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당삼채 / 류현서

당삼채 / 류현서 짙은 햇살이 창가에 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는 아침이다. 팔월 초의 날씨는 여름의 권위를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적의를 뿜어댄다. 햇볕은 불덩이를 녹이는 것같이 이글거린다. 잡다한 일상을 접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주로 향했다. 여기에도 마치 하얀 불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부터 햇살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든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고, 거기에 따르며 사는 사람들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역사관으로 들어섰다. 소장된 문화재들이 많다. 그중에서 자그마한 항아리에 시선이 꽂혔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하얀색의 무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삼색이 어울리어 안정감을 준 무늬가 곱다. 경주에서 출토되었지만, ..

좋은 수필 2023.04.18

봄이 오고 있다/ 박시윤

봄이 오고 있다/ 박시윤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골목으로 고슬고슬한 봄볕이 쏟아진다. 해묵은 먼지를 말리듯 창문을 열고 볕을 집안으로 들인다. 뜻하지 않은 손님, 볕들이 들어서자 습한 생각을 마구 쏟아놓게 하던 집은 구석까지 환해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한자리에 웅크려 깊은 한숨과 고통, 그리고 무표정으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했고 느닷없는 외출로 가족들을 당황하게 했다. 늘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오열하던 여자, 가슴을 후려치며 늘 아프다고만 하던 여자, 그 여자의 그림자가 설풋한 미소를 보이며 제일 먼저 일어선다. 나는 오랫동안의 동거동락을 이별하듯 무언의 미소를 건넨다. 그림자가 떠나간 자리를 오래토록 바라보며 그간, 그녀의 모습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넉넉..

좋은 수필 2023.04.17

껌/박시윤

껌 박시윤 참 오래토록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유년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를 잊고 살았을 것이다. 몇 백 원 하지 않는 가벼운 값어치만큼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껌은,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처럼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곤 했다. 직장에서 상담역을 맡은 후로 온 종일 수없는 말을 쏟아 놓는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소금 한줌을 삼킨 듯 온 입 안이 텁텁하고 입술은 부르튼다. 누구와 무슨 소리를 주고받았는지 기억에도 없다. 아이처럼 궁금증의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람을 대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져 꼼짝달싹도 하기 싫어진다. 며칠 전 손바닥을 턱에 괴고 멍하니 있을 때, 동료가 웃으며 ..

좋은 수필 2023.04.17

편지 / 백석

편지 / 백석 ( 서간문 형식으로 쓴 수필)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엣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

좋은 수필 2023.04.16

풍경/ 조정은

풍경/ 조정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람쥐가 분주히 달려간다. 쪽빛 하늘과 홍조를 띠기 시작한 숲이 깊은 포옹을 하고 있다. 나무줄기가 수액을 빨아올리는 일을 그치자 잎은 곧 때를 알고 마지막으로 치장을 하는가 보다. 내가 지나쳐 온 가을을 되짚어 본다. 알밤이 떨어지는 밤나무 숲을 가시에 찔리면서 뛰어다니던 유년 시절,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으시던 노부모님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농사를 지어 볼까 꿈꾸던 일, 뜻하지 않게 서울로 올라 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풍 든 산을 찾아 휴일마다 떠나던 이십대, 아이를 등에 업고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던 신혼, 그리고 지난 몇 년은 휴일조차 없이 생업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산사로 오르는 길을 걸어 본 지가 얼마 만인가. 하늘도, 하얀 구..

좋은 수필 2023.04.16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

하늘에도 정원이 있을까/김채영수필 봄비 치고는 대단한 폭우였다. 보랏빛으로 하늘이 쩍쩍 갈라질듯한 번개와 요란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의 면회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상가건물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산을 사들고 나오는데 빨간 에나멜 광택의 찻주전자가 불현듯 내 눈을 사로잡았다. 집에 찻주전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허기가 밀려왔다. 가스 불에 달아오른 주전자는 휘익 하고 열기를 모아서, 이내 맑고 고운 음계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삐삐주전자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어느 새벽 피를 토하고 쓰려져서 응급실로 실려 갔고, 간경화라는 진단을 ..

