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옹이, 그 아픔을 읽다/허석

옹이, 그 아픔을 읽다 허석 한옥이 멋스러운 전통찻집에 갔다. 방으로 안내되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다탁이 원목이었다. 넓고 묵직해 보이는 탁자 면에 물결치듯 부드럽게 뻗어나간 목리가 나무의 성정처럼 기품있고 웅숭깊다. 그런데 가장자리 쪽에 갑자기 회오리치듯 시커먼 옹이 무늬가 드러나고 표면이 우둘투둘 파인 곳이 있었다. 설핏, 옥에 티처럼 느껴졌다. 그때 ‘결만 있으면 상품인데 옹이가 있어서 작품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을 바꾸니 옹이로 인해 생긴 기하학적인, 비정형적인 나뭇결이 오히려 신선한 자연미로 다가왔다. 옹이는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이다. 나무는 자라면서 곁가지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무가 지속적인 부피 생장을 하면서 함께 자란 곁가지도 심지를 박고 파묻혀 자라게 ..

좋은 수필 2023.11.29

주춧돌과 기둥 / 변해명

주춧돌과 기둥 / 변해명 뒷산에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시인의 시 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맴돈다. 나는 눈먼 처녀처럼 눈을 감고 꾀꼬리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시인에 대한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 고비를 청노루 맑은 눈으로 바라보시던 시인의 맑은 영혼이 그리운 하루다. 우리 집은 숲과 닿아 있다. 뻐꾸기, 꾀꼬리가 울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아름다운 숲과 함께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김동리 선생의 수필 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숲은 동양인에게 성격이 다른 신神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목이 없는 세상은 아..

좋은 수필 2023.11.29

헛 / 조인혜

헛 / 조인혜 언어는 관계 속에서 순환되고 해석된다. 단어 하나로 사람의 하루를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나락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눈동자 바로 앞에 뾰족한 무언가 세워져 있는 것처럼 온몸에 신경의 날을 세울 때도 있다. 때로는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언어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모양이 변하고 온도가 바뀐다. 심지어 권력이 생기고 위계가 정해지기도 한다. 봄볕처럼 따뜻하고 이불 속처럼 편안한 단어들이 있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잘될 거야' '좋아질 거야' 등이다. 미로같이 풀리지 않는 문제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닥칠 때 '괜찮아' 한마디를 들으면 불편했던 감정들이 순식간 녹아든다. 어깨 토닥거려주는 행동보다 말이 가지는 온기가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좋은 수필 2023.11.27

허물 / 정재순

허물 / 정재순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살핀다. 어머니가 자그맣고 앙상한 몸으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허리 한 번 필 틈 없이 평생을 밭에서 살아온 등은 한쪽으로 꾸부정하다. 몸가짐이 거북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보나 마나 또 우수수 떨어져 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허연 가루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앉았다 일어서면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것들은 이부자리에, 소파에 심지어 변기 위에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부부 침대에 걸터앉을 땐 참으려 해도 어느새 한숨이 새어나온다. 한동안 뵙지 못하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며칠 같이 지내면 심사가 뒤틀린다. 낙하한 것들은 곧장 쓸어 담아야 했다. 그냥 두면 이리저리 흩어져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등이 가렵단 소..

좋은 수필 2023.11.25

두레박/황영선

두레박 / 황영선 우물은 거대한 종처럼 울림이 깊은 소리를 가졌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어둠 저 편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종소리를 닮았다. 고여있는 듯하면서 흐름을 가진 지하 어딘가에 숨어 흐르는 물길. 그렇다. 고요한 정인의 가슴에 담긴 사랑의 깊이와 맛이 이와 같지 않을까? 무미 무취한 듯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와 같은 우물! 그런 사랑의 우물을 갖고 싶다. 덧없는 갈증과 풋사랑의 허기를 달래던 젊은 날은 가고, 이제 나는 물 같은 사랑을 꿈꾸는 중년이 되었다. 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긴 여정이다. 잡으려고 하면 이미 저만큼 흘러가 버린 뒤이거나, 내 손이 닿지 않을 먼 거리에 가 있다. 내 안에도 어느새 동그란 물 무늬의 나이테가 숱하게 감겼다. 그러나 나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좋은 수필 2023.11.24

풍락초 / 조현숙

풍락초 / 조현숙 통 유리창 하나 가득 바다가 출렁거린다. 너울이 갯바위를 칠 때마다 하얗게 메밀꽃이 일어난다. 물머리를 세우며 덤벼드는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높직한 갯바위에서 한 여인이 풍락초를 건지고 있다. 3월의 바람이 드세기도 하다. 바다를 보겠다고 달려왔다가 갈퀴를 세우고 덤벼드는 소소리바람에 도망치듯 들어온 카페다. 뜨거운 바다의 내력이야 한잔 커피에 담아 마시면서 느긋하게 조망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저 여인을 보기 전까지는. 낭창낭창, 대나무 장대가 바다를 더듬는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여인이 미역 올을 건진다. 장대를 흔들어 갯바위 바닥 한 편에 미역을 떨구어 놓는다. 거친 바위에 따개비처럼 붙어 선 여인의 발아래로 바닷물결이 쉼 없이 굼실댄다. 깔밋하게 여며 입은 무채색의 차림새에, ..

