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늙은 지폐 / 이성환

늙은 지폐 / 이성환 빳빳한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남루하고 꾀죄죄한 행색만 남았다. 표면은 누렇게 땟국물이 절었다. 주름살투성이에다 악취까지 풍긴다. 몸피는 군데군데 해져 초췌한 몰골이지만, 그나마 오른쪽 초상화 얼굴 윤곽은 변함없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자의 처연함이 노골적이다. 한 줌 재가 될 화폐들이 금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은행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지폐 다발을 풀어 훼손된 화폐를 분류하고 세고 묶었다. 무더기로 쌓인 지폐 앞에 전 직원이 달라붙었다. 재사용할 돈과 수명이 다 된 지전을 구분해야 하는 일. 책상 위는 물론 바닥에 종이도 아닌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돈을 셀 때마다 뽀얀 먼지가 날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빨리 일을 마치고 퇴근하기 위..

좋은 수필 2023.10.15

소라껍데기/장미숙

소라껍데기/장미숙 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노르스름한 색깔에 윤기가 돌고 냄새만으로도 감칠맛이 느껴졌다. 한 숟가락 크게 떴으나 몹시 뜨거웠다. 숟가락을 입술 가까이 대고 호호 불었다. 냄새는 날숨에 밀려갔다가 급히 되돌아왔다. 들숨으로 몰려든 냄새는 후각을 자극했다. 바다의 쌉싸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낭만과 청량함을 품고 있진 않았다. 바람결에 실려 온 바다의 까칠한 겉살이나 햇살과 몸을 섞는 후텁지근하고 들큼한 것도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의 뼈와 오랜 시간에서 비어져 나온 진하고 곡진한 냄새였다. 바다의 속살이 입안에서 씹혔다. 눈물 맛이 났다. 아니, 고독한 맛이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뭉쳐진, 응고된 맛은 사진 속에서 보았던 바다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바닷물에 잠긴..

좋은 수필 2023.10.08

억새의 이미지/목성균

억새의 이미지 목성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 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 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모..

좋은 수필 2023.10.01

곰탕집 불독/백정혜

곰탕집 불독 백정혜 짐승을 두고도 면식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불독을 봤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줄잡아도 오 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던 남의 집 개를 첫 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무엇으로도 나를 알아볼 리 없는 짐승이었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건 반가움 때문이었다. 한길 갓집 문지방에 걸쳐 누운 개는 섭생인 양 바깥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지만 경계의 빛이라곤 아예 없었다. 다가앉은 낯선 여자를 그저 멀뚱히 쳐다만 봤다. 잔등이며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입안에서 빙빙 도는 말을 계속 응얼거렸다. 반십 년 소식 모르다가 만난 사람이었다면 나눌 수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절친한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개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변모를 헤아리고 재빨리 상대..

좋은 수필 2023.09.23

밥 / 사윤수

밥 / 사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神)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일 분이고, 도무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지고한 삶의 실천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 자체가 구원인 사람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풍전등화의 지경이 되었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그만 우리 집 살림을 거덜 내고 말았다. 깡그리 적빈이 된 것이다. 환란을 피해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읍으로 떠났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 ‘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우리는 서로..

좋은 수필 2023.09.23

빗살무늬토기/허이영

빗살무늬토기 / 허이영 며칠 몸살을 앓고 나니 입맛이 까칠하다. 입맛 없는 데는 병아리 궁둥이만 따라다녀도 낫다 하여 명절에 시골에서 가져온 주먹만 한 동치미 무를 한 개 꺼냈다. 절반 뚝 잘라 나박나박 썰어 말간 유리그릇에 담고 칼칼한 동치미 국물을 한 국자 떠 담았더니 갑자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식욕이 돌았다. 깔깔한 입안에 동치미 국물 한 수저를 떠 넣었으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맛이 아니다. 이상스레 항아리를 떠나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겨우내 층층이 쌓인 두꺼운 얼음 아래 삭여낸 슴슴한 깊은 맛이 플라스틱 통에 옮겨 담으면 본래의 맛이 감해진다. 어디 동치미 맛뿐이랴. 질박한 옹기 항아리는 돌담 아래 있어도 정겹고, 아파트 베란다 구성진 곳으로 밀려나 있어도 초라하지 않다. 이 땅 어느 ..

