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101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변재영

변재영 '노천 박물관, 장연사지'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곳 이 절터다.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 같이 산다.’는 명시 한 구절을 곱씹으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찾았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소녀의 젖꼭지 같은 감또개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천맥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올린 육화산의 산정기가 흘러내려 살포시 품은 장연사지는 모든 ..

좋은 수필 2023.04.08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장미에게 들인 시간 유병숙 점심때 온다던 아들네가 늦을 것 같단다. 프리랜서인 아들은 작업 시간이 늘 들쑥날쑥하다. 급히 보내주어야 할 뮤직비디오 편집이 이제 막바지란다. 결혼 전에도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들더니 장가가서도 신혼 살림집이 지척이건만 또 그 모양이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남편은 에그 녀석 하더니 TV를 켠다. 툴툴거리지만 아들 기다리기 프로젝트(?)에는 이미 이골이 났다. 음식 차리던 손길을 멈추고 식탁에 앉아 읽다가 접어놓은 를 펼쳤다. 이즈음 친구들이 어린 왕자를 같이 읽자고 했다. 이 나이에 어린 왕자라니! 했는데 한번 손에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마침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을 읽을 차례였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좋은 수필 2023.04.08

진눈깨비 내리던 날/이미경

진눈깨비 내리던 날 이미경 아침부터 흐린 날은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있는 시외버스 안은 가끔씩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는 촌부 몇 사람뿐이었다. 사내가 버스에 오른 것은 공단을 막 벗어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차비가 조금 모자랄 거라는 말을 하며 태연하게 차에 올랐다. 부족한 차비를 들고서도 미안해하거나 굽실거리는 표정은 없었다. 어깨에 연장 가방을 멘 사내의 몸은 다부져 보였다. 사내는 맞은편 자리에 구겨지듯 주저앉더니 차가 왜 이리 느리냐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흐르는 음악이 좋다고 하다가 방송의 멘트에 불만을 표현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차가 느리다며 소리를 질렀다. 차창의 진눈깨비가 눈물처럼 주룩룩 흘러내린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

좋은 수필 2023.04.08

단아한 슬픔/김진순

단아한 슬픔 김진순 해를 몰아내고 창 밖에 어둠이 서성일 때마다 기다려진다. 옷깃에 바람을 풍성하게 달고 와 줄 것만 같아서 두근거린다. 펄럭이는 푸른 잎처럼 활기차게 너는 그렇게 나에게 온다. 대지로부터 전해오는 발걸음 소리는 이미 현관에 닿아 있고, 무심히 벗어놓은 신발은 왜 이토록 애잔한가. 복숭아 빛깔처럼 고운 미소와 허기에 찬 손놀림을 영광스런 훈장을 보듬듯이 밀도 있게 바라보고 싶다. 온전한 삶이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명백하게 유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상실을 통해 알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왔다. 2012년 3월 아들은 교통사고로 인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부재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54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아들은..

좋은 수필 2023.04.07

순천만 갈대 /김원순

순천만 갈대 /김원순 순천만에서 비로소 갈대다운 갈대를 만났다. 살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갈대다. 갈대도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바람의 등에 업혀서 내게로 쓰러져 눕는다. 을숙도 갈대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저무는 해무海霧 사이로 노을에 타는 금빛 울음을 순천만 가슴에 서리서리 풀어놓는다. 이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갈대의 사연을 바람이 넌지시 전해 주고 간다. 뭍이 아닌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살아가는 갈대 줄기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절망 하나에 갈대 하나, 체념 둘에 갈대 둘, 그렇게 식구를 늘리며 휘파람 소리로 외로움을 달랬을 것 같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갈대들은 어느새 바람이 되고, 갈대밭을 지나가는 바람도 모두 갈대가 된다. 늘 흔들리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의연하고도 비장한..

좋은 수필 2023.04.07

늙은 펭귄의 날갯짓 / 윤태봉

늙은 펭귄의 날갯짓 / 윤태봉 시속 20㎞의 강풍이 부는 영하 60도 극한의 땅 남극, 포식자와 추위로부터 새끼를 지키려는 수컷 황제펭귄의 부성은 65일 동안 눈만 먹으며 서서 자는 고행도 마다치 않는다. 몸무게가 반으로 주는 고통 속에서도 제 위를 게워 새끼에게 펭귄 밀크를 먹이는 희생은 감히 사람도 흉내 내기 힘든 숭고함이다. 눈보라로 한 치 앞이 구분키 어려운 혹한에서의 사투, 그것은 품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조심스레 뒤뚱거리며-수천의 수컷 펭귄들이 서로의 체온을 안팎으로 바꾸는 허들 링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다. 차마 눈물겹기까지 하다. 누가 펭귄을 한낱 말 못 하는 동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짐승도 저러한데 권위적이며 표현이 적다고 누가 내 아버지의 사랑이 모성애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