좋은 수필 2023.11.20

어쩔, 파스/김근혜

어쩔, 파스/김근혜 거울 속에 낯선 중년 부인이 서 있다. 본 듯, 아는 듯, 마는 듯한 사람이다.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쪽 손엔 파스가 들려 있다. 그 꼴이 가관이다. 울퉁불퉁한 전라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여성 스모 선수가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모습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자신이 봐도 봐줄 만한 꼴이 아닌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벽이 돼야 하는 자신이 웃프다. ​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자주 아프다. 근육통이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다. 아픈 부위에 파스를 붙인다. 잠시 통증이 진정된 듯 하나 부작용으로 피부 발진이 온다. 붙어있어도 떼어내도 가렵다. 강력한 접착제는 뗄 때가 더 고통스럽다. 일방적인 사랑처럼. 사랑이 너무 뜨거우면 불에 데듯이 파스도 뜨거운 것과 함께하면 화상을 입는다. ..

좋은 수필 2023.11.17

널밥/조이섭

파란 하늘에 빨간 댕기가 팔랑거리고 옥색 치마가 풀썩인다. 널뛰기는 정월이나 단오, 추석에 하는 전통 놀이이다.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서 신명나게 구르고 뛰는 한 판 놀이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세뱃돈 모금이 끝나면 하나둘 배꼽마당으로 모였다. 구슬치기도 하고 제기를 차다 보면 쿵덕 쿵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자들의 널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틈에 하던 놀이마저 팽개치고 달려가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처자들은 널을 뛰기 전에, 멍석을 둥글게 말아 만든 널받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골랐다. 이윽고 널빤지 위에 올라 눈 맞춤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굴러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널뛰는 소리가 떡방아 찧는 소리처럼 ..

좋은 수필 2023.11.13

섬 / 김윤선

섬 / 김윤선 식당은 널찍하고 천장이 높아서 쾌적했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률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시어머닌 휠체어에 앉은 채, 나는 그 곁에 자리를 잡았다. 지독히도 조용했다. '수다 금지'라고 했는지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함이 지나쳐 묵직하고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어색하고 긴장됐다. 처음엔 낯선 동양인을 관찰하느라 다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식탁마다 음식이 놓여도 어느 한 사람 선뜻 수저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퀭한 눈동자로 멀거니 딴전만 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들,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지만 설사 눈을 마주쳐도 반응이 없었다. 종이인형들 같았다. 어떤 맛이 당신 구미를 당긴 것일까, 넙죽넙죽 꽤나 잘 받..

좋은 수필 2023.11.05

멀구슬나무/이명길

멀구슬나무/이명길 늦가을 호수는 푼푼하다. 물오리들의 행렬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둥치만 남은 물 버들은 잠잠히 하늘을 읽는다. 물속을 거꾸로 인 채 말라버린 연 대궁은 삶을 회상하듯 묵묵하다. 호수가 생의 지론이라도 강의 중인지 물이랑 사이로 바람을 일깨운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호수공원을 둘러본다. 활짝 열린 하늘은 새털구름마저 지웠다. 낱낱이 떨어지는 햇볕을 이고,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호수 에움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발길을 옮기니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간간이 하늬바람이 스쳐갈 때면 신록의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언덕 위로 특별한 나무가 있어 눈길이 간다. 멀구슬나무 줄기에 왕벚나무가 업혀 있다. 뻐꾸기나무라 한다.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남의 둥지에..

좋은 수필 2023.11.05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막사발이 무수한 알을 품었다. 둥글게 살아온 생도 궁핍한 뒷골목의 삶도 따스하게 껴안는다. 뜨거움을 삼켜 향기로 스미면 투명 알이 꿈틀거린다. 껍데기는 말랑해지고 복아는 부푼다. 크고 작은 알, 뭉그러지고 당실하고 길쭉한 알들이 부화해 제자리를 찾는다. 흙빛 양수 속에서 볕내가 난다. ​ 막사발 안과 밖에 실금이 가 있다. 빙렬氷裂이다. 흙이 가마 안에서 화마의 시련을 이겨내고 얻은 표식이고 유약이 화신에게 하사받은 문신이다. 모두 불이 잉태하고 낳은 생의 지도다. 사발에 작은 물고기 알 모양으로 금이 갔으니 어자문魚子紋이라 칭한다. ​ 반달을 닮은 막사발을 만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빚고 고유의 색채를 지닌 그릇은 편안하고 소담하다. 달 안에 빛이 담기면 금 간 상처들이 서로를 ..

