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호미의 낮잠/박순태

호미의 낮잠/박순태 마을 곳곳에서 낯익은 풍경이 걸음을 세운다. 텃밭 옥수수는 수정되는 시기에 맞춰 대궁이마다 뿌연 애향(愛香)이 풍긴다. 감자 씨알은 나날이 굵어가면서 주변 흙을 불룩하게 부풀어 올린다. 울도 담도 없다던 울바자를 따라 양대 콩은 벼름벼름 깍지를 뚫고나올 기세다. 모두 부풀고 일어나고 기를 세운다. 초여름 주말 오후가 조용히 기지개를 켜는 시골 풍경이다. 아내와 시골집을 들르는 길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해진다. 고향을 찾아오는 길은 아무리 익숙하여도 매번 오관과 육감을 새롭게 살려낸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변환이 머릿속이 아니라 나이 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고샅을 돌았다. 점심을 두둑하게 먹었건만 갑자기 허기가 진다.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던 소죽솥..

좋은 수필 2022.06.05

마당도배/박노욱

마당도배 / 박노욱 귀찮기만 했던 마당을 도배하던 일이 그립다.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럴까. ​ 마른 마당은 늘 평온하다. 비가 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며칠을 마다하지 않는 비나 모다깃비가 쏟아지면 진흙탕이 된다. 비온 후 울퉁불퉁해진 마당을 삽이나 널빤지로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마당도배라고 불렀다. 옛날 마당은 요즘의 아파트 주차장보다는 우리 가족만의 공간인 거실과 더 가까웠다. 거실을 도배하듯 마당도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 갖가지 이유로 마당은 곰보가 된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나무랄 수 없다. 들일하고 돌아온 삼촌의 리어카 바퀴자국도 어쩔 수 없다. 수탉이 광기를 부린 자리와 강아지나 고양이 발자국까지도 봐 줄 수 있다. 막걸리에 건들 취하신 아버지가 남긴 갈지자 흔적은 마음이..

좋은 수필 2022.06.02

시골집 마루/마경덕

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구시렁구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

좋은 수필 2022.06.01

따라쟁이 / 김영관

따라쟁이 / 김영관 친구들의 모임에서였다. 한 친구가 얼마 전부터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데, 음식을 먹을 때 입가에 묻히거나 흘리는 일이 잦아 가족들의 시선을 받는 모습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슬슬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듣던 나는 그가 내 말을 하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엊그제였다. 손주들이 와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자 아내는 따지듯 말했다. 당신 입은 감각이 없어요. 순간 멍해하는 나에게 집사람은 강펀치를 날렸다. “식탁에서 애들이 자꾸 당신 얼굴을 살피는 걸 못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앉은 큰 손녀가 두어 차례 휴지를 건네며 입을 닦으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요즈음 들어 밥을 먹다 음식을 잘 흘리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다 놓아다를 반..

좋은 수필 2022.05.31

전등불/김영관

전등불/김영관 두메산골에 미수의 어머니가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어머니 집에 전화가 되지 않았다. 전화국에 문의했다. 어머니가 사는 동네에 통신선이 끊어져 복구 중이라 했다. 나는 대구에서 반찬 몇 가지를 챙겨 경주 산내로 향했다. 보름 만이었다. 운문댐을 끼고 돌아가는 길모퉁이 군데군데 빙판길이었다. 마음이 조급한 나에게는 위험하고 먼 길이었다. “어머니!” 삽짝을 들어서며 큰 소리로 불렀다. 기척이 없었다. 마당이며 마루며 켜진 전등불만 나를 반겼다. 방문 문고리를 당겼다. 널브러져 있는 이불이 한방 가득이었다. 작은 봉창엔 비닐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보온이 부실한 산골의 슬레이트집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가슴이 싸해졌다. 전기료깨나 나오겠다..

좋은 수필 2022.05.30

비아그라 두알/민혜

비아그라 두알/민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알 약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약은 남편의 옷장 서랍 속에 숨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상자 속의 또 다른 아주 작은 상자 안에 은밀히 감춰져 있었다. 우리 집 약들은 모두 거실 서랍장 안에 있었기에 나는 약에 쓰인 글씨를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그 유명한 비아그라였다. 순간, 남편을 향한 울컥함이 잠시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야릇했다. 이렇듯 청초하고도 평온한 푸른빛의 약이 비아그라였다니. 사춘기 소년의 서랍 속에서 나온 포로노 잡지를 본 엄마의 느낌이랄까, 아니, 처음엔 그저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위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중 갑작히 의식불명이 되어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20..