좋은 수필 2023.04.07

그냥’이라는 말은 / 김영수

그냥’이라는 말은 / 김영수 ​ ​ ​전화를 받으니 친정엄마였다. “여보세요”가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그냥 걸었다. 잘들 있지?”하고 증손주 소식부터 물으며 거긴 지금 잘 시간이겠구나, 했다. ​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건 아닌지 엄마 목소리로 가늠하며 시계를 보았다. 밤 열두 시 반이니 엄마 계신 곳은 낮 한 시 반. ​ 점심식사를 궁금해 하는 딸에게 엄마는 여전히, “그냥 걸었대도...” 하며 딸의 잠을 방해할까봐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 혼자 살다보니 어떤 날은 종일 입 한번 뗄 일 없이 하루가 지나더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멀리 사는 효자보다 가까이 사는 불효자식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엄마는 말 상대가 그리운 거였다. ​ 거긴 밤일 텐데 이제 자야지 자야지, 하면..

좋은 수필 2023.04.06

7월을 닮은 남자/김유정

7월을 닮은 남자 김유정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사슴이 뿔을 가는 달, 또는 들소가 울부짖는 달 ㅡ 인디언이 부르는 7월의 다른 이름들이다. 1년을 반으로 접어 나머지 절반을 새로 시작하는 7월은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초록은 보다 원숙해지고 열매는 더욱 단단해지며, 곤충이나 동물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허물을 벗는다. 1년 중 생명력이 절정을 이루는 시간, 바로 7월이다. 지하철이 답답한 터널을 빠져 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객차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꾸벅거리며 조는 사람들 머리 위에도 햇빛이 머문다. 나는 눈이 부셔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람들 물결에 밀려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 내 몸을 지탱하는 발은 굽 높은 구두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힐..

좋은 수필 2023.04.04

인간수리공/주인석

인간 수리공 주인석 두 대 정도 세게 때리고 나니 손이 얼얼하다. 전에는 한 대만 때려도 금방 말을 듣던 것이, 요즘은 몇 대를 때려도 꿈쩍 않아 갖다 버릴까 고민 중이다. 저러다가 멀쩡할 때도 있으니 버리기도 그렇다. 평소 말이나 못하면 밉기나 덜하지. 한 번 말이 터지면 청산유수라, 나는 도대체 따라갈 재간이 없다. 지금 입 닫고 있다고 버릴 수도 없고, 안 버리자니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다. 2년 전에 산 카세트가 벌써 며칠째 속을 썩인다. 테이프를 넣으면 씹어서 뱉어 내기 일쑤고, 어째 달래 놓으면 찡찡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은 묵묵부답이다. 혹시 먼지가 끼어 그러나 싶어 드라이기 바람을 갖다 대기도 하고, 면봉으로 살살 닦기도 하고, 뻑뻑해 그런가 싶어 기름칠을 해 봐도 여전하다. 요즘 것들은..

좋은 수필 2023.04.04

4막 53장, 연극은 끝나고/문경희

4막 53장, 연극은 끝나고 문경희 시원섭섭하다. ‘미끄덩’ 오래 전 한생명이 내 안을 박차고 나가던 순간, 아릿하게 전신을 꿰던 야릇한 상실감 같다 할까. 기쁨이다가, 두려움이다가, 안도였다가, 근심이었다가, 그 모두가 어우러진 우울이었다가, 다시 날아갈 듯 홀가분함이었다가…….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세상에 첫 신고식을 치르는 핏덩이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종잡을 수 없는 기류가 나를 휘몰아친다. 급작스레 만져지는 내 안의 동공을 쓸어내리며 훗배처럼 나를 앓던 먼 그날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왜일까. 요 며칠 습관처럼 오래된 샹송, ‘기차는 떠나고’를 거푸 찾아 듣는다. 이별의 애절함보다는 엘렌느라는 여가수의 허스키한 비음이 기억에 남던 곡이다. 경쾌한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그를 보낸 허허함도 다소는..

좋은 수필 2023.04.04

당김 줄 / 배단영

당김 줄 / 배단영 남산 자락 삼릉에 가면 나무들이 당김 줄로 버티고 있다. 휘어진 채 밑으로 쓰러지려는 나무들을 잡아당기며 같이 견뎌보자는 모습이다. 당김 줄을 보면서 진료를 받기위해 찾아온 부부를 떠 올렸다. 언젠가, 같이 시각 장애를 가진 부부가 진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풀잎 같은 여자가 더듬거리며 문을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누구라도 당황해서 홍당무처럼 붉어질 정도로 무안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달팽이처럼 천천히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접수를 했다. 접수를 하면서 남자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이 필요한지 소상하게 설명까지 했다.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뒤따라 들어온 남자를 찾았다. 적당한 자리에 앉힌 다음에야 그녀는 접수를 했다는..