좋은 수필 2023.11.05

처마/김응숙

처마/김응숙 몸피 얇은 것들이 찾아들었다. 하루살이며 나방이었는데, 진즉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거미줄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처마 깊숙이에 먼지 같은 알을 까고 새끼를 쳤다. 비가 오는 날이면 민달팽이나 지렁이가 덜 젖은 땅을 찾아 기어 나왔다. 그들은 처마 밑 벽에 몸을 붙이고 비를 그었다. ​ 그날도 가을비가 왔다. 슬레이트 지붕이 다닥다닥 닿아있는 언덕빼기 동네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신작로로 들창이 난 길갓집이었다. 그 처마 밑으로 바싹 마른 아이들이 찾아 들었다. 예닐곱 살, 열두 살로 보이는 형제였다. 황급히 뛰어나왔는지 작은 아이는 맨발이었다. ​ 동네 중턱에서 고함과 비명이 따라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었다. 우산을 쓴 아버지가 싸움을..

좋은 수필 2023.10.29

눈빛 / 김혜주

눈빛 / 김혜주 ​ 텅 비어 있는 눈빛은 슬펐다. 아무도 눈 맞춰 주지 않는 허공을 서성대고 있는 시선은 그래서 더 애잔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랬다. 쌍꺼풀이 진 큰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의 그 막막한 눈빛. 꽉 닫힌 문 앞에 서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문고리의 흔적을 장님마냥 더듬고 있는 눈빛. 그런 그녀를 만난 것은 병실이었다. 그녀는 하얀 시트 위에 석고상처럼 굳은 육신을 뉘고 있었다. 몇 날을 두통에 시달리다 동네 병원을 찾았다.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자 의사는 더 정확한 검진을 위해 큰 병원에 가기를 권했다. 감기가 오래가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데 왼손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갔다. 검사 결과는 가벼운 뇌출..

좋은 수필 2023.10.21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 ​ ​ 재봉틀이 오동나무 탁자 위에 앉아 갸르릉거린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쇠붙이임에도 어쩌면 저리도 섬세한 몸짓일까.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손길에 형형색색의 실들이 퐁당퐁당 땀을 낳는다. 홈질, 박음질, 새발뜨기 등 밤새도록 박은 바느질 종류가 많기도 하다. 재봉틀은 삼거리 중고 가게에서 우연히 눈을 마주친 오래된 골동품이다. 철제다리를 떼어내고 좌식으로 개조한 구닥다리다 보니 눈에 잘 띄는 곳에 버젓이 내놓기는 뭣하다. 그래도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이어 붙이는 데에 재봉틀만 한 것이 있을까. 힘주어 발판을 구르면 침목 위의 기차처럼 시접을 따라 달린다. 윗실과 밑실이 얽혀 한 개의 바느질 땀을 만들어낸다. 노루발이 다 박은 천을 뒤로 밀어내면..

좋은 수필 2023.10.19

풀들에게 경의 표한다 / 김애자

풀들에게 경의 표한다 / 김애자 마전지애(麻田之艾)란 말이 있다. 마밭에 쑥은 마처럼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인간성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와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제멋대로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야 할 쑥도 마밭에서는 마와 같이 오로지 햇빛만을 향해 ‘진지강화’형으로 곧게 자란다. 논에 나는 피란 식물도 벼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지만 이삭이 팰때엔 본색을 드러내는 의태식물이다. 식물이 성장할 때 두 가지 유형으로 자란다. 위로 키를 높이며 자라는 ‘진지강화형’과 옆으로 줄기를 뻗어가며 자라는 것을‘ 진지확대형’이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식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벼, 보리, 밀이나 조와 옥수수 등은 ..

