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최지안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 ​ 최지안 ​ 저녁은 경계에 걸린다. 낮의 끝과 밤의 시작 사이. 낮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밤이라 하기에 어정쩡한 시간. 차를 마시기엔 늦고 술을 마시기엔 이르다. 무엇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까운 인생의 절반을 지난 시점 같다. ‘아직도’와 ‘벌써’에서 망설이는 애매한 시간. 미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만다. 인생이란 것이 모두 그러하듯. 저녁은 슬그머니 온다. 서쪽 산등성이에 걸렸는가 싶은데 어느새 그림자를 이끌고 그렇게 시치미 떼고 온다. 고양이 담 넘어 집 뒤로 사라지고 새들도 둥지 찾아 날아가면 그제야 저녁은 눈치 보며 깃든다. 도로는 차량이 넘치고 조용하던 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슬그머니 시작된 저녁. 길이 막히고 거리는..

좋은 수필 2024.03.08

뒷골목/김응숙

뒷골목 김응숙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다. 밤이라면 그것은 체념의 시간이 흐르는 너절한 도랑이 되고 비까지 온다면 허무가 떠다니는 오염된 하수구가 된다. 늦가을 찬바람마저 불어대는 오늘, 화장 짙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비는 번들거리는 얼룩을 남기며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있다.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일까. 비안개에 희뿌연 빛을 분사하는 백열등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 빌딩 뒤편에 설치된 여러 구조물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거린다. 그 틈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납작 엎드려 있다. 곰팡이들이라도 퍼져 있는지 큼큼한 냄새마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의 저 끝, 어둠이 갈라진 직사각형의 빛 속에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흡사 멀리서 보는 전광판 화면 같다. 발밑의 웅덩..

좋은 수필 2024.03.08

태양초/김덕임

태양초/김덕임 주머니 속 금화가 잘랑거린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순천 시댁에 다녀왔다. 바삭한 고추 삼십여 근을 오부룩이 부었다. 작은 산더미만하다. 새 색시 다홍치마 같은 태깔이 손끝에 자르르 감겨온다. 고추 꼬투리를 떼어낸다. 벌써 두어 시간째다. 떼어낸 꼬투리는 흡사 생후 이레 만에 말라 떨어진 딸들의 탯줄이다. 코끝의 알싸한 냄새는 연신 재채기를 끌어올린다. 콧물이 눈물인지, 눈물이 콧물인지…. 고추 속에는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불룩이 담겨 오글거린다. 순천만 수평선에 낭자한 저녁노을도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고추는 해풍에 실려 온 달착지근한 새조개 냄새와 쫄깃한 쭈꾸미 맛도 담뿍 담고 있다. 고추밭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자락 속의 소쩍새, 멧새들의 울음소리도 고추더미 속에서 잔망스럽게 들린다...

좋은 수필 2024.03.08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밤새 곰팡이가 담쟁이넝쿨처럼 자라 있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인가. 며칠 사이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 듯했다. 벽지가 찢어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더니 미끈거리는 검은 습기가 묻어났다. 물티슈로 닦아내고 신문지로 문질렀다. 축축하던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내렸고 그 뒤로 시멘트가 조금 드러났다. 그런데도 곰팡이가 피었던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릿해지고 옅어졌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여느 때처럼 거울로 가렸다. 절망처럼 급속도로 피어나던 곰팡이를, 그 벽을. ​ 좁은 방에는 못이 딱 하나 박혀 있었다. 전에 살던 누군가가 박은 못이리라. 내가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못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못에 거울을 걸었다..

좋은 수필 2024.03.05

어둠의 저편 / 고지숙

어둠의 저편 / 고지숙 바람이 제법 불어 창문을 닫았다. 소란스럽게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드라마 속 남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모처럼 나 혼자 먹는 저녁.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간단한 볶음요리를 했다. 당근, 양파, 대파를 다듬고 버섯을 물에 불려두었다가 적당한 길이로 썰고 오징어는 살짝 데쳤다. 여러 재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드는 동안, 드라마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 여자와 노부인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걸로 보아 갈등상황이 시작된 것 같았다. 프라이팬에 재료를 넣고 기름에 볶는 동안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야채 볶는 소리 때문에 대사는 잘..