좋은 수필 2023.09.22

희아리/정여송

희아리 정여송 물이 창공으로 흐른다.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계곡물이, 강물이, 바닷물이 해를 향해 떠간다. 멍석 위에 널려있는 고추의 몸속에 머물던 빨간 수액도 하늘로 오른다. 마음도 따라 날아간다. 토실토실 잘 영근 빨간 고추의 두텁던 살집이 쏙 빠졌다. 씨앗이 비치도록 얇아졌다.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핏줄을 감춘 맑고 투명한 것이 참으로 애틋하다. 흔들자 맑은 소리가 난다. 도나캐나 다 내어주고 비워내어 초연해진 것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무구한 깊이가 짚어진다. 차라리 비어 있어서 전율케 하는 해맑음이다. 어머님은 고추가 잘 마르도록 이리저리 뒤적인다. 자식에게 쏟아 붓던 정성을 모아 손질한다. 무언가를 가려낸다. 빨간 색깔을 잃고 하얗게 얼룩져 변해버린 흉한 고추이다. 희아리. 고추의 본은 커녕 ..

좋은 수필 2023.09.17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팽팽하게 부풀었다. 아침나절에 섞어 둔 떡 반죽이 몸무게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릇을 감싼 비닐에 이슬이 맺혔고 주걱으로 공기를 빼 주는 와중에도 살아 꿈틀거린다. 막걸리 안에 들어있던 효모가 밀을 만나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정을 나눴으면 식솔이 저리 늘었을까? 아기 엉덩이 같이 부푼 반죽을 못자리 갈아엎듯 뒤집으니 공기층이 거미줄처럼 엉켰다. 뒤집어 품었던 공기가 빠져나가자 부푼 반죽이 힘없이 주저앉는다. 주걱으로 진정시킨 반죽이 뒤척이며 내는 몸내가 가히 폭발적이다. 시큼한 과일 향 같기도 하고 농익은 곡주 냄새 같기도 하다. 부풀다 주저앉은 반죽을 다독여 이차 발효를 시켜놓고 배나무 가지를 치고 꽃도 실한 것만 남기고 모두 따 준다. 서원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기 가득하..

좋은 수필 2023.09.17

부용화 / 설성제

부용화 / 설성제 부용은 연꽃 중의 하나다. 물에서 자태를 뽐내는 수련이, 진흙에서 향기를 뿜어내는 연꽃이 아닌, 나무에서 피는 연(蓮)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 피는 꽃이기에 누군가 곁을 맴돌기란 힘들 것이라 보호막이용 가시 같은 건 애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바라기처럼 되바라지게 태양을 직면하지도 않는다. 사루비아, 맨드라미, 배롱꽃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이유를 정작 모른다는 듯 부용은 희거나 연분홍의 저 다소곳한 빛깔로 작렬하는 불볕 아래 섰다. 강렬함으로 양립하기보다 순순함으로 존립하기를 선택했으니 내리쬐는 땡볕을 하소연하지 않는다. 타들어가는 속내를 붉디붉은 얼굴로 항명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묵언수행으로 주어진 계절을 건넌다. 여름 정오 무렵 대공원을 걷다가 무궁화인가 싶으..

좋은 수필 2023.09.17

우화/라옥순

우화/라옥순 "곱게 화장도 해드렸습니다." 유리문이 열리며 들은 첫마디였다. 체온 없는 공기가 덮쳐온다. 고운 화장이라니,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공감을 얻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접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세수라면 몰라도 화장이라는 말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삭제되어야 할 문장이다. 텅 빈 화면에서 멈춘 커서처럼 방황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엉킨다. 한생을 글로 엮거나 입담으로 풀어낼 때 말미가 전체를 아우르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해드렸습니다.'에 붙들린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제대로 된 화장대는 차치하고 화장수 한 병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부르튼 곳에 바르는 연고뿐이다. 갈라진 발뒤꿈치에 걸려 올이 뜯긴다고 결 고운 이불을 덮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롱 속 명주..

좋은 수필 2023.09.15

무말랭이에 무친 외할머니 이야기 - 이재윤

무말랭이에 무친 외할머니 이야기 - 이재윤 외할머니의 무말랭이는 빨간색이 아니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새빨간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게 썰어 몇 번을 말렸다 불렸다를 반복한 무는 새끼손톱 길이에 아주 얇았다. 흡사 한 뭉치의 구더기 같아 보였다. 간장과 참기름으로 양념한 무말랭이는 허여멀건한 옅은 갈색이었다. 이 이북식 무말랭이를 숟가락으로 한가득 떠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면 씹는 맛이 독특했다. 꼬들 거리면서도 눅눅하고 물렁하면서도 아삭했다. 무 특유의 짭조름하고 알싸한 맛이 몇 배로 압축돼 강한 맛이었으나 이내 고소한 참기름과 간장이 스며 코까지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나는 외할머니네서 무말랭이를 먹을 때면 반찬이 아니라 밥처럼 먹었다. 외할머니는 무말랭이 맛을 안다며 나를 예쁘다 했다..