좋은 수필 2023.04.15

◇ 칸나의 담장 / 김채영

◇ 칸나의 담장 / 김채영 ​ 길을 가다가 담 너머로 눈을 맞추려 애쓰는 칸나를 본다. 울안에 여러 꽃들과 함께 심겨졌으련만 칸나꽃은 뿌리만 울안에 담그고 무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은근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새빨간 꽃잎을 보라. 영락없이 농염(濃艶)한 여인네의 입술이다. 칸나는 덩쿨 장미처럼 무모하게 담을 넘지는 않는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어 의식너머의 세상을 은밀하게 넘보다 몰래한 사랑에 저리 꽃잎이 애처롭게 고운가 보다. 한동안 내 안에 합류하지 못한 체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던 사랑니도 저러했을까. 한철 불꽃처럼 피어 담장 밖을 수없이 넘겨보다 동면하는 칸나처럼 내 잇몸에는 사랑니의 뿌리가 있다. ​ 지혜를 알만한 나이에 발육된다는 사랑니. 그러나 치아 중에 가장 늦게 나서 맨 먼..

좋은 수필 2023.04.15

산을 넘다/김채영

산을 넘다 김채영 낙조가 절정일 때면 서쪽으로 창문이 난 작은방까지 분홍빛으로 물들어 온다. 서녘 하늘가에 활짝 펼쳐진 연분홍 치맛자락. 아파트 유리창들도 이 시간이면 분홍 색유리로 변해 있고, 구름마저 붉은빛으로 동쪽 하늘까지 징검징검 이어져 있다. 그 위로 저녁 새들이 한 떼 후루루 --빠르게 날아 둥지로 향한다. 차를 타고 길을 떠날 때면 산은 늘 싱그러운 초록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리고 가까운 산 뒤에 겹쳐지는 또 다른 산의 원경들이 중첩되어 보랏빛 혹은 청회색 빛으로 꾸물거리며 따라오곤 했다. 언제나 그렇게 내 인생은 산 너머에서 실타래 풀리 듯 산 끝에 매달려 내 안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산 너머에는 내가 사랑했던 추억 속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어릴 적 헤어진 소꿉친구도,..

좋은 수필 2023.04.15

망개 넝쿨 / 박시윤

망개 넝쿨 / 박시윤 산을 오른다. 산행에서 누군가를 젖혀 보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욕심이라며, 행여 그런 거라면 애초에 빠지라는 말에 발끈 오기가 치민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나를 중환자 취급하는 가족들의 태도가 사뭇 못마땅해 이를 악물고 따라나섰다. 누가 뭐래도 산행을 하기에 나의 체력은 충분했다. 남정네들은 일찌감치 걸음을 치고나갔다. 나를 걱정해서인지 큰아들 놈이 느린 내 보폭을 맞추며 동행한다. 무리였을까. 중턱까지도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식은땀이 나고 산멀미가 치밀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백안이 되어서야 못 이긴 척 바위에 몸을 기댔다. 아들놈이 산행을 멈추고 내려가자 성화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태 전, 암 진단과 더불어 몸의 한 곳을 도려내고 수시로 나타나는 익숙한 증상이..

좋은 수필 2023.04.10

반 칸짜리 장롱 / 전유경

반 칸짜리 장롱 / 전유경 여기 김포로 이사올 때 근 10년을 써오던 장롱의 한 쪽을 떼서 버리고 왔다. 시집 올 때 해 온 혼수였는데 고운 손때가 묻어 정이 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 싣고 와서 안방에 두자니 커진 안방 크기에 비해 장롱이 작아서 벽면이 많이 드러나 보기 흉할 것 같았다. 궁리를 하다가 연한 분홍색이라서 아이들 방에 넣어 줘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길이가 문제였다. 줄자로 이리저리 길이를 재보니 그 장롱 세트에서 반 칸짜리 하나만 떼어 내고 서랍장과 붙여 넣으면 그 방에 잘 맞는 한 세트의 가구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몇 날을 고민하던 일은 반 칸짜리 하나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사하던 날, 경비실 앞 폐가구 수집 장소에 그 반 칸짜리..