좋은 수필 2022.05.30

까마귀/이수현

까마귀/이수현 물이 펄펄 끓는다. 그저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본다. 부글부글하던 주전자는 이내 뚜껑을 들썩인다. 불은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이 다 끓었음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보리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넣었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 앉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영채가 태어난 뒤로는 한 시도 고요할 틈이 없던 우리 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독이 소름 끼치도록 밉다. 눈이 제 아빠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눈동자는 나를 닮아 투명한 갈색을 띤 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였다. 금방이라도 그 애가 엄마 하며 뛰어올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난 영채를 보낸 날에도 눈물이 ..

좋은 수필 2022.05.27

도리깨(耞) / 윤남석​

도리깨(耞) / 윤남석 ​ ​ ​ “위잉 탁, 위잉 탁” 세 가닥의 휘추리가 공중제비를 넘더니 콩더미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잔뜩 움츠린 깍지속의 콩알이 메어칠 때마다 바들거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무자비한 휘추리의 두들김에 견디다 못해 타닥거리며 튕겨져 나온다. 도리깨질은 엇박자로 쳐야만 상대방이 내치는 휘추리와 맞닥뜨리지 않는다. 서로 호흡을 맞춰 상대방이 이미 두들긴 곳을 한 번 더 두들겨서 겉여문 콩깍지까지 터지게 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진행하는 방향을 쫓아 어긋나게 두들기면서 타작마당을 자근자근 돌게 된다. 그 엇박자로 두들겨야 하는 도리깨질을 반 박자씩 애써 늦춰본다.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하시는 도리깨질이 자칫하면 내 도리깨와 맞부딪칠 수 있기에 속도를 조금 늦추며 리듬을 조절한다. 예전..

좋은 수필 2022.05.27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박영란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박영란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키우라는 말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수필의 한 대목이다. 딸을 타지로 시집보내고 매번 서울역에서 울었던 어머니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돌아서 가는 딸의 매정함이 서운했다. 그래서 던진 말이다. 엄마의 애틋해하는 이별에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으련만.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이 담에 꼭 너 닮은 자식 낳아 키워봐라" 하는 어머니의 목멘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자식이 있을까. 큰 잘못도 아닌 일에, 사소한 일상에서 문득 원망과 한숨이 섞인 이런 푸념이 직격탄처럼 날아오지 않았는가. 자식들은 대개 이 뜨악한 소리에 뭔가 찔끔하기도 하지만, 내심 '내가 왜?' '내가 어때서' 하는 작은 저항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

좋은 수필 2022.05.21

자투리/남지은

자투리/남지은 서랍 여는 소리가 뻐근하다. 너무 오랜만에 열어주니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고적함이 서로 뻐걱대는 소리다. 여러 개의 서랍 중에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칸이 있다. 그 속에는 버리기엔 아깝고 딱히 사용처도 없는 자투리 천과 머리타래와 보자기 등이 있다. 1년에 한두 번 열까말까한 이 서랍을 열 때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연다. 적요에 길이 든 서랍에 오랜만에 관심 두는 것이 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머리타래에 좀이나 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서랍을 여는 순간 고이 잠자던 먼지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위로 아래로 너부러지는 먼지들을 모르는 체하며 이것저것 뒤적인다. 가위자국이 선명한 상처를 안고 수십 년 서랍 속에서 잠자는 자투리 천들을 위로하듯 살살 달래가며 공기도 쐐주..

좋은 수필 2022.05.21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문태준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문태준 얼굴이 푸석푸석하던, 누룩 띄운 독 같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 빛깔을 받는다. 매화와 산수유나무가 우선 그렇다. 불꽃을 받는다. 나는 지난 겨울 보고 들었다, 빈집의 마음을, 바람의 노래를, 얼음의 언어들을, 침묵의 세계를. 요즘 해금 같은 가늘은 소리가, 숨결이 나무에게서는 난다. 새순 한 촉을 땅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참혹했을까? 새순 돋는 나무에게는 회오리가 있다. 새순 돋는 나무들을 보면 나에게 중대사는 무엇인가 묻게 된다. 등짝을 뚫고 나오는 시, 아래로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처음 만난 한 줄기 샘물 같은 그런 시를 받아낸 적이 있는지 묻게 된다. 봄이 오는 산길 들길을 걸으면 그래서 내 마음은 더더욱 오갈 데 없는, 춘설 분분한..