좋은 수필 2023.09.14

졸 / 박양근

졸 / 박양근 없는 듯 있는 것. 변변한 행세를 못하여도 제 몫을 지켜내려는 마음 하나로 판 위에 놓여 있다. 손에 닿은 감촉은 무명전사의 표지보다 가볍지만 홑 글자 이름은 암각화처럼 뚜렷이 박혔다. 졸卒. 전장은 천하를 거머쥐려는 두 패가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국운이 가려지고 군신의 생사가 좌우된다. 당연히 왕은 물론 사士와 졸卒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주어진다. 녹을 배분하듯 크기와 자리도 매김된다. 그렇지만 장기판은 전장과 다르다. 말패에는 상하와 귀천이 없다. 어느 하나라도 잡혀버리면 판세가 기울어지기 쉽다. 미천한 졸이 나름의 아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인 조직사회이라면 당연히 상석과 말석이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앞과 중앙을 차지하게 된다. 행세를 ..

좋은 수필 2023.09.09

콩나물 촌감(寸感)/허정진

콩나물 촌감(寸感)/허정진 ​ 말아 쥔 악보 속에 높은 음표들이 유희한다. 슬픔을 날것 그대로 토해내는 비탈리 ‘샤콘느’의 음계며 선율일까. 의뭉스러운 삶의 비정을 맛본 느낌표와 의문형의 기호들이 세상 앞에 단독자처럼 버티고 있다. 아니다. 잎도 없이 연둣빛 꽃망울을 머리에 이고 올라온 석산 꽃대공들이다. 미끈하고 탄력적이며 날렵한 몸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그대로이다. 건강에 좋다며 지인이 재배한 까만 쥐눈이콩을 선물 받았다. 크기는 좁쌀만 하지만 오동통하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콩나물 기르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혼자만의 살림에 항아리 들여놓기도 부담스러워 투명한 페트병을 이용해 조그만 시루 두 개를 만들었다. 성장기는 일여드레, 일차를 두고 기르면 사나흘에 한 번꼴로 콩나..

좋은 수필 2023.09.08

바다로 간 인어 공주 / 문춘희

바다로 간 인어 공주 / 문춘희 ​ 인어 공주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이 꼬리 대신 다리를 갖게 해 주세요." "그러면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게 주어야 한다. 만약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서 거품이 되고 말아. 그래도 좋으냐?" "네, 왕자님만 볼 수 있다면……."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유치원생인 막내가 작은 사고로 집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에 입원한 지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수십 권도 넘게 읽어 주느라 나는 동화구연가가 다 되었다. 곤히 잠든 아들에게 이불 자락을 덮어 주고 병원 복도로 나와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온갖 약품 냄새와 신열로 들뜬 신음 소리가 밤새 뒤섞여 굴러다니는 병실 공..

좋은 수필 2023.09.03

상자 / 문춘희

상자 / 문춘희 ​ 아이들과 남편이 학교로 일터로 모두 떠나고 난 아침은 세상이 텅 빈 것 같다. 상자의 내용물이 상자를 버리듯 나는 남겨졌다. 매일 아침 치러야 하는 잠시 동안의 이별이요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속을 다 비워 버린 상자 같은 내 안은 언제쯤 다시 채워질 수 있을까? 아파트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마치 내가 알 수 없는 큰 상자 안에 갇힌 것만 같다. 큰 상자 안에 갇힌 작은 상자가 된 나를 들여다본다. 상자엔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다. 한때 무엇을 담았던 것인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상자가 된 것일까?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막다른 골목길처럼 컴컴하고 오래 입은 옷처럼 후줄근해진 상자 속으로 을씨년스런 바람 ..