좋은 수필 2023.10.19

멍석/조미정

멍석 ​ ​ ​ 멍석 한 장이 시렁 위에 얹어져 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곰삭은 세월이 떨어져 나와 햇살이 뿌연 헛간 속을 둥둥 떠다닌다. 한 생애의 빼곡한 사연이 둘둘 말려있는 듯하다. 그냥 버리기 망설여진다. 오며가며 매콤한 눈길을 던지다가 마당에 꺼내 펼쳐놓는다.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어 설렁하더니 낡은 멍석 한 장 깔았다고 집 안 가득 온기가 들어찬다. 멍석은 새끼로 날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촘촘히 끼워 넣은 볏짚을 위아래로 얽어매어 만든다. 전날 밤에 물에 푹 불려 야들야들해진 볏짚으로 새끼부터 꼰다. 멍석의 날줄이 되는 부분이다. 설렁설렁 손바닥을 비비면 될 것 같아도 막상 새끼를 꼬아보면 만만치가 않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풀어지거나 골이 숭숭 팬다. 그럴 때마다 재빨리 몇 가닥의 볏짚을 ..

좋은 수필 2023.10.18

바지傳/조미정

바지傳/조미정 ​ ​ ​ ​ 바지는 직립보행의 종족이다. 몸통이 두 갈래로 갈라져 평생 걷고 달려야 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씨줄과 날줄로 얽은 혈관 속에는 질주 유전자가 흘러 한시도 제자리에 붙박여 있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쉼 없이 걷느라 가랑이는 낙타처럼 쉴 때조차 먼 곳을 바라본다. 불도저 같던 남편이 어쩐 일일까? 멀리 출장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아침부터 걷기를 주저한다. 지금쯤 대문을 성큼 나섰어야 함에도 서두르기는커녕 혼잣말까지 구시렁거린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바지 기장이 짧아졌다는 넋두리다. 그럴 리 없다며 부엌에서 일하다가 말고 쿵쿵 달려갔다. 바지는 진짜로 반 뼘 가까이 키가 줄어들어 발목 위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입고 다녔던 단..

좋은 수필 2023.10.18

감나무 현관/조미정

감나무 현관/조미정 ​ ​ ​ 열댓 그루의 감나무들이 섬돌 앞에 늘어섰다. 어디 한 군데 매끈한 곳 없이 마디마디 가지가 뒤틀리고, 수피마저 물고기 비늘처럼 갈라 터진 노거수들의 사열식. 신석기 토기 같은 햇볕이 얼금얼금 빗겨 들며 대문도 없는 판잣집 마당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산골의 절반이 활엽수로 덮였어도 감나무 현관은 도드라진다. 나무들마다 이파리에 물든 정도가 전부 달라서이다. 마당 깊숙한 쪽은 도톰한 잎들이 그늘을 쓸어 담고 있다. 푸릇한 감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아직도 한창인 청춘으로 보인다. 가운데는 단풍 대궐이다. 잎과 열매가 함께 불그죽죽 물들어 무르익은 중년을 대변한다. 길가 쪽은 벌써 져버린 인생 같다. 하루바삐 떠나가느라 마른 가지에 낙엽 몇 장만이 바스락거린다. 한낱 한시에..

좋은 수필 2023.10.18

다랑이 밭의 서사/장미숙

다랑이 밭의 서사/장미숙 택배가 도착했다. 시골에서 보내온 상자에는 된장과 고추장, 매실액과 들깻가루가 들어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전화를 드렸더니 엄마가 불쑥 말씀하신다. “들깻가루는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인께 애껴 먹어라. 지난해 수확한 들깬디 인자는 더 못 할 것이여.” 마지막이라는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인가. 당신 스스로 마지막을 선언한 건 이제 더는 몸이 아닌 의지로도 밭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오래전부터 몸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의지에 기대 힘겹게 노동을 이어온 엄마의 삶에서 영원히 밭이 떠나버린 걸 알았다. 가슴 속에 요지부동 들어앉은 오래된 우물처럼 다랑이 밭은 ‘고향’이나 ‘엄마’ 하면 떠오르는 밑그림이었다. 모든 먹을거리가 그곳에서 ..

좋은 수필 2023.10.16

미로(迷路)/정재순

미로(迷路)/정재순 환희 같은 은빛햇살이 찰랑거렸다. 서늘한 바람을 한가하게 가르며 날아다니는 철새들의 정경은 그림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흙길에서 나무를 만나고 늪을 만나고 갈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도 눈짓을 나누었다. 숲처럼 으슥한 곳에서는 웅덩이도 만났다. 거울처럼 말간 웅덩이 속에는 나무들이 거꾸로 서 있었다. 웅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한 갈래로 이리저리 얽힌 빈 가지들이 미로 같았다. 잠시 동화책 속에 앉아있는 착각이 들었다. 늪을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쯤 걸린다고 했으니 산책을 마칠 쯤에는 해가 질 무렵이다. 남편과 나는 우포늪의 적나라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늪을 감싸 안은 길에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종종거리..

좋은 수필 202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