좋은 수필 2022.05.19

자모음 아라리/김경희

자모음 아라리 / 김경희 방송국 우리말 겨루기 예심을 보러 갔을 때다.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관문은 필기시험이었다. 맞춤법이나 우리말 뜻, 공통 서술어 쓰는 것은 수월하게 풀어나갔다. 손등 위로 볼펜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렸는데 자음 첫소리만 띄워 주고 문장을 완결시키는 문제에서 막혀버렸다. ‘ㄷㅈ ㅁㅇ ㅈㅈ ㅁㄱㅇ’ 퍼즐 조각 맞추듯 말들을 끌어다가 잇대봤지만 번번이 어긋나 시간을 축내기만 했다. 시간 종료를 알릴 때서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서둘러 써서 냈다. ​ 디지털시대,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로 일상의 부스러기들까지 나눈다. SNS의 그물망엔 언어유희가 활개를 친다. 깜놀(깜짝 놀람), 버카(버스카드), 열폭(열등감 폭발) 언어들이 해독불가 상태다. 한글 자모를 떼어 닭 모이처럼..

좋은 수필 2022.05.15

비/장석주

비/장석주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 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좋은 수필 2022.05.11

여름이 좋다/ 장석주

여름이 좋다/ 장석주 태양에게 자비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불볕을 쏟는 태양은 만물에게 아주 가혹한 시련을 안길 따름이다. 한낮 이마에 떨어지는 촛농이라니! 태양이 이마를 태우려 드는구나. 한낮 태양이 던지는 금빛 그물에 포획된 생물은 허덕거린다. 하지만 나는 여름이 좋아! 여름이 오면 내 안에 사는 이마가 반듯한 착한 소년이 환호작약한다. 태양은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숲속 활엽수의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인다. 저 먼 곳에 있는 푸른 바다는 더욱 파랗게 빛난다. 태양이 만물에 흩뿌리는 빛은 그것이 기쁨, 희망, 자애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태양 아래서 토마토와 복숭아, 자두가 둥글게 익어 간다. ​ 한낮 공중에서 타던 해가 떨어진다. 해 진 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때..

좋은 수필 2022.05.11

태풍과 칼 / 이인주

태풍과 칼 / 이인주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

좋은 수필 2022.05.08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열세 살 난 계집아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치마폭을 뒤집어 쓴 채 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자진했다. 효도밖에 모르는 어린것이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천길 물로 뛰어들었다. 뱃머리에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두 손을 꼭 잡은 소녀의 잔상이 남아있다. 그림 속 어린아이가 아무리 눈물을 삼키며 서있어도 긴장감은 생기지 않았다. 인형극이며 동화, 거기에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보태져서 그 후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뒷일이 오히려 선명했기 때문이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의 고난은 지워지고 꽃으로 피어난 이후의 삶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효녀 심청 그와 나는 처음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딸자식이라는 처지 하나 밖에는 손톱만치도 닮은 점이 없다. 젖먹이를 두고 어머니는 저세상으..

좋은 수필 2022.05.05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좋은 수필 2022.05.01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여름의 길섶은 싱그럽고 풍성하다. 와르르 쏟아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새끼 제비처럼 주둥이를 벌려 먹이를 받아먹는 것 같은 강물 위로 햇발이 깊숙이 뻗친다. 막 버무려 놓은 상큼한 달래 같은 강물이다. 아름다운 만남이랄까? 양 어깨가 무척 넓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가 우리를 맞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강물이 포옹을 끝내고 시침 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소화불량 걸린 작은 일상들의 체기가 서서히 풀리고 지끈거리던 머리와 지친 마음이 금세 맑아진다. 잃어버린 삶의 의욕이 다시 일어서고 불끈불끈 생각들이 치밀어 오른다. 낯선 통증이다. 누구보다 아픔이 많은 그녀다. 작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남편마저 혈압으로 쓰러져 7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했다. 지금도..

좋은 수필 2022.04.27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 목성균 지금은 다 산이 되었지만 강만돌 어른이 살아 계실 때는 윗버들미의 유지봉 넓은 산자락에는 따비밭들이 누덕누덕 널려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는 사랑간에 한방 가득 장정들이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달빛이 방문을 하얗게 적시면 “달 떴네” 하는 좌장(座長) 말에 놀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 마당 가득한 지게에서 제 것을 찾아 지고 유지봉 따비밭으로 올라갔다. 아직 바심(타작)을 못하고 가려 놓은 채 있는 뉘 집 서슥(조) 더미를 울력으로 져 내리기 위해서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 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 널은 명주자치처럼 달빛에 하얗게 바랜 냇물이며, 순산한 산모가 조용히 숨을 고..

좋은 수필 2022.04.27