좋은 수필 2023.09.03

풍선 / 문춘희

풍선 / 문춘희 ​ 풍선을 한 묶음 샀다. 여러 가지 색깔의 풍선들이 가득 들어있다. 그것을 꺼내 하나씩 분다. “푸-우, 푸-후훕, 푸푸-훕.” 노랑 풍선, 파랑 풍선, 빨강 풍선들이 거실 천장으로 쑥 날아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종종 혼자서 풍선을 분다. 남들은 참 이상한 버릇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게뭉게 부풀어 올라 가슴이 먹먹해져 오면 풍선을 분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숨이 가빠져 올 때엔 더 빨리 풍선을 분다. 풍선을 불면 숨이 가빠지는 증상이 많이 잦아들고 무언지 모를 불안감도 줄어든다. 겨울바람이 웅웅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창문을 몹시도 할퀴던 수 해 전 겨울, 병원에 누워있었다. 퀴퀴한 약품 냄새가 나는 병실에 누워 가혹하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

좋은 수필 2023.09.03

길마/김순경

​ ​ 길마 ​ 김순경 ​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다. 등신불이 되어버린 듯 미동도 없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낸 길마는 일어날 기력조차 없어 보인다. 한때는 쇠등을 타고 산과 들을 누볐지만 지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도 사람도 떠나고 없는 빈집을 상주처럼 홀로 지킨다. 길마는 쇠등에 얹는 운반도구이다. 말굽같이 굽은 두개의 나무를 연결해 말안장처럼 만든다. 등에 착 달라붙도록 안쪽에 가마니나 천을 덧댄 길마는 실린 짐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와 궁둥이에 단단히 묶는다. 짐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긁히거나 찔리지 않게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안장이 있어야 제대로 말을 탈 수 있듯이 길마가 있어야 짐을 싣거나 달구지를 끌 수 있다. 한번 등에 올라온 길마는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자신의..

좋은 수필 2023.08.23

귀소 / 고경서(고경숙)

귀소 / 고경서(고경숙) 기왓장 사이로 솟을대문이 보인다. 처마도 마른 속을 드러내며 삭아 내리는 중이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높은 담벼락 위로 시든 풀만 흐느적거린다. 지키고 감출 것이 그렇게 많았을까. 돌담을 겹쳐 두른 중문을 지나면 귀면와가 두 눈을 부라리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과 행랑채가 일가를 이루고 일찌감치 풍화에 들었다. 창살문 하나에도 꼼꼼하게 치장을 하고, 대청난간을 기어오르는 당초덩굴을 안으로 깊게 파 궁굴린 솜씨가 섬세하고 미려하다. 세월을 탁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지난날 융성하던 가문의 권세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리산 가는 길에 팻말을 보고 찾아 든 집이다. 주인 떠난 집을 말없이 지키던 담장을 돌아 유유히 고샅길을 빠져나가는 바람까지도 고색이 짙..

좋은 수필 2023.08.20

싸리비/이정연

싸리비/이정연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단순한 노랫말 속에 고향집 마당의 사계가 추억 속의 영화처럼 펼쳐지고 나는 어느새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 어릴 적 싸리비 하나를 만들어 마당을 쓸었던 일로 인해 아버지가 나를 완전히 인정해 주신 일 때문이다. 고향집에는 온갖 빗자루가 많았다. 섬세해서 방 쓸기에 좋은 갈비, 타작마당의 낟알을 한 톨도 흘려보내지 않던 알뜰한 수수비, 가을마당의 마른 감잎과 함께 쓸쓸함을 쓸던 시누대비나 싸리비는 늘 나를 고향으로 오라 돌아오라 손짓한다. 한가위를 앞둔 어느 날 시누대비로 마당을 쓸던 나는 비질에 자꾸 파이는 마당도 거슬렸지만 백 평 남짓한 마당을 다 쓸기에 비가 너무 닳았다는 생각이 들..

좋은 수필 2023.08.19

발톱 / 조미정

발톱 / 조미정 발톱이 못생겼다. 세월에 풍화되어 바위만 남은 봉우리가 발가락 끝마다 하나씩 뭉텅 솟았다. 크기마저 제각각인 오합지졸이다. 발이 몸의 뿌리이고 발가락이 지렛대라면 발톱의 역할은 무엇일까. 무생물 닮은 발톱이다. 발의 한 부분이면서도 변변한 뼛조각 하나 나누어 갖지 못했다. 오로지 죽은 세포로만 툽툽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둥글넓적하니 인상 좋아 보이지만 사자처럼 포효하거나 독수리처럼 낚아채는 맛은 없다. 말발굽처럼 두툼하기만 해도 좋으련만 피부의 혈색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발톱은 멀겋다 못해 파리하다. 케라틴이라는 성분이 조갑근에서 처음 만들어질 때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표피 밖으로 돋아나오면 갑각류의 껍데기처럼 단단해진다. 몸의 가장 낮은 곳에 발을 구겨 넣고 바닥과 맞붙어 싸우려면 ..

좋은 수필 2023.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