좋은 수필 2023.04.09

우리집 상어이야기 /박청자

우리집 상어이야기 /박청자 상어를 두고 '시카고의 갱'이라 한다. 검은 등과 흰 뱃살, 날카로운 이빨과 지느러미. 세련된 몸매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내 세상인양 종횡무진 유영하는 모습은 가히 바다의 갱이라 불릴 만하다. '영천 장 돔배기'라는 상어를 처음 본 것은 시집을 와서다. 시댁의 곳간에는 시래기 등 말린 채소들을 걸어두는 바람벽이 있었다. 돔배기는 새끼줄에 꿰인 채 그 곳 한 편에 매달려 있었다. 독 간으로 딱딱해 진 베개뭉치 같은 것을 본 순간, 맛보다는 생선의 외양이 더 궁금했다. 살덩어리일 뿐, 머리도 꼬리도 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푸줏간 주인이 쇠고기를 빗 듯 저며 와 쌀뜨물에 담근다. 그리곤 밥이 뜸들 때 함께 넣어 찐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어르신의 밥반찬으로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

좋은 수필 2023.04.09

쌈 / 김종희

쌈 / 김종희 어쩌다 가는 뷔페식당은 참으로 거북한 곳이다.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모양도 그렇지만 더 먹으려고 다시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이 편치가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녀적에는 양식당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마치 뜻 모를 팝송 한두 개쯤 따라 부르는 것처럼. 세월 따라 식성도 바뀌고 습관도 바뀌었다. 이제는 온돌방에 눌러앉아 질펀하게 먹는 맛이 더 좋다.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아가며 먹는 맛이 더 좋다. 이것저것 섞으면 비빔밥이요, 요것저것을 얹어 먹으면 쌈밤이니 한 가지를 주문하고서도 덤으로 두 가지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음식이다. 주문을 받는 사람 앞에서 수프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나,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선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더 좋다...

좋은 수필 2023.04.09

매미의 껍데기/임병숙

매미의 껍데기/임병숙 뒤뜰의 감나무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곳은 그늘이 좋아서인지 둥치가 든든해서인지 여름만 되면 녀석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울음소리가 감나무 잎을 흔들었다. 심술궂은 햇빛과 잔인한 바람도 막아주는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풀죽은 나뭇잎처럼 무더위에 지친 심신으로 청량제처럼 스며든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들리던 자리에 매미의 껍데기가 매달려 있다. 불필요해서 알맹이만 쏙 빠져나간 것일까. 박제처럼 매달려 있는 껍데기를 살짝 만져 보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녀석의 생김새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는 모습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애절한 울음이 고막을 울린다. 심신을 적셔주던 울음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신음이었을까. 해탈하며 입가로 새어 나왔을 비명이..

좋은 수필 2023.04.09

옥당목 / 장규섭

옥당목 / 장규섭 신기한 일이다. 날마다 보는 이부자리인데도 옥당목 요 호청이 시선을 끈다. 보기에는 단조로운 흰빛이지만 약간 거칠듯 한 바탕이 석새삼베같이 성글게 보인다. 모양새와는 달리 가만히 어루만져보면 유난히 촉감이 부드럽다는 느낌이 와 닿는다. 깨끗이 꾸며놓은 요 호청이라 그런지 더욱 반지르르하고 여름 내내 비가와도 전혀 눅눅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 뿐이랴 우리의 체온에 맞게 온기를 조절해 주어 요즘 나오는 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오묘함마저 지니고 있는 듯하다. 씻을 때마다 꾸밈의 번거로움이 따르긴 해도 그것을 능히 에끼며 사용할 충분한 가치를 지녔기에 기꺼이 마다않고 옥당목을 꾸미는 감촉에 매료된다. 마치 편리한 생활을 거부하는 속성이라도 지닌듯 요즘 고급 천으로 미화된 침구류보다 옥당목 요 ..

좋은 수필 2023.04.09

난(蘭), 나다 / 서찬임

말이 없는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지독한 인내다. 난초는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특히 난초는 더 그렇다. 누군가 난초는 게으른 사람이 키워도 될 만큼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솔깃하여 난초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난초는 말 없음 속에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시름시름 말라 갔다. 반항 같은 것이었다. 지극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처음엔 내 게으름에 화가 났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내 무신경이 나를 질책했다. 그 즈음이었다. 흙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삐죽이 내미는 것이 있었다. '꽃대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마터면 흙과 난을 신문지로 싸서 통째로 버릴 뻔 했다. 하찮은 식물이지만 자신이 버려진다는 것을 눈치 챘을까. 나는 내 마음에서 벗어난 것은 빨리 정리하는 편이다. ..