좋은 수필 2023.04.04

북소리 / 문육자

북소리 / 문육자 북소리가 날아오른다. 길 없는 하늘에 길을 만든다. 소망을 매단 소리다. 가끔은 가슴을 멍들게 하고는 매몰차게 뿌리치고 휭하니 가는 연인의 뒷모습 같다. 북은 비어 있어야 우람한 소리를 낸다. 맞아야 울음을 운다. 그 소리가 어떤 색깔을 가지든 그들은 운다. 고모는 사흘 낮밤을 할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 북이 아닌 고모는 북처럼 맞았다. 신이 내렸다고 했고 할아버진 집안 망신에 남세스러워 바깥에도 나갈 수 없다고 같이 목매달자고 추운 겨울인데도 홑적삼에 무명치마 입은 고모를 한을 담아 힘껏 때렸다. 오히려 고모부는 데면데면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역부족이었고 그 시린 겨울의 서리 내린 마당에서 버선발의 고모는 대를 잡았다. 신이 내렸다고 했다. 얼굴은 번질거렸고 정신없이 흔드는 대나무..

좋은 수필 2023.04.01

문간방 사람 /손광성

문간방 사람 /손광성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문간방 저쪽은 바로 한길이기 때문이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면으로 괴로워한다. 밤에는 골목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일찍 잠들 수 없고, 아침에는 두부장수의 요령소리에 잠을 설친다. 그러다가 우유배달부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그 빈약한 잠에서마저 결국 깨고 만다. 사람이면 누구나 참을성이 있어야겠지만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골목에서 들리는 여인네들의 수다 떠는 소리도 참아야 하고, 마을 아이들의 소란과 아우성도 참아야한다. 설사 야구공이 창문을 부수고 날아드는 이변이 생긴다 해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 대학시절이었다. 친구와 함께 제기동 어떤 집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는데, 벽을 사이에 둔 저쪽..

좋은 수필 2023.03.31

경계에서/현경미

경계에서 현경미 고창읍성의 성벽 위를 걷고 있다. 성 안과 성 밖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도 밖도 봄기운으로 한창이다. 성 주변에는 새순은 새순대로, 봄꽃은 봄꽃대로 그 화사함에 눈이 멀 지경이다. 한참을 걸었을까.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성벽 밖을 타고 돌던 담쟁이 묵은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성벽 돌 틈사이로 지금 막 성 안으로 들어 온 듯 담쟁이 새순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갈 길을 잊은 채 담쟁이 새순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본다. 굳이 이 비좁은 돌 틈을 지나 안으로 들어와야만 하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을까. 애처로운 듯 대견한 듯 겨울을 넘긴 담쟁이 새순을 내려다보며 내 마음 벽에 붙어 간혹 따끔거리게도 하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내게도 기나긴 겨울이 있었다..

좋은 수필 2023.03.29

막돌/김윤선

막돌 김윤선 나는 지금 뒷마당에서 잔돌을 줍고 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늘 화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행운목이 안쓰러웠는데 마침 친구가 작은 돌멩이를 채워 중심을 잡아준 것을 본 때문이다. 공연히 마음이 달뜨고 바쁘다. 모두가 막돌이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허접한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앙증맞기까지 하다. 막 부화한 새끼들 같다. 열 손가락 크기가 다 다르듯 한 마당에서 주웠어도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이다. 검은색이있는가 하면 황색을 띤 것도 있고, 고운 결을 가진 것도 있다. 모서리가 뾰족하니 각진 것도 있고, 동글동글 닳아서 매끄러운 촉감의 것들도 있는 게 그간의 삶에 대한 제 나름의 고집으로 보인다. 소금물에 담가두면 색상이 더욱 선명해진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잠시 돌을 양푼에 담갔다..