좋은 수필 2024.03.05

달고 뜨거운 /고지숙

달고 뜨거운 /고지숙 눈송이가 떨어진다. 얇은 외피에 비해 낙하 속도가 빠르다. 손등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녹는다. 다음 그 다음의 눈송이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손등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서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바로 녹는다. 차갑다는 느낌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훼손된 눈송이를 응시하며 본래 눈송이가 가지고 있었을 무게를 가늠해본다.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니 크고 탐스럽다. 한때는 세상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처럼 눈송이의 형태는 무구하고 선명하다. 팔을 벌리고 입을 열어 눈을 맞이한다. 차가운 것이 몸 여기저기 부딪히다 입속으로 들어온다. 혀를 적셔주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

좋은 수필 2024.03.05

불쏘시개/곽흥렬

불쏘시개/곽흥렬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있을까만, 벽난로 불붙이는 일 역시 생각만큼 그리 만만치가 않다. 거기에도 나름의 요령이 숨어 있는 까닭이다. 착화 순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적잖이 고역을 치러야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롭고 귀찮아서 몇 번 써보다 내버려 두어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먼저 로스톨 바닥에 신문지 네댓 장을 공처럼 공글려서 깐다. 그 위에다 삭정이나 잔가지들을 얹는다. 다시 그 위에다 굵은 가지를 얼기설기 채운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가는 장작 몇 개비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포갠다. 이렇게 해 놓으면 일단 불붙일 준비는 끝이 난다. 라이터를 그어 신문지에 갖다 댄다. 처음엔 종이의 화력으로 화르르 타오른다. 하..

좋은 수필 2024.03.03

파약破約/김용삼

파약破約/김용삼 터미널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사람들은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떡대는 싱싱함으로 하루를 연다. 삼투압을 하듯, 나는 그들이 선사하는 활기를 연신 안으로 들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2층의 푸드 코트, 이곳이 나의 일터다. 주방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내 몫을 끝내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인다. 쌀을 안치고, 소스를 끓이고, 반찬을 담고, 단손에 여러 일을 해치우려면 눈코 뜰 사이가 없다. 매일 같은 일도 처음처럼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 음식장사라, 그때도 여느 때처럼 분주했을 게다. “식사 되나요?” 화들짝 돌아보니 커다란 캐리어를 잡은 스물 남짓의 청년이었다. 시간이 일러 식사는 곤란하다는 말에 청년의 얼굴엔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시간에는 터미널 어디에도 허기를 ..

좋은 수필 2024.03.03

멍석 - 정성록

멍석 - 정성록 봄의 전령사들이 남도의 이른 봄소식을 들려준다. 오백 년 된 황매화의 향기를 맡으며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모아본다. 청량한 물소리가 흐르는 지리산 한 자락을 살포시 끼고 앉은 경남 산청군 남사면 예담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른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될 만큼 고택들과 주변 경관이 조화롭다.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따라 골목을 돌아 깨끗한 양반가의 고택을 둘러본다. ​ 바람이 빈 집의 주인인 냥 우리를 맞이한다. 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집 같은 어느 고택에서 나도 몰래 발이 붙어버렸다. 빗장 걸린 안채를 비켜 바깥마당으로 나오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초가로 된 사랑채 헛간에 있는 멍석이었다. 먼지 쌓인 멍석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폴폴 날아 오르고 나를 고향집 헛간으로 데리고 ..

좋은 수필 2024.02.28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저쪽 끝이 314호실이에요. 안내인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처음 와보는 요양병원, 가슴이 우당탕, 방망이질했다. 고관절이 무너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된 노모가 이곳으로 옮겨온 게 일주일 남짓, 좁고 지저분한 복개천을 돌아 멀뚱하게 서있는 병원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가족 면회가 때맞추어 풀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시난고난 살아낸 한 생의 끄트머리를 이렇듯 심란한 종착지에서 지어야 하는 인생이라니. 복도 양쪽, 병실마다에 머리 허연 노인들이 폐기물처럼 내박쳐 있었다. 침대에 웅크려 돌아누운 사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그려있는 사람, 반쯤 넋이 나간 퀭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이나 주시하는 사람〮…. 대낮이었음에도 ..

