로 두드려대는 음은 드럼 소리 같기도, 대나무 통에 구슬이 구르는 듯도 하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눈앞을 가로지르던 직박구리도 날갯짓과 소리가 한결 순하다. 냇물 소리가 가장 정겨운 달이 2월이다. 채 녹지 않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물, 아기 옹알이 같고 엄마의 자장가 같다. 물이 잠깐 멈춘 자리에는..

좋은 수필 2023.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