좋은 수필 2023.03.28

침등(枕燈) / 허세욱

침등(枕燈) / 허세욱 내게 40센티 쇠막대의 전등이 있다. 그 이름도 쓰임에 따라 달랐다. 책상에 있을 때는 서등書燈이요, 베갯머리에 놓일 때는 침등이다. 그 조형이 단조롭거니와 무게도 헐쭉해서 한손으로 들기에 넉넉했다. 1미터 높이의 책상에서 끼적거리다가 나른해지면 슬그머니 그 아래로 눕는다. 바닥에 요를 깔면 당장 침상이 된다. 그 머리에 베개를 놓고 그 바른편에 등을 옮기면 아늑한 촉광의 침등이 된다. 등이 내 총애를 받는 까닭은 그 배꼽에 달린 잠자리 눈깔만 한 스위치의 민첩 때문이었다. 안개처럼 스르르 잠이 몰려올 때 살짝 기지개를 펴거나 손사래 치듯 그 스위치에 손등을 대면 세상은 한 찰나에 어둠이 밀려왔고 나는 그 속에 침몰했다. 그것이 민첩할 뿐 아니라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던 것도 ..

좋은 수필 2023.03.28

바닥의 시간 / 문혜영

바닥의 시간 / 문혜영 앞으로 나아가다가 길이 막히거나 삶이 멈춰있다고 생각될 때면, 아들은 자진하여 더 힘든 자리를 찾아 떠나곤 했다. 안일함 속에 길들여지면 방향감각을 잃고, 삶이 무력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과학 고등학교였다. 집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해야만 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대학을 진학하고 난 뒤엔 함께 살 수 있어 좋았지만, 실험실에서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 아들 때문에 학교 가까운 봉천동으로 이사 왔는데, 아들은 또 다시 훌쩍 유성으로 내려가 기숙사와 연구실만 왔다 갔다 하면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연구를 해보겠다며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서울에서 의학공부를 하느라고 신랑을 따라가지 못한 며느리는..

좋은 수필 2023.03.27

3월은 봄이 아니다/이복희

3월은 봄이 아니다/이복희 3월은 언제나 몸살처럼 왔다. 한겨울의 추위에 갇혀있던 몸이 해빙기의 지표면처럼 풀어지고 있는 걸까. 실제로 겨울을 잘 넘겨놓고 감기몸살에 시달리곤 하는 것도 다 3월의 일이었다. 성급하게 봄을 기대한 탓인지 추위도 한겨울보다 오히려 심하게 느껴졌다. 3월의 한기는 어디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움처럼 대책이 없다. 오래 앓던 이들이 숨을 놓아버렸다는 소식도 3월에 자주 들려왔다. 그해 3월의 어느 날, 별 이유 없이 한복을 입어 보았다. 집에 있는 자투리 천을 이용해 언니가 만든 것이었다. 감색 바탕에 자잘하게 그려진 하얀 꽃송이들이 봄, 봄하며 어서 입어보라고 소는 대는 것 같았다. 꽃샘추위 속에 포근해진 날씨도 한몫 거들었다. "이쁘네, 우리 딸, 한복 입으니​…." 수선 ..

좋은 수필 2023.03.27

가을이 왔습니다 / 장석주

가을이 왔습니다 / 장석주 눈雪과 죄로 음습한 계절을 지나 산벚꽃 진 뒤 태풍처럼 밀려온 여름이 있었다. 그 여름의 날들엔 쌀독이 비는 것, 시작하는 일과 실패 따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도와 족보, 도덕과 관습에 반항하고, 새벽 풀숲에서 떨어진 별을 주우며 불가능을 꿈꾸었다. 젊음이란 잔고殘高가 두둑했으니 그걸 믿고 방종에 빠졌다. 랭보같이 "바람 구두를 신고" 겁 없이 "해진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세계를 다 떠돌 기세였으나 목포나 군산 선창가 언저리를 헤매다가 돌아오곤 했다. 아직 젊었을 때 행위·열정·지식을 다 털어 넣어 판을 짜느라 골몰했으나 나는 결코 순진무구하지 않았다. 젊음의 질병, 젊음의 나태함, 젊음의 추악함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예의 없고, 파렴..

좋은 수필 2023.03.27

남편의 반칙/조영선

남편의 반칙 조영선 독거노인이 되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어이없이 죽을 수도 있다. 남편이 그렇게 타계했고 내가 그렇게 남겨졌다. 100일 전의 일이다. 나이로 보아서는 남편이니(85), 아내(87)인 내게, 그리고 또 어떤 노약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두드러지게 삶의 의욕과 대비가 달랐다. 남편은 모기에게 물려도 병원을 찾는 사람이다. 자고 일어나면 여기저기 몸을 움직여 보고 혹시 불편한 곳은 없나 자가점검을 철저히 한다. 남편은 몸을 신생아처럼 관리한다. 그의 좌우명 중 “첫째는 병은 초기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완치에 이를 때까지 치료를 받는다.”라는 것이다. 한편 아내는 어떻게 둘러대서라도 병원에 가는 것은 피하고 본다. 웬만한 병은 자연 치료가..

좋은 수필 2023.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