좋은 수필 2024.02.26

파종 / 손훈영

파종 / 손훈영 도타운 햇살이 땅 속 생명들을 깨우고 있다. 바야흐로 텃밭 걸음이 잦아질 때다. 허름한 바지에 긴 장화를 신고 끈 달린 밀짚모자를 쓴 남편은 제법 농사꾼 티가 난다. 손에는 호미 한 자루 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텃밭지기 남편의 어엿한 조수, 제일 중요한 씨앗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뒤를 따른다. 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라 뒷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등산로 입구다. 그 어름에 작지만 윤기 나는 우리의 텃밭이 있다. 오른쪽 골에는 상추씨를 뿌리기로 한다. 왼쪽 골에는 쑥갓을 위쪽으로는 부추를 뿌리면 맞춤 맞을 것 같다. 적당한 간격으로 씨를 흘려 넣는다. 텃밭 가꾸기는 딱히 수확을 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순전히 뿌리고 가꾸는 재미다. 조금씩 솎아 먹는 즐거움도 제법이지만 막 올라오는 새..

좋은 수필 2024.02.21

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숲, 그 오래된 도서관/김영식 삐걱, 숲의 문을 떠밀면 꽃과 나무들이 수백만 권 푸른 장서가 된다. 산모롱이 돌아 오솔길 하나 고즈넉이 걸어오고, 어디선가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고마리며, 쑥방망이, 꽃향유들이 길가에 가지런히 피어있다. 새로 발간된 문고판처럼 귀엽고 앙증맞다. 어디 꽃들의 책뿐이랴! 박달나무, 층층나무, 굴참나무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초록 위에 단풍을 덧얹고 산등성이에 고요히 펼쳐져 있다. 이때쯤이면 으레 늙은 사서司書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 숲의 사서는 오랜 지인이지만 그의 나이는 종내 가늠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숲에 살았다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나뿐만 ..

좋은 수필 2024.02.15

연잎밥/조경숙

연잎밥 조경숙 연잎밥을 지었다. 큰 솥뚜껑을 열자 향을 껴안은 주먹만 한 연밥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오뉴월 땡볕에 싸움질을 하던 아이들이 마치 한 이불 속에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잠자는 모습 같다. 하나 둘 조심스레 펼치니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는 김이 오른다. 평소 '옴마밥'이라며 찬 없이도 밥그릇을 단숨에 비워내던 열 명이나 되는 식솔들은 연밥을 싸는 동안 신기한 듯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굳이 이런 풀이파리에 밥을 싸는 이유가 뭐냐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 주걱씩 푼 밥을 연잎에 올리고 고명으로 대추 은행 잣을 올려 마음을 포개듯 돌려가며 동여맸다. 밥은 하루를 잇는 징검다리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일상의 소박한 행..

좋은 수필 2024.02.14

그 골목의 필경사들/안희옥

그 골목의 필경사들 안 희 옥 이 골목엔 오래된 필경사들이 산다. 날마다 골목을 베끼는 것들, 호프집은 호프집을 베끼고, 북경반점은 북경반점을 베끼고, 세탁소는 세탁소를 베낀다. 낡아가면서 따뜻해지는 것들 중에 골목만한 것이 또 있을까. 날마다 반복되는 문장사이를 걸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흑백사진 같은 풍경의 양쪽으로 회색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골목입구에는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찐빵가게와 세탁소, 아동복가게, 미장원 등이 어깨를 맞대며 늙어간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대문 앞에는 우편물이 나뒹굴고 담벼락 아래엔 누군가 버리고 간 슬리퍼 한 짝도 놓여 있다. 월세와 전세 쪽지가 너풀대는 전봇대 뒤로 길고양이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골목 끝 언덕을 오르면 ..

좋은 수필 2024.02.12

포옹/손 훈 영

포옹/손 훈 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채 되지..