좋은 수필 2023.04.09

집 / 조일희

집 / 조일희 양지바른 구릉이 시끌시끌하다. 이장하는 인부들이 평평한 곳을 찾아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는다. 세월에 풍화된 육신은 제자리로 돌아간 지 오래고, 회백색 시간이 담긴 뼛조각만 백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닥에 유골을 길게 늘여 놓으니 사뭇 사람의 형체처럼 보인다. 육탈한 모습 위로 생전의 아버지가 겹쳐 보여 일순 마음이 숙연해진다. 몇 해 전, 친정엄마 생신날이었다. 상을 물린 후 엄마는 "흩어져 있는 묘를 한곳에 모아놓고 죽어야 편히 죽을 수 있겠다"며 이장에 대해 넌지시 운을 뗐다. 밭 한 뙈기 없는 빈한한 집으로 시집왔으니 어디 제대로 된 선산이나 있었겠는가.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동으로 서로 제각각 모셨을 수밖에. 자식들은 유골을 화장해 가까운 납골당에 모시자고 입을 모았지만 엄마..

좋은 수필 2023.04.09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변재영

변재영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곳 이 절터다.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 같이 산다.’는 명시 한 구절을 곱씹으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찾았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소녀의 젖꼭지 같은 감또개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천맥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올린 육화산의 산정기가 흘러내려 살포시 품은 장연사지는 모든 ..

좋은 수필 2023.04.08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점심때 온다던 아들네가 늦을 것 같단다. 프리랜서인 아들은 작업 시간이 늘 들쑥날쑥하다. 급히 보내주어야 할 뮤직비디오 편집이 이제 막바지란다. 결혼 전에도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들더니 장가가서도 신혼 살림집이 지척이건만 또 그 모양이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남편은 에그 녀석 하더니 TV를 켠다. 툴툴거리지만 아들 기다리기 프로젝트(?)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음식 차리던 손길을 멈추고 식탁에 앉아 읽다가 접어놓은 를 펼쳤다. 이즈음 친구들이 어린 왕자를 같이 읽자고 했다. 이 나이에 어린 왕자라니! 했는데 한번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침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을 읽을 차례였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좋은 수필 2023.04.08

진눈깨비 내리던 날/이미경

진눈깨비 내리던 날 이미경 아침부터 흐린 날은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있는 시외버스 안은 가끔씩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는 촌부 몇 사람뿐이었다. 사내가 버스에 오른 것은 공단을 막 벗어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차비가 조금 모자랄 거라는 말을 하며 태연하게 차에 올랐다. 부족한 차비를 들고서도 미안해하거나 굽실거리는 표정은 없었다. 어깨에 연장 가방을 멘 사내의 몸은 다부져 보였다. 사내는 맞은편 자리에 구겨지듯 주저앉더니 차가 왜 이리 느리냐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흐르는 음악이 좋다고 하다가 방송의 멘트에 불만을 표현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차가 느리다며 소리를 질렀다. 차창의 진눈깨비가 눈물처럼 주룩룩 흘러내린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

좋은 수필 2023.04.08

단아한 슬픔/김진순

단아한 슬픔 김진순 해를 몰아내고 창 밖에 어둠이 서성일 때마다 기다려진다. 옷깃에 바람을 풍성하게 달고 와 줄 것만 같아서 두근거린다. 펄럭이는 푸른 잎처럼 활기차게 너는 그렇게 나에게 온다. 대지로부터 전해오는 발걸음 소리는 이미 현관에 닿아 있고, 무심히 벗어놓은 신발은 왜 이토록 애잔한가. 복숭아 빛깔처럼 고운 미소와 허기에 찬 손놀림을 영광스런 훈장을 보듬듯이 밀도 있게 바라보고 싶다. 온전한 삶이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명백하게 유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상실을 통해 알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왔다. 2012년 3월 아들은 교통사고로 인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부재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54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아들은..

좋은 수필 2023.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