좋은 수필 2024.02.11

가을 말미에서 보내온 편지/이정희

가을 말미에서 보내온 편지/이정희 어름사니는 끝내 이승을 하직했다. 시월도 마지막 날, 바싹 마른 채 죽어 있는 어름사니를 보았다. 머리카락이 빠진 것처럼 엉성한 집에서, 주인도 없는 사체가 간단없이 떨린다. 높새가 거미줄 치는 초겨울, 복색도 현란한 무당거미의 죽음이 아찔하다. 제집에서 죽었는데도 첫서리에 시드는 나뭇잎처럼 꺾였다. 어찌된 사연일까. 눈 질끈 감은 뒤에도 허공에 결박된 채 외줄을 타곤 하더니, 썰렁한 죽음 뒤로 어름사니의 하루가 엇갈린다. 그는 광대다. 특별히 줄을 타는 어름사니다. 혼자서는 움직이질 못하니 바람이 그네를 태운다. 퀭하니 들어간 눈은 허공만 응시하고 철거된 집 하나가 바람을 끌어안는다. 한 줌도 못 되는 주검의, 위험한 노래 한 소절 누가 엮었나? 인생도 어릿광대처럼 한..

좋은 수필 2024.02.10

수필가 반숙자 초기작품- 수필집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80편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 반숙자 1. 5월이 오면 해마다 봄이 오면 친정 집 뒤뜰에 붓끝 모양의 푸른 잎이 무더기 무더기 돋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꽃을 유난히 사랑하고 상사화(想思花)란 세칭을 피하여 당신만은 모사화(母思花)라 이르셨다. 해토(解土)가 되기 무섭게 지표를 뚫고 용감한 기세로 돋아나는 모사화 잎은 오직 잎만 피우기 위한 듯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어느 날 무더위가 시작 될 즈음 초록빛 융성한 잎은 모두 죽어 거름이 되고 거기 죽음 같은 꽃 잎을 물고 연보라 빛이 피어난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해 모사화라 이름 지으신 친정 아버지의 속 깊은 불망(不望)의 회한을 이제사 짐작하는 내게 역시 꽃은 아픔으로 피어나고 있다. 어쩌면 꽃잎은 못다한 불효의 한을 저렇듯 슬..

좋은 수필 2024.02.08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집을 떠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 되어 가고 있다 - 하이데거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기왓장엔 버짐이 피었고 기왓골에선 와송이 자라고 있었다. 보(樑)와 기둥, 서까래와 난간에 세월이 먹물처럼 스며있었다. 대문은 버름했고 마루는 앙상했다. 수척한 지팡이와 고무신 한 켤레가 ‘아직 사람이 기거 중’이라는 듯 늙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명에 젖은 집의 표정은 무거웠고 주련(柱聯)속 글귀는 낯설었다.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쯤 한 노인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갓과 잿빛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먼 옛날로부터 걸어 나온 차림새였다. 주름 깊은 표정이 그 집을 꼭 닮아있었다. 이윽고 지팡이를 쥔 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긴한 용무가 있..

좋은 수필 2024.02.08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별로 자랑할 만한 감투는 아니지만 이 병실에 오래 머물다보니 환자들이 나를 ‘실장님’이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그동안 환자가 수없이 갈마들었지만 저런 별종은 처음이다. 입실하자마자 간호사를 호출해 소독솜을 청구하더니 자신의 병상을 닦기 시작한다. 별의별 환자가 다 거쳐 갔을 터이니 별의별 병균이 다 묻어있을 거란다. 나 역시 병실의 청결상태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지 않은 건 아니나 저렇게 구체적으로 의심해보진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내 병상에서도 각종 병균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지네처럼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몸이 근질거린다. 병상을 구석구석 닦은 신참이 TV 리모컨, 출입문 손잡이, 링거 거치대, 화장실 손잡이, 특히 변기의 하수용 ..

좋은 수필 2024.02.08

부부 / 김시헌

부부 / 김시헌 밤중에 잠을 깰 때가 있다. 대개는 용변 때문이다. 일어나서 툇마루를 지나 마당에 내려서면 어떤 때는 달빛이 하다. 오밤중에 보는 둥근 달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티 없이 트인 달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달처럼 환해진 것 같은 자기 마음에 대한 착각이리라. 화장실이 마당을 건너가야 나타나기 때문에 밤에 달을 보는 것은 화장실로 해서 얻는 부수입이다. 달빛이 아까워서 마당에서 좀 서성거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문을 다 열어 놓은 방안은 달빛의 여광으로 사람과 물건을 낮같이 볼 수 있다. 방에는 아내가 혼자 잠들어 있다. 아내의 나이는 지금 오십에 육박하고 있다. 여름이어서 이불을 걷어찬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모기장 속에 갇혀서 세상을 잊고 있는 아내의 몸 전체..

좋은 수필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